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99화 (199/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99화 *

다음날, 바츠는 날이 밝아진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무렵 일찌감치 자리를 떠났다. 밤새 눈은 그쳤고, 내린 눈은 발이 잠길 만큼 쌓였다. 세상의 크고 작은 신음 소리가 쌓인 눈에 꽁꽁 얼어붙어, 주변이 매우 고요했다. 그토록 세차게 불어닥치던 바람도 어딘가에 파묻혔는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온통 정적만이 가득했다. 추위가 한풀 누그러진 것 같았다. 하지만 몸에는 여전히 어젯밤 살인적인 추위가 여운으로 남아있었다. 어찌나 긴장한 몸으로 움츠리고 있었던지, 관절이 모두 뻐근할 정도였다. 내내 한숨도 자지 못하며 쌓인 피로도 힘들게 만들었다. 아이누르가 떠난 다음 몸과 마음이 모두 위축되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콘솔마저도 날이 밝기 전에 배터리가 다해, 유지하지 못하게 되며 그 고통이 더 했다. 밤새도록 아델리나의 품안에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녀가 뒤늦게 상황을 눈치 채고는 거꾸로 안아주었던 것이다. 그녀의 아르크 눈은 낡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리를 떠날 때, 아르크 눈의 전원을 일부로 꺼버렸다. 다른 헌터들에게 위치가 너무 쉽게 노출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누르의 갑작스런 등장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버니에투와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아무런 고민 없이 편안한 것은 오직 패토스 뿐이었다. 그는 그 추위 속에서도 혼자 웅크린 채 잠도 잘 잤고, 다시 깨었을 때에도 변함없이 활기찼다. 그에게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항상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전에 일을 금방 잊고는 했다. 그에게 관심사는 딱 하나였다.

“패토스, 배고프다! 배가 너무 고프다!”

그는 아델리나가 애니밀을 무려 세 개나 부착해주었는데도 굶주림을 느꼈다. 그에게 식욕은 굶주림이 아닌 포만감인 듯 했다. 그의 식욕을 감당하다가는 돌아오는 길에 애니밀이 모두 바닥날 것만 같았다. 쌓인 눈으로 방향감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바츠와 아델리나에게 또 다른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쪽에 도시에서 보았던 빌딩만큼 거대하고 높은 기둥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늘어놔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제법 널따란 도로가 지나며 하늘을 향해 솟구치기 위한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직선으로 쭉 뻗지 않고 곡선으로 회전하듯 이어진 모습을 통해, 그런 용도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해볼 수 있었다. 저 멀리 반대쪽에 유사한 형태의 도로가 더 존재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중간에 깨지고 부서진 모습으로 홀로 선 기둥과 그 위에 올려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바닥의 잔해를 종합해보면, 본래는 양쪽이 한 데 이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밑으로 철로가 가로지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대부분 눈에 파묻혀 거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높은 도로 밑에는 쌓인 눈이 적어 살짝 노출되어 있었다. 궤도를 사용해서 움직였던 차량이 지났을 것으로 보이는 철로였다. 15cm 정도 높이의 철근 두개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는, 끊김없이 나란히 이어지고 있었다. 뭔가를 실어 나르기 위한 용도로 보였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는 작은 집 한 채가 있었는데, 허공을 가르는 정체 모를 도로를 지붕삼고, 그 도로를 지탱하는 기둥을 벽 삼아 제법 안락한 공간에 자리한 모습이었다. 베넬리 부인의 집과 흡사한 형태였다. 잡다한 물건들을 엎고, 쌓고, 세워서 지어진 집이었다. 패토스가 그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패토스, 배고프다! 고기다! 고기 냄새가 난다!”

아델리나가 뒤에서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 집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바츠는 자신을 미안한 눈으로 돌아보는 아델리나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함께 그 뒤를 따라 방향을 바꿨다. 그곳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모닥불 위에 올려 진 고기와 그 앞에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빤히 지켜보고 있는 패토스를 볼 수 있었다. 네 발 짐승의 고기였는데, 거의 다 익었는데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자리에 없었다. 아델리나가 집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역시나 사람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돌아왔다. 그 사이 패토스는 주변을 둘러보는 바츠와 아델리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기괴한 두 눈에는 벌써 기대로 가득했고, 입안에는 침이 한 가득이었다. 그가 허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표정에 역력했다. 하지만 바츠는 물론이고 아델리나도 쉽사리 그가 고기에 손을 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불과 먹을 것 그리고 주변에 계속해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츠 역시도 주위에 귀를 기울이고는 주인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자 머지않아 반대쪽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워낙 고요했던지라 눈을 밟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여과 없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의 대화도 있었다. 모두 두 사람이었다.

바츠는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방독면을 쓰지 않은 한 중년의 남자가 작은 소년의 손을 잡고는 철로를 따라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둘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매우 가까운 친근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마도 둘 사이가 부자지간인 것 같았다. 그들은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  자신들을 바라보는 바츠와 아델리나를 발견하고는 제자리에 우뚝 섰다. 검은 슈트가 전해주는 위화감에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대화는 벌써 중단되었고, 얼굴에는 달아나고 싶지만 미처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마음이 고스란히 그려지고 있었다. 바츠는 그를 부르기 위한 손짓을 하며 말했다.

“당신이 이곳 주인인가?”

그가 그제야 아이와 함께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두 눈이 날을 바짝 세운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자신의 몸을 내던질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다. 바츠 입장에서는 무안할 만큼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는 고기가 얹어진 모닥불 앞까지 눈치를 보며 다가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바츠와 아델리나 그리고 패토스를 차례로 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경계를 해야 하는 것은 바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한쪽 손이 너무도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그가 바츠의 시선을 느끼고는 자신의 손을 등 뒤로 슬그머니 감췄다. 그의 두 눈이 불안감으로 빠르게 물들고 있었다. 바츠는 전에 들은 북쪽으로 가면 더 많은 돌연변이를 볼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며 물었다.

“당신 돌연변이야?”

“아, 아닙니다! 전 정상입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는 바츠가 묻는 돌연변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닌 그냥 물은 것뿐이었는데도, 그는 격렬하게 반응하며 부정했다. 무조건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잔뜩 흥분하면서 목소리를 높일 때, 밖으로 비쳐진 그의 치열(齒列)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송곳니 2개와 어금니 몇 개가 자리에 없어서 보기 흉할 만큼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물었다.

“그럼 그 팔은 뭐지?”

“닥터에게서 시술을 받은 겁니다! 그는 뛰어난 의사거든요! 그의 작품입니다!”

그가 뒤로 감춘 자신의 팔을 서둘러 앞쪽으로 꺼내놓으며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소매가 팔꿈치까지 말려 내려갔고, 그의 독특한 팔이 절반쯤 밖으로 노출됐다. 다시 봐도 놀라운 모습이었다. 그의 왼쪽 팔이 전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기계라고 해야 했다. 그는 한쪽 팔이 전부 기계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장갑을 끼고 옷을 걷지 않으면 절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매우 정교한 기계였다.

“닥터? 스톡홀름 시티를 아나?”

“무, 물론입니다! 그곳을 모르는 야인은 없을 겁니다! 이 개도 그곳에서 사온 겁니다! 절대 훔친 것이 아닙니다! 저와 제 아이도 돌연변이가 아니고요!”

바츠는 그 옆에서 겁에 질린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그의 아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는 이를 물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와 잡은 손을 통해서 용기를 얻고 있는 것 같았다. 바츠는 다시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여기서 스톡홀름 시티까지 얼마나 걸리지?”

“반나절?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바츠는 아델리나를 한 번 돌아본 뒤에 그에게 말했다.

“잘됐군. 그곳까지 우리를 안내해줘.”

“안내...말입니까?”

“그래. 그게 어려운 것은 아니잖아? 사례는 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 전에 이 고기를 조금 나눠줬으면 좋겠고 말이야. 어차피 둘이 먹기에는 양이 많잖아?”

“지금 제게 부, 부탁하시는 겁니까?”

그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래. 몇 번씩 말하게 만들지 말라고. 내가 어려운 말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왜, 왜죠? 왜 입니까? 우리를 해치지 않을 겁니까?”

“정말 짜증나게 만들 거야? 죽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해도 좋아. 하지만 지금 당장 당신과 당신 아이를 해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기 덩치 큰 녀석이 먹을 약간의 고기와 스톡홀름 시티까지 우리를 안내해줄 사람이니까. 싫은 거야?”

“아,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가 바츠의 대답을 듣고는 느닷없이 자리에 몸을 낮추더니, 옆에서 불안 속에서 기다리던 자신의 아이를 끌어안았다. 어찌나 기뻐하던지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을 정도였다. 긴장감이 풀리며 밀려드는 안도감에 감동한 모양이었다. 그의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자신의 아버지를 덩달아 안았다. 정확한 상황을 인지한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의 모습을 통해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았다.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 몹시 부러웠다. 가끔은 상처를 입히고 밀어냈기도 하고, 가끔은 원망을 하기도 하겠지만, 나를 끝까지 기억하고 곁을 지켜주는 가족. 그 존재가 얼마나 든든한지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 사실을 빈자리를 통해서야 알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가혹한 것 같았다. 그렇게 만든 그들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언젠가 눈앞의 저 둘처럼 레벨6 어딘가에 위치한 집 앞에서 케일리를 안아야 했는데, 절대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이 새삼 낯설었다. 이제는 그곳이 꼭 레벨6이 아니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디에서도 충분한 것이었다. 괜히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델리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바츠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작은 손이 매우 단단하게 느껴졌다. 바츠는 그녀를 돌아보며 아직 자신에게 기회가 남았음을 느꼈다. 수줍은 눈빛으로 맞닿은 어깨를 슬쩍 밀쳐오는 그녀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 기분을 아린 가슴에 두르고는, 모닥불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패토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턱이 이제는 입에서 넘쳐난 침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바츠는 그에게 이제는 먹어도 좋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모닥불 위의 고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커다란 손으로 살점을 마구 발라먹는 모습이, 영락없이 헤러티커를 닮아있었다. 고기의 주인들이 기겁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지켜봤을 정도로 난잡했다. 그는 숨도 쉬지 않고, 김이 모락모락 날정도로 뜨거운 고기를 집어삼켰다. 오로지 뭔가를 씹어서 삼킬 수 있다는 것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그가 생각보다 욕심쟁이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고기의 딱 절반만 먹어치우고는 식사를 끝냈다. 충분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부자에 대한 배려 같았다. 스톡홀름 시티로의 안내는 부자가 남은 고기로 배를 채우고 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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