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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202화 (202/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202화 *

바츠는 그의 주제넘은 태도를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오만함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당장 카니지를 뽑아,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베고 그도 베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며 애써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아델리나의 모습을 보자, 더욱더 냉정해질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불쾌감이 한계에 달했는지, 몹시 화가 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방독면 렌즈 밖으로 비쳐지는 그녀의 눈빛이 심각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무슨 일을 저지르기 전에 진정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를 진정시킨 것은 바츠가 아니었다. 그녀는 안에서 들려오는, 그 무게감이 있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의해서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럴 필요 없네. 내 손님이지 않나? 자네는 말을 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네. 무탈하게 들여보낼 수 있도록 하게. 그들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말라는 말이네.”

그의 목소리에 내내 퉁명스러웠던 사내가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쉬우면서도 탐탁지 못한 감정이 묻어나는 소리였다. 그는 온통 불만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다시 밖으로 나와 안으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주기 위해 고개를 까닥이는 모습까지도 언짢은 기색에 젖어있었다.

“어서 오게.”

안으로 들어서자 안쪽 책상 앞에 앉아있는 한 사내가 반가운 목소리로 맞아주었다. 그는 햇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가 앞에 앉아있었는데, 책상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뭔가를 열심히 옮겨 적느라 바빠 보였다. 작은 펜과 하얀 종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르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벽을 따라 늘어선 책장이 수천 권에 이르는 책으로 가득한 것도 흥미로웠다. 빈틈없을 만큼 빼곡하게 꽂혀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많은 햇살 때문인지, 책들이 하나하나 모두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여전히 자신의 일에 몰두한 채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말게. 자네 같은 필멸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내게 시간은 그저 지루하고 따분할 뿐이니 말이야. 여기에 있는 책은 그 숫자만큼 반복해서 읽고 또 읽은 것들이지. 세 번째 책장 4번째 칸에 7번째로 꽂혀 있는 책의 제목이 염소의 축제이고 689페이지의 내용이 늙은 사내가 작은 소녀를 괴롭히는 것이라는 걸 맞춘다면 믿겠나? 그러니 너무 놀라지 말고 가까이 오게. 자네가 진짜 놀라야 하는 건 따로 있지 않나?”

바츠는 조심스런 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가며, 그가 언급한 진짜 놀라운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 본 생김새 중 가장 특별했고, 그 정체성이 의심될 정도로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머리 그러니까 정확히는 안면을 제외한 모든 부위가 기계로 되어있는 사람이었고, 책상 앞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사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지금 바츠를 반갑게 맞아주는 그가 기계 그 자체였던 것이다. 바츠가 책상 앞에 다가서자 그가 하던 일을 멈추고는 그제야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반가운 미소가 걸렸다.

“왜? 가까이 오는 것이 두려웠나? 걱정 말게. 자네만 그런 것이 아니네. 나를 본 모두가 나를 경계하지. 그러니 안심하게. 내 앞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야. 적어도 최근 100여년 정도는 그랬네.”

바츠는 활짝 웃는 그의 미소가 너무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모발대신 덮어쓴 반월모양의 금속 두피와 GQ의 것처럼 평범한 신체의 비율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기계 관절들. 그는 온몸이 기계로 되어있었지만 보통의 사람과 영락없이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더욱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도 전부 이상하게 보였다. 차라리 이곳까지 안내해준 퉁명스러운 사내처럼 좀 더 크고 거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최소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겉옷을 조금 두껍게 입고, 장갑을 끼고 후드를 쓴다면 그 누구도 사람이 아니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사람과 매우 유사한 비율을 가지고 있었다.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기계로 된 신체였다. 그가 한차례 기분 좋게 콧김을 뿜고는 물었다.

“그래, 어디서 왔나?”

“당신이 닥터인가?”

바츠는 그의 물음을 되묻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자 그가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네. 내가 닥터네.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부르더군. 그래서 자네는 어디서 왔나?”

“아르크.”

바츠가 짧게 대답하자, 뒤에서 기다리던 그 퉁명스럽던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헌터들은 하나같이 멍청하군! 그러니까 어느 아르크! 아르크가 한두 군데야?”

바츠는 고개를 돌려 그런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의 변함없는 거만한 태도와 한쪽 입술을 기분 나쁘게 이죽거리는 행동뿐이었다. 정말 얄미운 모습이었다.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참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만나본 야인들처럼 호되게 혼이 나고도 지금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닥터의 목소리가 말려 세우는 덕분에 그러지 못했다.

“미안하네.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게르하르트는 신경 쓰지 말고 나와 대화하게. 나를 만나러 온 것 아닌가? 내 진짜 이름은 완더 엔젤이네. 편하게 완더 혹은 엔젤이라고 불러도 좋네. 닥터라고 불러도 상관은 않겠네. 편한 대로 하게.”

바츠는 그때까지도 계속해서 빈정거리는 표정으로 도발하는 그에게서 쉽게 눈을 떼기 어려웠지만, 애써 마음을 짓누르며 겨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닥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둘 사이에 놓인 책상을 가로질러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전부 세심하게 움직일 정도로 정교한 기계 손이었다. 바츠는 그 손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난 바츠. 빈니차에 있는 아르크에서 왔다.”

“아, U13! 좋은 아르크에서 왔군. 다른 곳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굶주림은 덜 했겠어. 거긴 다른 아르크에 비해서 먹을 것이 풍족한 편이지. 질적으로도 우수하고 말이야. 안 그런가?”

바츠는 그가 동의를 구하는 물음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차갑고 투박하게 느껴지는 그의 손을 버리듯 내던지며 자신의 손을 거뒀다. 방금 전 게르하르트라고 불린 사내로 인해 기분이 매우 불쾌했기 때문이었다. 엉뚱하게 닥터에게로 그 분풀이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금방 다시 웃어주며 이해하는 모습이었다. 그에 눈에는 모든 것이 즐거운 듯 했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럼 이제 말해보게. 나를 만나러 온 이유 말이네. 무엇이 궁금해서 여기까지 나를 찾아왔지?”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하더군. 그런데 내가 온 이유는 모르는 모양이지?”

바츠의 비아냥거리는 대꾸에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심기가 불편해서 정색을 한 것이 아닌, 전혀 뜻밖의 상황에 기분 좋게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그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얼마나 유쾌한 지, 마치 사람처럼 자신의 배를 움켜쥐고는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그런 상태로 용케 제대로 말을 건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마음에 드는 군! 정말 재밌어! 지금까지 헌터들과 달라! 꼭 ‘지야라’를 하는 헌터를 보는 듯 하군! 그 ‘하지(al-Ḥājjī)’라고 불리는 고집불통들 말이네! 보통의 헌터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거든! 자신들이 궁금한 것만 딱 묻고는 돌아서 버리고는 하지!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그것만큼 효율적이고 무서운 것도 없지. 그래...정말 재밌어. 자네 왠지 마음에 드는 군.”

그가 오래 웃지는 않았다. 말을 이어가며 천천히 웃음을 조절하더니, 다시 금방 평소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그 모습이 생김새 때문인지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보였다. 자지러지던 웃음을 얼굴에서 완전히 비워내고 침착하게 말을 잇는 것이 단계별로 이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과 입가에 약간의 여운만 남겼을 뿐이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어쩌면 난 모든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 같은 사람들 기준에서 말이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이렇게 생겼어도 사람이네. 아직은 말이지. 어쨌든 자네가 온 이유는 물론 이미 알고 있네. U13에서 왔다면 뻔하지. 아르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가 듣고 싶은 것이겠지? 많은 수의 헌터들에게 이 자리에서 설명해 왔네. 내게는 너무도 쉬운 일이지...”

바츠는 그가 말끝을 흐리며 지친 사람처럼 자리에 쓰러지듯 거칠게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눈에도 굉장히 무거워 보이는 그의 무게를 의자가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괜한 우려였다. 그가 앉은 의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비명소리 대신, 묵직한 쇳덩어리가 서로 거칠게 부딪히는 소리만 내고는 그를 아무런 무리 없이 떠받쳤다. 그가 무너지는 의자로 인해 호들갑 떨며 엉덩방아를 찧게 되는 모습은 결코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그런 바츠를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전에 남아있던 기분 좋은 여운은 사라지고, 비열해 보이는 미소가 입가에 걸리고 있었다.

“그전에 우리 재미난 이야기 하나 해볼까? 자네 반응이 궁금하군.”

그가 옆에 선 아델리나를 음흉한 시선으로 한 차례 다녀오고는 말을 이었다.

“사람은 네 가지 장난감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걸 알고 있나? 그건 정말 운이 나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네. 우린 그걸 어릴 때부터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를 배우지. 아르크에서는 상당히 금기로 되어 있을 테지만 말이네. 아마도 20살이 되어서야 그 장난감들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것이네.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는 합법적인 자격도 그때 비로소 주어지지. 그렇지 않으면 아르크는 매년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추방당해야 하는 사람들로 넘쳐 날 테니 말이야.”

바츠는 그의 기분 나쁜 눈초리를 경계하며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지금 자네 몇 살이지?”

“19살.”

바츠는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지만, 일부로 나이를 한 살 많게 속여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반가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오, 한창 좋을 때군. 하지만 아직 그 금기를 알 나이는 아니군. 아르크에 있었다면 말이야. 하지만 밖으로 나왔으니 이미 수도 없이 그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았을 거야. 그 장난감은 결코 한 번 가지고 노는 것으로 그칠 수 없는 거지. 그게 얼마나 즐겁고 좋은 것인지는 가지고 놀아본 사람들만 아네. 특히 서로 다른 장난감이 만나면 그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지, 안 그런가?”

그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아델리나를 향해 다녀왔다. 그녀를 다녀오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불쾌했다. 바츠는 아델리나를 돌아보며 그녀를 눈빛으로 위로를 하고는 대신해서 불만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를 향한 엄중한 경고였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거나 멍청하지 않으니까.”

“그런가? 난 그저 책 이야기를 했을 뿐이네. 내가 조금 전에 이야기한 그 염소의 축제라는 책 말이네. 어떻게 생각하나? 그 책에는 늙은 염소와 어린 여자가 나오네. 그리고 그 늙은 염소는 그 어린 여자를 탐내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는 이제 소변조차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힘이 없는 늙은이네. 가장 소중한 장난감이 고장 나 버린 상태지. 자네는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재앙 같은 일이네. 그는 자신의 속옷을 하루에도 여러 번 적시고는 해야 하는 불쌍한 늙은이였거든. 그가 소녀보다 나은 건 오직 커다란 덩치와 못된 무력뿐이지. 그는 그것으로 소녀를 억압하고 쾌락을 강요하네. 하지만 소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네. 그저 두려움에 짓눌려 있지. 물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네. 그가 요구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해주네. 그가 언제든지 자신의 목을 부러뜨리고 부모와 형제자매의 목도 부러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건 틀림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기도 하네. 그의 장난감은 그녀가 가진 그 어떤 장난감으로도 쾌락을 줄 수 없을 만큼 고장이 나있었거든. 그건 정말 불쌍한 일이네. 매우 모욕적인 일이지. 그는 분명 그녀를 복종시켰지만 그녀에게서 얻은 것은 경외가 아닌 동정심이었네. 이전에 가지고 있던 두려움마저도 전부 바꿔놓은 동정심. 그가 그렇게 될 것을 몰랐을 것 같나?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네. 보다 더 현명해지는 것이지.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네. 그런데도 그는 그 치욕을 스스로 자처했네. 왜인 것 같나? 그가 왜 자기 스스로를 불쌍하게 만든 것 같나?”

바츠는 뜬금없이 이어지는 그의 질문에 혼란을 느꼈다. 방금 전 보여주었던 그 기분 나쁜 시선들 때문인지 조롱당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대답하기 어렵나? 아니면 대답을 하기 싫은 건가? 하긴 쉬운 문제는 아니네. 지금 지상에서는 사람을 돈 주고 사고파는 일이 너무도 흔하니까 말이야. 심지어 서로를 잡아먹기까지 하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해졌으니 답을 내리기 어려울 만도 하네. 그렇다고 자책하거나 실망하지는 말게. 자네가 답을 얻기 힘든 것은 그저 세상이 변했기 때문은 아니니까. 난 단지 자네가 영리한 것 같아서 의견을 듣고 싶었을 뿐이네. 답을 찾기 어렵다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좋네. 어차피 지금 이곳이 아니더라도 답은 얼마든지 찾게 될 테니 말이야. 그리고 그 답은 항상 옳거나 같지 않을 것이네.”

바츠는 여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혼자서 묻고 결론을 내리는 모습을 보며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복잡하고 어지러운 말들을 꺼냈느냐고 따져 묻고 싶은 생각에 발끈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것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점점 더 원하는 것을 얻는데 방해만 될 것 같아 생각을 접고는 그를 향해 강요하듯 묻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럼 이제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어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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