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198화 *
“무섭다! 패토스, 무섭다!”
패토스가 허겁지겁 바츠와 아델리나 곁으로 달려왔다. 경사진 바위틈이 그가 들어오기에는 생각보다 좁았다. 그는 아델리나 옆으로 자리하기 위해서 몸을 반쯤 구부려 거의 바닥에 눕다시피 해야 했다. 매우 불편해 보이는 자세였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벌벌 떠는 자신의 몸을 아델리나에게 의지했다. 아델리나는 바츠의 품안에서 한쪽 팔만 빼내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의 우는 소리가 한풀 꺾이며 잦아들었다.
그 사이 이질적인 기운은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바람처럼 스치지 않고 분명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제는 빛을 잃고 검게 변한 눈과 같았다. 어스름한 실루엣만 남긴 채, 사근거리는 소리만 내며 쌓여가는 눈. 그렇게 조용히 쌓여가는 눈처럼, 내딛는 발자국 소리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바츠는 그 발자국 소리가 언제든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작게, 어쩌면 완전히 지워질 수도 있을지 모르는 의도된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상대가 일부로 신호처럼 기척을 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델리나가 자신의 카니지로 슬그머니 남은 손을 옮겼다. 바츠에게 안긴 상태에서의 움직임이 불편할 법도 한데, 그녀는 기회만 된다면 바츠를 뿌리치고 앞으로 튀어나갈 수 있는 준비를 했다. 바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를 소중하게 안고 있었지만,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검을 휘두를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럴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범상치 않은 기운의 주인이 끝까지 자신을 감추기 위한 노력을 따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작은 불빛을 만들며 스스로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순간적으로 시야를 앗아갈 정도의 밝기가 아닌, 주변을 밝히는데 무리가 없을 정도의 빛이었다. 바츠는 그 빛의 정체가 아르크의 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밝은 녹색 빛이 만들어내는 사각의 조명이 영락없이 아르크 눈의 화면이었다.
“헌터...”
아델리나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긴장감은 없었지만 경계심이 가득한 음성이었다. 조금 전 나누던 이야기 때문인지 그녀의 신경이 곤두 선 것이 느껴졌다. 바츠는 그녀의 대신 배로 긴장하며 상대를 기다렸다. 머릿속에 혹시 정말 버니에투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만약 그라면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에게 하나하나 연유를 따져 물어야 할까? 그가 다짜고짜 달려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온갖 고민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상대는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며 점점 더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버니에투와가 아니라는 확신이 피어올랐다. 그가 버니에투와였다면 이토록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였을 리가 없었다. 떠날 때 모습을 떠올리면 당장에라도 검을 뽑고 달려들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상대에게서는 목을 죄는 위압감만 풍겨 나올 뿐 적의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결국 바츠와 아델리나 그리고 패토스가 몸을 숨기고 있는 바위 앞에 다가와서 물었다.
“집사가 누구지?”
바츠는 그의 물음에 흠칫 놀라야만 했다. 자신의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흘러나오는 음성이 헌터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 만큼 부드럽고 온화했기 때문이었다. 보여지고 느껴지는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추위로 인해서 발음이 조금 무뎠지만 충분한 미성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델리나보다 키가 좀 더 컸다. 그리고 갑자기 불어 닥친 세찬 바람에, 몸에 두르고 있던 망토가 크게 휘날렸을 때 드러난 몸매는 아델리나보다 더 말라보였다.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그녀가 여자인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볼륨감이 없었다. 가냘퍼 보일 정도로 늘씬한 허리 굴곡이 현재로서는 그녀를 여자로 보이게 만드는 유일한 모습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위압감이 이제는 크게 거부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싸우기보다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르크 눈의 조명에 의해서 비쳐지는 그녀의 검은 슈트는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대신해서 경고하고 있었다. 조명에 어렴풋하게 노출되는 그녀의 슈트가 마치 카니지라도 되는 것처럼 붉은 빛을 띄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왠지 그녀에게서 썩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바츠는 한 차례 호흡을 고르고 나서야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지?”
“당신이 집사야? 당신이 새로운 집사의 코드와 메시지를 전송했잖아.”
그녀가 자신의 아르크 눈을 반대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오브러시의 헌터인가?”
“그래, 내가 아이누르야. 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바츠는 그녀의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아르크에 일어난 일을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듯 했다. 바츠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런 걸 설명해야 하나?”
“아니, 그냥 물은 거야. 그런 건 상관없지. 그나저나 불도 피우지 않고, 참 한심하군. 이 근처는 아르크 근처보다 훨씬 끔찍하다고. 콘솔만으로 견뎌내기 어려울 걸? 좀 더 위로 가면 더욱더 끔찍해질 거야.”
아이누르가 바위틈으로 들어와 바츠 옆으로 와서 앉았다. 바츠를 사이에 두고 아델리나의 반대편 자리였다. 그녀는 품안에서 제법 두터운 책자 두 권과 손에 쥐면 조금 넘치는 양의 헝겊 그리고 작은 통을 꺼내, 눈이 쌓이지 않은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책자와 헝겊을 마구 찢고 뒤섞더니 그 위에 작은 통에 담긴 액체를 뿌렸다.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거세게 부는 바람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얼핏 인화성이 있는 기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이용해서 손쉽게 작은 불을 만들었다.
“한두 시간쯤은 충분할 거야.”
아이누르가 불앞에 양손을 가져다댔다. 그녀의 왼손 새끼손가락과 약지 부위의 장갑이 힘없이 반으로 꺾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이 비어있었다.
“칼리에 녀석들에게 당한 거야. 빌어먹을 자식들. 한두 놈이면 별거 아니지만 녀석들도 여럿이 되면 꽤나 위험하다고. 다른 놈들처럼 잘 달아나지 않거든. 겁을 먹은 것이 보이는데도 악착같이 덤벼들지.”
아이누르가 그때가 떠오르는지 몹시 분한 목소리로 고개를 내둘렀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잘린 손가락보다도 그 앞으로 보이는 불길에 더욱더 관심이 갔다. 정확히는 그 안에 파묻힌 종이뭉치였다. 찢긴 종이 한 장이 아직 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인쇄된 글은 무려 2027년에 쓰인 것으로 보였다. 구석에 작게 표시된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바츠는 그 종이가 마저 타버리기 전에 한 줄의 짧은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州) 독립! 주 방위군이 애플을 지지한 이유...’
바츠는 고작 한 문장을 가지고 뭔가를 예측해보기 어려웠지만, 독립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니 그때에도 뭔가에 대항한 싸움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유와 배경은 모르지만 저항과 반발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그 때문인지 자신이 지핀 불길에 혼자서 손을 녹이고 있던 그녀의 옆모습이 왠지 모르게 결연해 보였다. 방독면 렌즈에 일렁이는 불꽃이 마치 그녀가 두 눈에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꽤 오랫동안 침묵만 지켰다. 처음 그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없었다. 그녀가 그대로 얼어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 됐다. 그녀는 혼자만의 사색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도저히 못 참겠군.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야.”
아이누르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났을 때였다. 그 사이 패토스는 잠들었고, 바츠와 아델리나는 그녀가 만든 침묵 속에서 조용히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별안간 답답함을 토로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을 넘어 한발 앞으로 나갔다. 바츠는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잔뜩 긴장하고 지켜봐야 했다. 그녀는 이곳에 온 뒤로 고백은커녕 딱히 뭔가를 말하지 않았다. 어떤 놀라운 일을 벌일지 무척 불안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그 앞에서 하의를 내리고는 바닥에 네발로 엎드린 것이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꺼내진 자신의 엉덩이를 바츠를 향해 보여주었다.
“뭐하는 거지?”
“왜? 이러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바츠의 물음에 그녀가 돌아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무슨 소리지?”
“네가 이제 집사라며, 그럼 위로해줘야 할 것 아니야. 못 배웠어? 이런 걸 일일이 가르쳐야 하는 거야?”
바츠는 그녀를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레나타가 떠올라서 가슴이 뛰고 속이 답답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굴었다.
“뭔가 착각한 것 같군. 집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 당신들을 위로하는 것은 맞지만, 이런 문제까지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는 소리야. 그건 당신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거지.”
“그럼 저년은 뭐야? 저년은 해주고 난 안 해주겠다는 거야?”
“뭐야!”
아이누르가 짜증 섞인 불만으로 아델리나를 흘기자, 아델리나가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아델리나가 바로 옆에 서서 무섭게 내려다보는데도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무관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담담하게 아델리나의 움직임을 쫓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아델리나가 옆에 서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외면하더니 다시 바츠를 바라보았다. 바츠는 단단히 화난 것 같은 아델리나를 손짓으로 진정시키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 우린 그런 관계가 아니거든. 그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야.”
“그럼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따분하게 만드는 군."
아이누르가 콧방귀를 뀌고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옷을 추슬렀다. 그녀는 조금 전 간절해보이던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은 전혀 아쉬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았다. 그녀가 옷을 추스르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그녀를 노려보는 아델리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델리나는 이제 곧 뿌연 콧김을 뿜어내며 어깨까지 들썩일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그런 아델리나를 끝까지 무시하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며 물었다.
“그런데 집사가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전진기지에나 머물러야 하는 거 아냐? 대체 여기까지 무엇 하러 온 거야?”
바츠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아델리나를 손을 내저어 부르며 답했다.
“스톡홀름 시티로 가려고.”
“왜 닥터라도 만날 셈이야?”
바츠는 아이누르의 날카로운 지적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못마땅한 모습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아델리나를 다시 품에 안아주었다. 아델리나가 달려들 듯 품안으로 뛰어들더니, 허리에 양팔을 둘러주었다. 끌어안는 그녀의 팔에 힘이 굉장히 강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누르가 아까보다도 훨씬 더 비웃음이 묻어나는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꼭 한 번 그를 만나러 가고는 하지. 그는 300년이 넘게 살았으니까 말이야. 그는 정말 많은 걸 알고 있어.”
“만나 보았어?”
“한 번. 하지만 그 뒤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어.”
“왜?”
“그는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미친 것 같거든. 가보면 알 거야.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정상은 거의 없다고. 어머, 내가 지금 정상이라고 했어? 정말 재밌다. 정상이라니 정말 재미있는데?”
아이누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서 뭐가 재미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 즐거운지 혼자서 몸을 움찔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경악스럽다 못해 천박해보이기까지 한 웃음소리였다. 아델리나가 매우 불편한 시선으로 그녀를 또 다시 노려보았다.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가 아델리나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바츠는 그녀가 겨우 진정될 쯤에 물었다.
“왜 웃은 거야?”
“그 자를 만나는 건 쓸데없는 짓이거든.”
아이누르가 방금 전까지 가득 토해내던 웃음기를 한순간에 싹 지워버리고는 무척 차갑고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그녀의 감미로운 미성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소름이 끼쳤을지 모를 만큼 냉정한 목소리였다. 바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지?
“그 사람 말이 진짜인지 어떻게 믿어? 난 그가 300년을 넘게 살았다는 것도 의심스럽다고. 물론 그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니? 그건 무슨 말이지? 그도 우리처럼 특별한 훈련을 받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이누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가 지핀 불길은 어느새 거의 잦아든 상태였다. 바츠는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걱정스럽게 한마디 건넸다.
“좀 더 쉬었다 가는 게 좋을...”
“그럼 안아줄 거야?"
바츠는 말을 자르고 묻는 그녀 덕분에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굳이 말을 자르지 않았더라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들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이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정말 탐탁지 않은 일이었고 내키지도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그럼 됐어. 민스크 시티로 가서 돈을 주고 서비스 받지 뭐. 돈 좀 가진 거 있어?”
바츠는 그녀의 가볍고도 태연한 요구에 애니밀 몇 개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그 중 다섯 개만 챙겨 넣고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고. 오래 기다리지 못할 테니까.”
바츠는 그녀가 말한 의미가 오래 동안 비워둔 전진기지를 걱정하는 것이라는 걸 알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며 기분이 심란해져야 했다. 마치 그녀가 일리트시에서 기다리고 있을 장로 로리나를 대신해서 재촉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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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늦어져서 죄송합니다...제가 집중력이 약해서...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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