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204화 *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굴더니, 당신을 더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군. 집사와 헌터의 관계를 모르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바츠는 그가 무겁게 건넨 말을 콧방귀로 응수했다. 잠깐이었지만 자신이 가슴을 졸였다는 사실에 허탈했다. 그가 가소로웠다. 하지만 그는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물론 잘 알지. 헌터들은 집사에게 지독할 만큼 충실하지 않나. 그들의 치부를 낱낱이 알고 있는 것이 집사니까 말이네. 모든 욕구까지도 해소시켜주지. 그게 정말 추악한 것일지라도 말이네. 그런 대상을 어찌 믿고 따르지 않을 수가 있나?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아주 오래 전 종교가 성행할 때 신이라 불리는 자들이 칭송되어진 이유도 같은 이유네. 집사들은 스스로가 전진기지에서 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지? 정말 멋진 일이네. 어쩌면 그 전에 사람들이 실제로 믿고 따르던 진짜 신들보다도 더 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언제나 그랬네. 아무리 위대한 신이라도 누군가의 미움을 받고는 했네.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지 않는 자들이 하나쯤은 있었단 말이네. 신이 가진 그 경외로부터 자유로운 자들이지. 그건 단순히 신에 대한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네. 그들이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어쩌면 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테지. 헌터들 중에도 그런 특별한 자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할 것이네. 바로 자네처럼 말이지.”
바츠는 그가 진중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묘하게 도발하는 듯한 모욕으로 들려왔다. 변함없이 이어지는 그의 태연한 모습이 괘씸했던 것일까? 아니면 인간과 흡사한 그의 기계 몸 때문에 은연 중 거리감을 느끼고 있던 불만이 이제야 스멀스멀 기어 나온 것일까? 어쩌면 그의 너무도 정확한 통찰력 때문일 수도 있었다. 바츠는 그의 몇 마디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그는 집사는 물론이고 자신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집사와 헌터라는 이름 뒤에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름이 숨죽이고 있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 했다. 당장 그의 입에서 그 허울에 대한 조롱이 들려와도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았다. 빤히 바라보는 그의 아무런 경계 없이 오로지 하나로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매우 불쾌했다. 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쉽게 받아드릴 수 없었다. 그에게서 심각한 거부감을 느껴야 했다. 그를 향한 목소리도 싸늘하게 변했다.
“쓸데없는 소리가 길어지고 있군. 내가 당신에게 듣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닐 텐데? 혹시라도 나를 겁주려는 것이거나 내 시간을 낭비하기 위한 짓이라면 당장 그만 두는 것이 좋을 거야. 난 이미 지금 이 분위기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거든. 당신이 그러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군. 그 성공 여부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워. 하지만 난 이것만큼은 확실히 말해줄 수 있어. 당신의 그 의도가 만약 성공한다면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라는 걸 말이야. 당신이 살아오는 동안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 되겠지.”
“그런가? 하지만 난 자네가 이 사실을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군. 지금은 내 차례이고 아직 그 끝이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야. 내 차례가 길어질수록 자네 차례는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하게. 이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낭비인 것은 자네 혼자뿐이니까 말이네.”
그가 의도적으로 한쪽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시큰둥한 태도를 취했다. 조금도 생각이나 고집을 바꿀 마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로 빈정거리기 위한 행동이 틀림없었다. 바츠는 책상을 짚고 있던 양팔을 주축삼아, 그를 향해 상체를 당겨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는 말했다.
“...정말 지상에 있는 놈들은 하나 같이 똑같군. 왜 모두가 좋아질 수 있는 상황을 어렵게 만들지? 대체 나와 게임을 하려는 이유가 뭐야? 너무 오랫동안 살아와서 다른 즐거움이라도 필요한 것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정말 내가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해주길 바라나?”
바츠는 그가 보란 듯이 카니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조금 잡아 빼내 즉시 휘두를 듯한 시늉을 했다.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흉내일 뿐이었지만 내심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긴장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는 얼굴로 바츠의 눈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의 차례라는 주장을 다시 한 번 소리 없이 관철시키는 행동이었다. 더불어 바츠가 기껏 조성한 방안의 긴장감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바츠는 정말 검을 뽑아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뒤에 서 지켜보던 게르하르트라고 불린 사내가 그를 대신해서 크게 역정을 내며 방안에 긴장감을 더했다.
“이 빌어먹을 헌터 놈들은 이렇게 매번 말썽을 부리는 군. 쭉 지켜보는데 짜증을 참을 수가 없어. 애송아, 적당히 하는 것이 좋을 거다. 허튼 짓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란 말이야. 닥터를 위협하는 순간 네 머리통이 날아갈...!”
바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닥터의 기고만장한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어져온 게르하르트의 무례함은 정말 너무도 불쾌했다. 그에게 그 어떠한 자비나 관용을 허락할 수 없었다. 그 의지를 그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을 돌려 달려드는 것으로 표현했다. 매우 빠르고 저돌적인 움직임이었다. 그의 동공이 급격히 커지는 것이 보였다. 바츠는 그가 정신을 차리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판단을 세우기도 전에 그를 향해 카니지를 휘둘렀다. 그에게 접근한 뒤 검을 뽑아드는 동시에 위에서 아래로 내리 긋는 움직임이 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졌을 만큼 신속했다. 단순히 그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닌, 정말 살해할 생각으로 휘둘러진 터라, 검에 실린 힘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크게 뜬 눈을 그대로 부릅뜨고는 제자리에서 한쪽 팔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그가 검을 피해 몸을 빼낼 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무기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바츠의 카니지를 막아내는 데에 그의 단단한 기계 팔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카니지만큼의 견고함으로 너무도 손쉽게 바츠의 공격을 받아냈다.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약간의 불꽃이 튀긴 것이 고작이었다. 오히려 바츠가 순간적으로 놀라야 했을 만큼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게르하르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바츠가 잠깐 당황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남은 반대쪽 손으로 바츠의 가슴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바츠는 그의 주먹을 그대로 얻어맞고는, 숨이 막히고 호흡이 정지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야 했다. 동시에 뒤로 반대쪽 벽까지 볼품없이 나뒹구는 바람에 그 혼란은 더했다. 눈앞의 시야가 돌아오기도 전에 밀려드는 통증으로,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움츠려야 했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정말 가슴이 부서질 것 같을 만큼 괴로웠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 달려든 게르하르트가 바닥에 초라한 모습으로 누운 바츠의 위로 올라타며 목을 졸라왔다. 바츠는 가슴의 통증을 달래기도 전에,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만큼 밀려드는 싸늘한 공포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목을 조르는 그의 거대한 양팔이 주먹을 휘두른 것만큼 강인했다. 떨쳐내지 못하고 그의 양 손목을 붙잡고 그를 노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그런 바츠를 향해 무섭게 소리쳤다.
“나를 죽이려면 ‘라파엘’ 스타드가 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감히 네 까짓 것이 내게 검을 겨눠! 이대로 영원히 잠들게 해주마!”
바츠는 그의 말과 표정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예전 폐교에서 헤러티커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죽음이 가까이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때와 다른 것이라면 그의 분노가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수록 그를 떨쳐내기 위해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더 강하게 든다는 것이었다. 바츠는 그의 엄청난 힘에 짓눌려 꼼짝도 하지 못하는 데에도,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결과 눈앞이 흐려지는 것으로만 나온다는 것이 야속할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질식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였다. 이제는 그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바츠의 손이 힘을 잃고 늘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바츠는 가랑이 사이로 허전함이 가득한 진한 냉기를 느끼며, 자신의 그곳부터 급격히 수축하는 힘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어지는 냉랭한 목소리가 오히려 포근하게 들리며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네놈의 머리통을 금속으로 전부 바꾸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당장 바츠를 놓아주는 것이 좋을 거야. 난 정말 네가 싫거든.”
바츠는 옆에 서서 그의 턱밑에 카니지를 바짝 가져다대고 있는 아델리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깜빡임 없는 그녀의 눈빛이 매섭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그러자 그가 조심스럽고도 느릿하게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곁눈질을 통해 가까스로 시선밖에 확인할 수 없는데도, 그녀의 진심을 확실하게 느꼈는지, 그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바츠의 목을 조르던 그의 손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바츠의 목에서 손을 거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죄책감도 없는 듯 했다. 손을 거두는 것과 같은 속도로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다 말고, 어깨를 튕겨 아델리나의 칼날을 옆으로 밀어냈다. 아델리나가 뒤늦게 그의 목을 베기 위해 검을 황급히 조종했지만,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그녀가 검을 다시 찔러 넣기도 전에, 그의 육중한 왼쪽 팔이 먼저 그녀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다행히도 그녀가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몸을 비트는 바람에 머리가 깨지는 참사는 피했지만, 대신 어깨를 얻어맞으면 저쪽으로 나가떨어졌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자, 분노가 치밀어 몸을 벌떡 일으켜야만 했다. 그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카니지를 손에 쥐고 있지도 않으면서도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이라도 주먹으로 뭉개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바츠의 바람에 불과했다. 바츠는 그의 얼굴에 주먹을 휘두르기는커녕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델리나를 후려친 그가 이번에는 발로 가슴을 짓밟는 바람에 바닥으로 쳐 박히듯 다시 자리에 누워야만 했다. 몸통 절반을 다 덮을 정도로 커다란 그의 발은 목을 조르던 손보다도 몇 배나 더 힘이 셌다. 바닥에 곤두박질칠 때, 갈비뼈가 모두 부러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그가 바츠의 가슴을 짓이기며 화난 목소리를 토해냈다.
“건방진 애송아, 가만있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몸통이 아주 박살나 버릴 테니까 말이야!”
바츠는 그의 으름장이 거짓이 아님을 느꼈다. 가슴을 짓이기는 그의 발은 정말 강하고 무거웠다. 숨을 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말로 몸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른다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살의를 품고 있었다. 그럴 바에는 뭔가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처음은 카니지를 찾는 일이었다. 카니지만 손에 쥔다면 언제든지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팔과 다리에는 흠집도 내기 힘들겠지만, 머리와 몸통만큼은 그도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충분히 위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니지는 대체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가 처음 서있던 근처에 떨어뜨린 것 같았다. 최악이었다. 그곳은 지금 상태로는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을 만큼 멀었다. 바츠는 억울한 마음에 이번에도 그의 발목을 양손으로 붙든 채,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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