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00화 (200/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200화 *

그는 자신을 GQ라고 소개했다. 그의 어머니가 낡은 종이에 커다랗게 대문자로 쓰여진 것을 보고 따온 이름이었는데,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종이였는데도 질과 색감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걸 보고, 그 종이처럼 오래 살라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옆에 소년의 이름은 코스코트였다. GQ가 6년 전 서쪽 버려진 건물 앞에서 아이를 발견하며 직접 붙여준 이름이라고 말했다. 아이가 버려져 있던 대형 창고 같은 건물의 옥외간판에 붉은 색 철제 조각들이 늘어선 글자를 그대로 따서 붙인 것으로, 원래는 중간쯤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T자를 임의대로 가장 끝에 가져다붙여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만약 그대로 자리에 옮겨 넣으면 코스트코라는 이름이 되는데, 어감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랬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GQ는 둘 사이가 친자관계가 아니라고 시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바츠를 스톡홀름 시티로 안내하는 동안 끊임없이 말을 건넸다. 대부분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고, 이틀 전에는 무슨 일을 했다는 둥의 큰 의미가 없는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는 벌써 바츠와 아델리나가 편안 모양이었다. 가만히 들어주고만 있으니, 한번 시작한 말을 멈출 줄 몰랐다.

“사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헤러티커가 아닙니다. 놈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 군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린 이미 그런 삶에 익숙하죠. 하지만 노상강도들은 다릅니다. 놈들은 집요하죠. 헤러티커보다 더 악랄합니다. 노상강도들은 사람의 흔적을 일부로 찾는 놈들이 아닙니까? 놈들을 피하는 건 헤러티커보다도 더욱 어렵습니다. 몇 년 전에도 놈들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죠. 이 팔도 그때 녀석들 때문에 잃은 겁니다. 놈들이 코스코트를 내주지 않으려는 제 팔을 잘랐죠. 덕분에 치아를 팔아서 이렇게 엄청난 걸 대신 달아야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기계 팔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했다. 팔을 다루는데 꽤 익숙해보였지만, 진짜 팔을 다루던 것만은 못한 눈치였다. 뭔가 만족스러우면서도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금세 다시 밝아졌다. 그런 자신을 슬픈 눈으로 올려다보는 코스코트 때문이었다. 그는 서둘러 근심을 털어내고는 아이를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자신의 기계 팔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코스코트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지켜보는 사람이 어색하다고 느낄 만큼 과장된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아이를 활짝 웃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코스코트는 그가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자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제야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가 흐뭇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헌터들과 인연이 있나 봅니다. 그때 저를 구해준 것도 바로 헌터였거든요. 어디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물었어도 대답해주지 않는 것이 헌터들이잖습니까? 항상 묵묵히 어딘가를 향하고 있죠.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학살자들이죠. 아,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똑똑히 그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그가 놈들을 처리하고는 제게 그들의 새끼손가락과 어금니 그리고 송곳니를 일일이 자르고 뽑아서 건넬 때, 방독면을 벗어 얼굴을 보여주었거든요. 그는 정말 나이가 많아보였습니다. 추위로 창백해진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죠. 하지만 두 눈에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힘이 실려 있었습니다. 놈들을 살해하고 크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매우 강해보였죠. 후드 밖으로 기력이 쇠한 백발이 보였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커(big)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눈에 띄는 건 그의 팔에 아르크 눈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는 헌터 슈트와 망토 그리고 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르크 눈이 없었죠. 그래서 그를 더욱더 정확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제 은인이면서도 매우 특별했으니까요.”

그의 시선이 바츠의 왼쪽 손목으로 향했다. 그때의 기억에 젖어드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빛났다. 마치 그리움에 사무친 사람의 시선이었다. 바츠는 그의 시선을 헛기침으로 떼어내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길게 늘어놓는군. 떠드는 건 당신 마음대로 해도 좋지만, 적당히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거야. 우리가 당신과 함께 가는 건 어디까지나 스톡홀름으로 가기 위해서지, 당신의 고백을 듣기 위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야.”

“죄송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바츠는 풀이 죽은 얼굴로 사과하는 그에게서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긴 시간 지상을 헤매고 돌아온 헌터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애를 쓰지는 않았다. 그를 이야기만 들어주어도 충분한 헌터들처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가 더 이상 떠들지 못하게 막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래야만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 거의 혼자서 살아왔을 것이다. 어렵게 살면서도 아이를 데려다 키운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그리고 아이를 목숨 걸고 지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이와 둘이 되었어도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이를 통해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의지는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나마 누군가에게 기대서 얻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것이었다. 바츠는 그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도시에 머물지 무엇 때문에 저런 곳에서 사는 거지? 가끔 도시를 오가는 것 같은데, 그 편이 훨씬 낫지 않아?”

“사실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닙니다. 도시에 머물면, 보다 더 안전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곳에 머물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지금 머무는 곳에 비해서 훨씬 많은 돈이 필요하죠. 그만한 돈이 제게는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힘든 삶이 될 겁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싫은 건 그로 인해서 느껴야 하는 박탈감입니다. 바로 옆에 사는 사람이 오늘 고기를 먹었는데, 나는 벌써 1년째 고기를 구경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얼마나 슬픕니까? 저 혼자라면 버틸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전 혼자가 아닙니다. 아이가 상처받는다면 전 견디기 어려울 겁니다.”

바츠는 우울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고는, 미안함 가득한 시선으로 코스코트를 안쓰럽게 돌아보는 그의 모습을 보자 절로 한심함이 느껴졌다. 고작 그런 이유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일리트시의 주민들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만일을 걱정하며 무기력한 행동을 하는 것이 영락없었다. 오로지 잔뜩 웅크린 채 행운을 가져다줄 구원자만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는 그때까지 좌절감 속에서 괴로워하며 지내고 말 것이다. 그가 몇 년 전 자신을 도와준 헌터를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인 듯 했다. 그 헌터가 구원자처럼 보였던 것 같았다. 그 헌터의 호의가 그에게는 큰 위로로 다가온 듯 했다. 그에게 그때의 헌터는 단순히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츠는 그가 자신에게도 그때의 행운을 기대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그에 대한 신뢰도가 곤두박질치는 일이었다. 그가 스톡홀름 시티로 제대로 안내를 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못 미더웠다. 그에게 물었다.

“멋대로 하라고. 그런데 스톡홀름은 언제쯤 도착하는 거지? 꽤나 걸은 것 같은데?”

“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곧 하늘이 열리고 수풀이 보이기 시작하면 정말 가까운 것이죠.”

GQ가 금방 표정을 바꾸고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못마땅해진 것도 있었지만, 그의 대답이 미심쩍은 것으로 온통 뒤범벅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열린다거나 수풀이 보인다는 말은 아르크에서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지나친 허풍과 거짓말이었다. 그가 헛소리로 기만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지상에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미 몇 차례나 만난 경험이 있었다. 옆에서 아델리나가 손을 잡아오며 신호를 주지 않았다면, 그를 무섭게 몰아붙였을 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그가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그를 믿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분명 함께 걷는 아이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이에 대해 뭔가 집착이 있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더 감정적으로 편하고는 했다. 근래 사미르의 노예만 해도 그랬다. 그녀는 그 아이들과 함께 하는 내내, 애정 어린 모습으로 매우 가깝게 지내고는 했다. 바츠로서는 피곤해지는 일이었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도 좀 더 참고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인내가 뜻밖의 보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정확히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의심으로 인해서 기대가 낮아진 탓에 매우 크게 다가왔다.

하늘. 아르크에서 하늘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인류의 유산 중 하나였다. 그 중에서도 매우 희귀한 것으로 분류되어 있는 몹시 진귀한 것이었다. 다시는 실제로 볼 수 없는 환상이었다. 바츠는 그것을 철썩 같이 믿었다. 최소한 레벨6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그랬고, 그 뒤로도 크게 변함은 없었다. 레벨6의 하늘은 엄연히 진짜 하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환상이 실제로 지금 막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늘 회색빛 안개로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나눠진 회색 경계 너머로 푸른빛 그러니까 정말 파란색을 띄고 있는 것이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옅고 부드러운 파란색이었다. 레벨6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황홀했다. 마치 처음 비를 맞았던 그날처럼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오를 만큼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저편에는 항상 실루엣만 보여주며 숨어있던 붉고 노란 태양이 자신의 몸을 번뜩이고 있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르크에서 배운 대로 직접 눈으로는 1초도 바라보고 있기 힘들만큼 강력한 빛이었다. 지상을 향해 불을 뿜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바츠는 고개를 들고는 하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점점 뒤로 밀려나는 회색빛 하늘과 점점 앞으로 다가오는 푸른빛 하늘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아델리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붙잡고 있던 바츠의 손을 자신도 모르게 더욱더 세게 쥐며 푸른 하늘에 넋을 놓고 있었다. 레벨6에서 인공하늘을 본 바츠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데, 난생 처음 보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패토스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방금 전까지도 육중한 몸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GQ와 코스코트가 눈치를 보게 만들었지만, 어느새 아델리나 옆으로 다가와 멍한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보면 완전히 빠져든 것이 틀림없었다. 바츠는 옆에서 GQ와 코스코트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민망함을 잊고는 그렇게 한참동안 하늘을 들여다보아야만 했다. 도저히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거짓말처럼 펼쳐지는 푸른 하늘 끝에 지금까지 본 도시 중 가장 투박하고 견고한 모습을 한 도시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GQ가 말했다. 매우 밝고 흥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저곳입니다. 저곳이 바로 스톡홀름 시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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