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97화 (197/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97화 *

“물론이야.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너와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재앙일 거야. 난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아. 내게 이별은 이미 충분해. 너하고 마저도 헤어질 수 없어.”

바츠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가감 없이 속내를 꺼내놓으며 그녀의 기대에 보답했다. 필요하다면 함께 해달라고 애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굳이 이곳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지금 꼭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못한다면 반드시 언젠가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불안했다. 붉은 얼굴이 난처한 표정으로 머쓱하게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약간 민망함을 느껴야 했지만 눈가에 기쁨이 묻어나는 그녀의 두 눈이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그의 시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그녀의 눈빛에만 집중한 채 자리를 떠났을 뿐이었다. 그에게 아무런 위로도 건네지 못하고 걸음을 돌린 것은 미안한 일이었지만, 마땅히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것도 없었다. 차라리 이렇게 한시라도 빨리 도시를 떠나주는 것이 더 나은 일이었다.

밖은 이제 완전히 하얀 세상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뼈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주인 없는 건물들을 사정없이 관통하며 헤집고 있었고, 긴장감에 적막으로 가득 채워진 텅 빈 도로는 위태롭게 떨고만 있었다. 소복이 쌓여가는 눈앞에서 다들 숨을 죽이고 눈치만 살폈다.

바츠는 그 때문인지 지금이 다른 때에 비해서 유독 더 추운 것 같았다. 강일이 일러준 대로 북쪽으로 그리고 조금 서쪽으로 향하는 걸음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진한 허전함에 몸이 너무도 무거웠다. 굵은 눈발에 가려진 광야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했고, 멀어지는 도시의 뒷모습은 굉장히 쓸쓸해 보였다. 옷깃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날카로운 바람이 자꾸만 가슴을 할퀴는 것 같았다. 전보다 대폭 줄어든 일행도 한몫 거들었다. 절반으로 줄어들며 생겨난 빈자리에 아쉬움이 깃든 외로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도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는 그 기분이 더더욱 심란해졌다. 함께 거니는 아델리나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힘겨운 발걸음이 되었을 것 같았다. 내딛는 걸음이 힘겹다고 느낄 때마다 몇 번이고 그녀를 돌아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추위로 얼굴이 상기되고 눈시울까지 붉어졌으면서도, 그때마다 눈웃음을 지어주며 위로해주었다. 키도 작고 어깨도 작은 그녀가 매우 든든하게 느껴졌다. 주변을 맴돌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패토스도 나름 위로가 되었다. 항상 눈엣가시처럼 신경 쓰이고는 했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흥에 젖어 지치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유난히 반갑게 느껴졌다. 그는 걸음을 옮길수록 체감할 수 있을 만큼 가파르게 낮아지는 기온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것 같았다. 추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눈물대신 콧물로 얼룩진 얼굴로, 미친 사람처럼 이상한 신음소리나 내며 달려 다녔다. 오히려 과격한 움직임에 몸이 데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활발한 모습이었다. 가끔 그를 지켜보며 헛웃음이 터지고는 했다.

그날 밤, 바츠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도 마땅한 쉴 곳을 찾지 못했다. 함박눈 속을 헤매다가 휑한 노면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온종일 내린 눈이 발목까지 쌓였고, 어둠이 가져온 추위까지 더해져 끔찍할 만큼 추웠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지상에 올라와 처음으로 맞이한 밤이 절로 떠올랐다. 지금은 슈트의 콘솔로 체온을 보호하고 있는 데에도 추웠다. 눈이라도 그친다면 그나마 나을 텐데, 잦아들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최악은 따로 있었다. 불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바닥에 쌓인 눈도 문제였지만, 자리를 고른다고 하더라도 장작으로 쓸 만한 땔감을 구할 길이 없었다. 아델리나가 마른 이탄을 조금 꺼내놓았지만, 그건 불쏘시개로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지 장작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 양도 한주먹 밖에 되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바위 밑으로 숨어들어, 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와중에도 패토스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낮에 보여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해찰하며 어슬렁거렸다. 이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완전히 캄캄해져 발등도 확인할 수 없게 되는데, 그는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는 듯 보였다. 내리는 눈 속을 걸으며 헤엄치는 것이 그에게는 뭔가 재미난 놀이인 것 같았다. 그는 그 놀이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하루 종일 놀고도 지겹지 않은 모양이었다. 바츠는 물론이고 아델리나까지도 옆으로 와서 바람이라도 피하라고 했지만, 그는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밤새도록 눈과 함께 춤을 추고 싶은 것 같았다.

바츠는 그를 포기하고 아델리나에게나 신경을 썼다.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앉아있던 그녀를 안쪽으로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슈트의 콘솔도 콘솔이었지만 그녀가 좀 더 큰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길 바랐다. 그리고 사람의 생기가 그것을 충분히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숨을 쉬며 만들어지는 크고 작은 모든 움직임이 기분 좋은 나른함을 그녀에게 전해줄 것이다. 그녀도 더 이상 패토스를 다그치지 않았다. 그를 옆에 앉히는 걸 포기하고는 몸을 비적거리며 품안으로 더욱 더 파고들며 그 나른함을 느끼기 위해 애썼다. 품안에 완전히 자리를 잡으려는 것처럼 편안자세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추위 때문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지 약간의 떨림이 있었다.

“바츠, 그런데 버니 말이야...정말 이상하지 않아?”

바츠도 추위에 고스란히 노출된 얼굴에 얼얼함을 느끼고 있었다. 콘솔로 체온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몸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방독면을 뒤집어 쓴 얼굴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물음에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 그가 자신과 아델리나의 관계를 필요 이상으로 시기하고 있다는 사실만 떠올랐을 뿐이었다. 왠지 억울하면서도 서운했다.

“우리를 질투하는 것 말고 말이야. 자꾸 무섭게 이상한 말을 했잖아. 우리한테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 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느끼지 않았어?”

아델리나가 바츠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용케 지적하고는 걱정스럽게 다시 물었다. 바츠는 그제야 진지하게 그때를 생각해보았다. 그녀 말대로 석연찮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매번 혼란 속에서 지나치고는 했던 터라 금방 잊고는 했는데, 이렇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가 마주할 때마다 다른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무엇인가를 겁내고 있다고 해야 했다. 그것은 단순한 걱정이 아닌 경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직 그의 도전적인 말투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델리나가 그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해주었다.

“혹시 아르크에서 뭔가를 한 것이 아닐까?”

바츠는 그녀의 의문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건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벌써 오랜 시간동안 전진기지를 떠나 있었다. 그들이 자신이 이탈한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몰랐다고 하더라도 일리트시의 시장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충분히 먼저 나서서 그 사실을 아르크에 알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아르크로 이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다. 그로서는 괜한 정의감에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그녀의 두 번째 의문에는 가슴이 철렁해야 했다.

“그런 것 있잖아, 헌터를 시켜서 우리를 위협한다든지 아니면 더 나아가서 우리를 제거하길 원한다든지 말이야.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닐까? 헌터들의 가족도 아르크에 있으니까 말이야.”

바츠는 그녀의 말을 듣자,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괜히 주변에 내린 어둠을 한 번 쓰윽 둘러보게 되었다. 그녀의 우려는 충분히 걱정해야 할 일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버니에투와의 행동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일이었다. 아델리나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그는 아델리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건 틀림없이 미사에서 그녀에게 많은 의지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 눈으로 보거나 들은 것은 별로 없었지만, 둘의 관계가 꽤나 가까웠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물론이고 자신에게도 다시 돌아가라고 강요하는 모습은 추격자들의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스톡홀름 시티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다는 것도 해도 그랬다. 그 사실을 그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것은 부사령관이었다. 어쩌면 그 추격자가 버니에투와 당사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그럼 그가 지난번 아르크를 방문했을 때, 지상으로 향하는 걸음이 늦어진 이유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몇 번이고 경고를 해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사령관은 장로 로리나와의 접촉을 알고 있음에도 손을 놓고 지켜봐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만남으로 본 그는 아르크에 관해서라면 무서울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장로 로리나의 검은 속내를 잠자코 기다려줄 리가 없었다. 분명 버니에투와는 부사령관과 은밀한 접촉을 했을 가능성이 컸다.

“버니가 정말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걸까? 칼맨을 살해하고 도시를 쑥대밭을 만든 것을 보라고. 단순히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니야. 그 자리에 우리가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지난번에 봤잖아, 녀석의 카니지는 벌써 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고. 우리보다 더 강한 것이 틀림없다고.”

바츠는 그녀의 어두운 목소리를 듣고는 그녀의 후드 위에 얼굴을 부벼대며 그녀를 달랬다. 그녀의 불안이 주위를 전염시키고 있었다. 바츠의 가슴도 덩달아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정말 그가 위해를 가할 작정이었다면 처음 사미르를 살해하던 그 날 밤, 왜 그의 목만 잘라갔던 것일까? 기척을 느끼지 못할 만큼 잠이 들었던 바츠와 아델리나를 살해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도 손쉬운 일이었다. 헌터라면 누구나에게 쉬었다. 하지만 그는 그냥 돌아갔다. 꼭 일부로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키려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만 했던 것 같았다. 그럴 이유가 뭐가 있을까? 단순히 겁을 주려는 것이었을까? 그 때문에 괜히 먼 곳까지 헛걸음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곳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는, 오히려 그가 먼저 그곳에 있는 이유를 물어왔었다. 그가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럼 그가 사미르를 살해하는 것만으로 의도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르크로 그리고 전진기지로 다시 돌아가라는 메시지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도시를 떠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너무 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수놓고 있었다.

“바츠...”

아델리나가 고개를 들고 고민으로 힘겨워 하는 바츠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물 위에 띄워진 얼음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바츠는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최대한 밀착시켰다. 할 수 있다면 당장 방독면을 벗어던지고 그녀의 살결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의 숨결을 들이켜고, 지금쯤이면 차갑게 얼어있을 그녀의 부드럽고도 까칠한 피부에, 볼을 대고 문질러 온기를 찾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저 바람에 그쳐야만 했다. 불현 듯 엄습하는 이질적인 추위가 함박눈과 밤이 뿌려놓은 강한 추위를 꿰뚫고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저쪽에서 정신없이 방황하던 패토스도 느꼈을 만큼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었다. 바츠는 아델리나와 함께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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