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203화 *
“오, 그래. 그렇게 하세. 양보한 만큼 요구 하겠다? 헌터가 맞긴 맞나보군. 계산이 똑 부러지는 군! 좋아, 어떤 이야기부터 듣고 싶나? 자네가 한 번 직접 고르게.”
바츠의 강압적인 말투는 그를 자칫 불쾌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는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너그럽게 웃는 얼굴로 기다렸다. 아예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을 정도였다. 현재의 상황에 제법 흥미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바츠는 괜한 근심 없이 서두르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인지부터 듣고 싶군. 어째서 당신이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는지 말이야. 왜 당신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거지? 당신은 정말 100년이 넘게 살아온 것인가? 나를 필멸자라고 지칭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가?”
“역시 남다르군. 다른 헌터들과 다른 호기심이 있어. 의심은 언제나 사람을 보다 더 발전시키는 기폭제가 되지. 그게 엉뚱하거나 과하지 않게 올바른 방향을 가지고 있을 때 말이네. 아직까지 자네는 잘 하고 있는 것 같군.”
“그게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닐 텐데?”
바츠의 차가운 말투에 그가 또 한 번 호탕하게 웃고 나서 대답했다.
“자네가 진심으로 좋아질 것 같군. 그러니 서두르지 말게. 자네에게 다 대답을 해주겠네. 내 이름은 이미 말한 대로네. 완더 엔젤이지. 이곳의 주인이네. 그리고 문명이 사라지기 전에는 생명공학을 하던 수많은 박사 중 하나였지. 생명공학과 박사가 무엇인지 아나?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그 삶의 질을 윤택하게 만드는 기술을 연구 발전시키는 기술과 사람을 말하네. DNA를 조작하고 백신을 만드는 그런 일들 말이네. 난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네.”
“그 말은 당신이 아르크로 사람들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살았던 사람이라는 뜻인가? 정말로 1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냐고 묻는 거야. 어쩌면 아르크가 지어지기 전부터 살아온 것인가? 마치 사령관처럼?”
그가 기분 좋은 미소를 입에 걸고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진정하게. 질문을 하다가 숨이 넘어가겠군.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네. 난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르크로 이주하기 전부터 살았던 사람은 맞지만, 아르크가 지어지기 이전부터 살았던 것은 아니네. 그 계획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것이니까 말이네. 물론 자네 아르크의 사령관을 예로 든 것도 틀리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아르크의 사령관은 단 한 번도 자네가 아는 상식 이상의 삶을 산 적이 없으니까 말이네.”
바츠는 그가 대답을 마치자마자, 또 다시 의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도 그에게 많은 의문을 한꺼번에 꺼내놓아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 조급함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애써 한차례 숨을 골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게 당신이 수백 년을 살아온 것이 맞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이네. 난 자네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살았네. 의외로 짓궂은 구석이 있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나? 내가 시간은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말하고, 여기에 있는 책을 그 숫자만큼 반복해서 읽었다고 말했을 때 말이네. 그때 벌써 눈치를 채놓고 이렇게 확인을 하다니. 조심성이 많은 것인가 아니면 의심이 과한 것인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토록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이 인상적이군. 그게 자네에게는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었나? 나를 믿지 못하는 게로군.”
바츠는 그가 은근슬쩍 비꼬는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자신이 묻고 싶은 말이나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당신은 그럼 그때 어떻게 살아남았지? 크루엘라가 세상을 물들일 때 어떻게 살아남았느냐고 묻는 거야. 그건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어.”
그가 바츠의 물음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옅은 미소가 그려진 얼굴이었지만 그 분위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마치 마음에 쏙 들만큼 아끼는 물건을 두고 외출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바츠는 기억 어딘가에 언젠가 한 번 본적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그 분위기를 가까스로 떨쳐내며 말했다.
“아직도 확신이 더 필요한가? 자네가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언제쯤 인정하게 될지 궁금하군. 이미 나를 믿고 있지 않나? 그러니 이렇게 나와 대화를 하는 것이고 말이네. 뭐, 어쨌든 좋네. 그 요구에 응해주도록 하지. 자네가 다른 헌터들과 다르게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네. 방금 자네의 물음에 난 이렇게 대답하겠네. 물론이다, 그건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이네. 그 빠른 감염력은 전염이 확산되는 걸 막을 방법이 없도록 만들었지. 미처 손을 쓸 겨를이 없었네. 하지만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지.”
“면역력 자들.”
“그러네. 비록 10억 명도 되지 않는, 많지 않은 수였지만 그들은 살아남았네. 많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다 우습군.”
바츠는 그가 다음에 어떤 말을 하게 될지 예측해보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조금만 노력해도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였고, 이미 부사령관을 통해서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그의 말에는 강한 의문을 가져야만 했다.
“잠깐! 무슨 말을 하는 거지? 10억 명이라니? 면역력 자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소리인가?”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네. 물론 모두 면역력 자들이 아니더라도 충분한 기회가 있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네.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다면 그 피해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 분명하네. 애초에 아르크로의 이주가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크루엘라는 무서운 감염력만큼 매우 치명적인 치사율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네. 그건 크루엘라의 강점이자 약점이기도 했지. 그 맹렬한 감염력이 오히려 강력한 치사율 때문에 그 빛을 보지 못했으니 말이네.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가? 바이러스가 퍼져나가기 위해서는 꼭 매개가 되는 숙주가 필요한데, 크루엘라는 사람은 물론이고 동식물에까지도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도 강력해, 전이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숙주가 죽어버린다는 것이네. 즉, 국한적인 재앙은 불러올 수는 있어도 전 세계를 파멸로 이끌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는 말이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거지? 어째서 인류가 이토록 멸망하게 된 거지?”
바츠는 전혀 뜻밖의 사실에 혼란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를 향해 묻는 목소리가 스스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그가 어떤 대답을 내놓게 될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방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바츠를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바츠는 그 웃음에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말했다.
“거기까지네. 자네 차례는 끝났네. 감정이 요동치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군. 헌터답지 않는 모습이네. 방독면을 벗고 내게 얼굴을 보여주었다면 난 정말 기뻤을 것이네. 하지만 이제 내 차례네. 자네가 내게 양보한 만큼 나도 그만큼만 양보하겠네. 그리고 그건 여기까지네.”
바츠는 그제야 그의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겨우 짓눌렀던 흥분이 폭발하듯 터졌다.
“대답해! 어떻게 된 거냐고! 그리고 당신도 면역력 자들 중 하나였던 거야? 당신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야! 사람들이 훨씬 많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니 대체 무슨 말이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거야? 그게 아르크 최초의 거주자들과 관계가 있는 것이냐고!”
“아니, 난 면역력이 없었네. 정확히는 감염될 일이 없었다고 해야 하겠군. 내 대답은 여기까지네. 이제는 자네가 듣고 대답할 차례야. 그러니 진정하게. 우리에게는 시간이 충분하니까 말이야. 내게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시간이지만, 자네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장담하겠네. 자네의 반응을 보고 있으니 너무 즐겁군. 이만큼 궁금해 한 헌터도 몇 없었지만, 이렇게 반응한 헌터도 없었지. 남은 대답은 자네 차례가 되면 해주겠네. 반드시 해줄 것이라고 약속하지.”
“멋대로 판단하지 마! 당신에게 시간이 얼마나 하찮은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아니야! 난 이미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어! 그러니 어서 대답해!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당신은 그럼 어떻게 감염을 피할 수 있었지? 당신은 당신이 말한 감염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기계의 몸을 얻었기 때문에 감염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인가? 당장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바츠는 책상을 양손으로 내리치며 그를 향해 무섭게 소리쳤다. 그에게 겁을 줘 어쩔 수 없이 대답하게 만들 속셈이었다. 카니지로 손목을 자를 것이라는 진심을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 가장 태연한 모습으로, 입을 닫은 채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한가롭게 보일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바츠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껴야 했다. 입구에서부터 받아온 자극이 모조리 꺼내지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 읊조렸다.
“이보게, 헌터. 지금까지 잘했지 않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 말을 듣게. 고작 반나절이면 충분하네. 반나절만 내게 할애한다면 자네는 듣고 싶은 것들을 모두 들을 수 있네. 왜 그렇게 서두르는 가?”
“닥쳐! 난 이곳에 당신과 게임을 하러 온 것이 아니야! 난 진실을 알기 위해 온 것이야! 당신의 한마디가 나를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게 만들 것이란 말이야! 그건 크루엘라 이상의 재앙이 될 것이라고! 그러니 어서 대답해! 그리고 날 헌터라고 부르지 마! 난 헌터가 아니야! 일리트시의 집사라고!”
바츠가 울분을 토하듯 소리치자, 그의 표정이 잠을 자다가 갑자기 일어난 사람처럼 번뜩였다.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리는 얼굴이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아...드디어 때가 된 건가? 정말 흥미롭군. 그래서 어린 나이에 벌써 여길 오게 된 것이군. 그래서 이토록 다급해하는 것이었어. 그렇지? 지난 수백 년 동안 나를 이렇게 흥분시킨 적이 없네. 내게 다시 심장이 생겨난 것 같은 기분이군. 이렇게 흥미진진한 적이 대체 얼마만 인지 모르겠단 말이네! 자네가 일리트시의 집사라고? 그녀가 드디어 의지가 굳어진 모양이군. 그래서 자네를 보낸 것이야. 로리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나? 그녀만큼 아주 강한 여자지.”
바츠는 그의 상기된 표정을 보자, 가슴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절로 마음이 차분해지며 경악된 목소리도 수직으로 곤두박질치듯 누그러졌다. 그의 달라진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뭔가가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이야. 그녀는 항상 하얀 스카프를 가지고 다니지. 그녀에게 과분해보이기는 하지만 잘 어울리는 물건이기도 하지.”
“아니, 그 로리나 말고...오, 자네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정말 재미있군, 이거 정말 재미있어. 그래, 어느 정도 일이 진척되었는지 알 것 같네. 그녀가 조급해하지는 않던가? 부사령관도 상당히 신경 쓰고 있겠군.”
바츠의 대답을 들은 그가 가볍게 고개를 내젓다가 갑자기 혼자서 어깨를 들썩이고는, 비장함이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꽤 심각해 보이는 말투였다. 바츠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부사령관은 바보가 아니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바보는 아무도 없지. 집사가 이곳까지 왔다? 그것도 일선에서 물러나 ‘하지’가 된 것도 아닌 집사가? 자네가 이곳까지 무사히 온 것은 분명 운이 좋았거나 무척 강하기 때문이겠군. 자네를 쫓는 헌터를 만나지 못했나? 적어도 서넛은 자네를 쫓고 있을 텐데?”
바츠는 그의 물음에 불현 듯 버니에투와가 떠올랐지만 애써 생각을 떨쳐냈다.
“아직.”
“그래? 그럼 정말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네. 자네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지만, 운이 도운 것이라면 언제든지 죽은 목숨으로 변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까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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