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201화 *
바츠는 가장 먼저 높이 10미터에 달하는 강철 벽을 볼 수 있었다. 갖은 풍파로 인해서 온통 붉게 녹이 슬어 있는 벽이었다. 위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조금도 반사시키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이, 마치 아르크의 레벨1을 보는 듯 했다.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긁어내면 붉은 가루가 날리며 가슴을 따갑게 만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크고 거대한 모습은 초라함을 느낄 새도 없이 상대를 위축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일부가 아닌 도시 전체가 그 녹이 슨 강철 벽에 빙 둘러 감싸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벽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붉은 녹이 오히려 낡은 벽을 더욱 위협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지켜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모습이었다.
GQ는 바츠를 그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불만스런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들려왔다. 잡음이 섞여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성별을 식별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남자의 음성이었다.
“무슨 일로 왔지?”
바츠는 목소리만 들려오는 그를 찾아보려다 포기하고는 옆에 선 GQ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안심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구석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바츠는 그제야 눈에 띄는, 사각의 은색 상자를 향해 미심쩍은 걸음으로 다가가 말했다.
“닥터를 만나러 왔다.”
“닥터? 이유가 뭐지?”
“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 그것도 일일이 다 설명해야 하나?”
바츠는 계속해서 신경질적으로 물어오는 목소리에 싫증이나, 절로 퉁명스런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그가 한차례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곧이어 바로 옆에서 칼 가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것 같이 크고 날카롭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빅애스가 오랜 침묵을 깨고 개방될 때 내는 소음과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거칠고 요란스러웠다. 천둥소리가 땅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츠는 한발 떨어져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에게로, 조심스런 뒷걸음질을 통해 돌아갔다. 그러자 결코 미동조차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붉은 강철 벽 일부가 미닫이문처럼 통째로 안쪽을 향해 밀려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고작해야 2미터 남짓 움직인 것이었지만 그 육중한 구조가 천천히 이동하는 모습은 눈길을 떼지 못할 만큼 충분히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그 너머로 드러나는 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이 나중에야 눈에 들어왔을 정도였다. 특별히 관리한 것 같지는 않지만 잘 다듬어진 것을 보면, 보이는 것과 다르게 외부로부터 도시로의 출입이 활발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방금 본 것과 같은 높이의 또 다른 벽이 있었는데, 역시나 마찬가지로 녹에 뒤덮인 강철이었다. 다만 그 아래에 길과 같은 폭의 문이 존재한다는 것만 달랐다.
“뭐해? 닥터를 만나러 왔다며?”
그때였다. 길 중간쯤에 옆으로 난 샛길을 통해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거의 2미터에 육박하는 사내였는데, 어깨에 둘러메고 있는 소총이 작게 느껴질 만큼 덩치가 큰 사내였다. 패토스나 버니에투와보다 키는 조금 작았으나 덩치만큼은 훨씬 비대했다. 어깨가 두 개씩 붙어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단순히 살집이 많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얼굴만 두고 보면 오히려 왜소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큰 체격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양팔과 양다리가 모두 기계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GQ보다도 훨씬 크고 강해보이는 기계 관절을 가지고 있었다. GQ의 기계 팔이 평범해 보일 지경이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게이트를 열어달라고 한 건 그쪽 아니었어?”
그가 인상을 구기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조금 전 라디오를 통해 들려왔던 목소리와 닮은 말투였다. 그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던 것 같았다. 바츠는 그의 생김새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불손한 태도가 정말로 참기 어려울 만큼 거슬렸다. 그 권위적이면서도 방자한 행동은 상대를 업신여기다 못해 경멸에 가까운 태도로 대하고 있었다. 애써 참아내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 할 정도 매우 불쾌한 언행이었다. 하지만 그는 태도를 조금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삐딱하게 서서는 짜증스럽게, 어서 오라는 손짓을 반복할 뿐이었다. 눈앞의 상대가 헌터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지나치게 무례한 사내였다.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몹시 궁금할 지경이었다. 바츠는 그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지켜보며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럼 저희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희는 이곳에 볼일이 없거든요.”
바츠가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뒤에서 GQ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뒤따라오지 않고, 아이와 함께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신이 할 일을 다 한 것에 대해 만족스런 얼굴이었다. 목소리에 뿌듯함이 묻어났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로 돌아가 애니밀 몇 개를 건네며 고맙다는 말을 함께 전했다. 비록 그의 생각들은 탐탁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를 잠시나마 의심했었던 사실에 미안함을 느꼈다. 그는 약속을 충실히 이해했고,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대가가 부담스러운지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다시 찾아온 행운에 감격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울먹이듯 말했다.
“감사합니다. 헌터들은 항상 이렇게 친절한 것 같습니다. 여러 의미로 말이죠. 정말 감사합니다.”
바츠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용기를 가지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콧방귀를 뀌는 것으로 대신하며 대꾸했다.
“또 쓸데없는 소리가 길어지는 군. 헌터들이 딱 싫어하는 행동이라고. 주의하는 게 좋아.”
“죄송합니다...”
바츠의 핀잔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옆에서 코스코트가 위로하기 위해서 바지를 붙잡고 흔들어, 관심을 끌며 격려하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쏟았을지 모를 만큼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그는 코스코트 덕분에 눈물을 흘리는 추한 모습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겨우겨우 이전 표정을 되찾아갔다.
그 사이 바츠는 몸을 돌려세워 저쪽에서 그 퉁명스런 사내와 함께 기다리고 있는 아델리나와 패토스에게로 향했다. 뒤로 그 사내가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내젖고, 발로 괜히 바닥을 가볍게 몇 차례 걷어차며 짜증 섞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정말 몇 번을 돌아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내였다. 하지만 그 감정을 굳이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떨떠름한 시선으로 그를 한 차례 노려보기는 했지만, 그가 약간의 관심도 주지 않고 곧장 외면해버렸기 때문에 기회조차 없었다. 바츠는 그가 정말 싫었다. 문 앞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설교하듯 늘어놓은 잔소리에는 분노를 느꼈을 정도였다.
“헌터가 오는 건 흔한 일이지. 그러니 환대를 바라지는 말라고. 오히려 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불청객일 때가 더 많으니까 말이야. 어차피 네 놈들이 여기 오는 이유는 딱 두 가지잖아? 닥터를 만나 이곳의 기술을 훔치거나 그에게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지. 안 그래? 네 놈들은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하군. 우리가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 괜한 짓은 안 하는 게 좋아.”
그를 따라 문 앞에 도착하자, 그 양옆으로 난 계단에서 두 사람이 내려왔다. 벽을 따라 위쪽으로 향할 수 있는 철제 계단이었는데, 저 위쪽 어딘가에 이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위에서 아래를 살필 수 있는 초소나 망루 따위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관심이 가는 것은 계단을 따라 내려온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퉁명스러운 사내와 다르게 보통의 평범한 사람에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체 그 어디에서도 기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익히 알고 있는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제야 기계로 이루어진 신체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신체를 가지게 되었는지 묻고 싶은 마음으로 간절했다. 하지만 그들을 따라 막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 궁금증은 바로 잊혀지고 말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놀란 까닭이었다.
도시는 중앙에 넒은 광장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강철 벽을 따라 쭉 늘어서 있었다. 모두 3층 높이의 건물들이었는데, 지금까지 밖에서 보았던 건물들과 다르게 모두가 별개로 지어졌음에도 하나로 전부 이어져 있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설계를 그렇게 한 것인지 나중에 필요에 의해서 보완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서 현재의 길고 거대한 하나의 건축물이 탄생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그 건물에 둘러싸인 채, 중앙 광장에 잔뜩 모여 있었다. 어림잡아도 2, 3백 명은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었다. 각자 개성 넘치는 차림새를 하고는 광장 여기저기에 가판대처럼 늘어선 상점들을 둘러보며 즐기고 있었다. 프레이의 가죽으로 보이는 옷부터, 아르크의 유니폼을 닮은 재질의 옷 그리고 그 종류를 일일이 따질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섬유의 옷가지들까지 모두가 각자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같은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개중에 눈에 띄는 것은 퉁명스러운 사내처럼 기계로 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는 아무런 이질감 없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건물 내부에도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 거의 아르크와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상대적으로 좁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 번잡함은 숨이 막힐 정도로 상당했다. 민스크 시티의 번화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한발을 앞으로 내딛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전부 중앙 광장 쪽에만 밀집해 있다는 것이었다. 건물 바로 앞 그러니까 광장의 가장자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깨끗이 비어져 있었다. 바츠는 그 길을 따라서 안쪽 건물로 안내되었다.
바츠가 안내된 곳은 입구에서 맞은편 끝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그 입구에는 오른팔이 기계인 젊은 남자가 서 있었고, 바츠를 안내하던 퉁명스런 사내는 그와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바츠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여전히 쌀쌀맞은 태도였지만 친근감이 엿보이는 말투였다. 그리고 그를 지나 안으로 들어왔고, 바로 보이는 중앙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복도를 따라 구석에 위치한 방에 도착했는데, 퉁명스런 사내는 다른 두 사람과 바츠 일행을 복도에 남겨두고 혼자서 안으로 들어갔다.
바츠는 불친절한 그의 태도에 이미 인내심이 바닥이었지만,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때를 기다렸다. 그러자 안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방금 들어간 그의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적당한 무게가 있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닥터, 닥터! 손님이에요.”
“손님? 자네가 직접 온 걸 보니 또 헌터인가?”
“하루 이틀입니까? 어떻게 합니까? 혹시 모르는 데, 한쪽 발목부터 잘라놓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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