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05화 (205/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205화 *

“그만! 게르하르트, 당장 물러나게!”

그때였다. 닥터의 불호령 같은 외침이 그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 그가 순간적으로 끓어오른 분노를 잠시 잊게 했을 만큼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빠른 속도로 굳어졌다. 여전히 두 눈에는 살의가 가득했지만, 그 기세만큼은 차츰 누그러지고 있었다.

“손님에게 무슨 짓인가! 분명히 자네에게 말했을 텐데? 내 손님들에게 그 어떤 해코지도 하지 말라고 말이네! 게다가 지금 자네가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그 손님은 단순한 헌터가 아니네! 전진기지의 집사란 말이네! 자네도 함께 듣지 않았는가!”

“집사?”

“그러네! 그러니 당장 뒤로 물러나게!”

그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닥터의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지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발을 치우고는 자신이 섰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아쉬움이 남는지 돌아선 그의 입에서 퉁명스런 불만이 흘러나왔다.

“쳇, 그럼 헌터들의 뒤치다꺼리나 할 일이지 여기까지 무엇 하러 온 거야...”

“그만하게. 자네도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리고...그 경솔한 행동은 언젠가 자네에게 화를 입히고 말 것이네.”

닥터가 그런 그의 뒤통수에 차가운 핀잔을 건넸다. 그러자 그가 발끈하며 몸을 돌려세우며 소리쳤다.

“직접 봤지 않습니까! 놈이 먼저 달려들었다고요! 난 단지 대응한 것뿐입니다!”

정말 억울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닥터는 체념한 사람처럼 그를 향해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을 뿐, 그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이미 그가 입구에서부터 바츠와 아델리나에게 어떤 태도로 대했는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닥터의 반응에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 대고 짜증 섞인 소리나 질러대야 했다. 솟구치는 답답한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발로 바닥을 몇 차례나 굴러댔다. 그 사이 바츠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라도 다시 게르하르트에게로 달려들고 싶었지만, 저쪽에서 그에게 얻어맞은 어깨를 움켜쥐고 몸을 추스르는 아델리나를 보자 절로 마음이 변했다. 그녀는 놀라서 뛰어 온 패토스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로 달려가 몸을 살펴주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는 듯 했다. 그녀는 오히려 웃어주며 바츠를 위로해주고는, 곧장 분한 눈빛으로 닥터의 핀잔에 원통한 마음을 괴팍하게 표출하고 있는 게르하르트를 노려보았다. 그는 그때까지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혼자서 욕지거리를 해대며 허공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참다못한 닥터의 지시로 인해서 결국 복도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하는 닥터를 섭섭한 얼굴로 잠시 바라보다가,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을 나서기 직전, 바츠와 아델리나를 무섭게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안하네. 그가 좀 거칠지? 그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이해해주게. 다 나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네.”

게르하르트가 자리를 떠나자, 닥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사과를 해왔다. 그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이 진심임을 알리고 있었다. 목소리에도 민망한 감정이 묻어났다. 바츠는 그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만 보아야 했다. 아직 방안에는 조금 전의 흥분이 남아있었고, 그로 인해서 공기가 매우 어색했다. 그가 한 차례 크게 숨을 들이켜, 민망함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그가 전에 헌터들에게 발목을 모두 잃어서 그러네. 팔도 잘렸지. 그가 신체 일부를 기체로 대체하기 전에 말이네. 그도 원래는 자네들처럼 보통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네. 그래서 자네들에게 우호적이지 못한 것이네.”

“그게 ‘라파엘’ 스타드인가?”

바츠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내게 당신이나 그에 대한 사정을 털어놓을 필요 없어. 난 당신들의 집사가 아니잖아?”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미사의 훈련을 받은 헌터라 이건가? 좋네. 어쩌면 서로에게 오히려 이러는 편이 낫겠지. 원하는 것을 주고, 필요한 것을 얻는다. 그것이야 말로 정말 합리적인 것 아닌가? 그럼 다시 우리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할까?”

그가 바츠의 차가운 태도에 처음에는 서운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그 역시도 냉정함을 되찾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의 요구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지? 정확히는 자네 스스로 확신을 갖고 싶은 것이겠지. 자네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믿는 것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옳은 것인지 말이네.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 아닌가? 그건 다시 말하면 자네의 선택에 명분을 부여하고 싶은 것이겠지. 자네가 정의라고 말이야, 안 그런가? 그게 자네가 필요한 것이지? 그럼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준비는 되어있나?”

바츠는 저쪽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카니지로 다가가며 대꾸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뭐지?”

“세상에는 말이네, 무서운 것들이 많네. 자네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들 말이네. 그게 때로는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일 때도 있지. 무슨 말인지 아는가? 자네가 걷어찬 돌멩이가 누군가에게는 큰 공포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네. 그리고 그건 자네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 자네가 이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자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기 때문일 것이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글쎄, 자네가 그렇게 물어오니 나도 잘 모르겠군. 자네 말대로 내가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즐거움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이미 자네도 알고 있을 것이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규칙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지. 그건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닌,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상호간 최소한의 배려네.”

“말이 길어지는 것 같군. 당신이 원하는 대가를 말하라고.”

바츠가 말이 길어지는 그를 냉랭한 목소리로 채근하자, 그가 기분 좋게 살짝 웃고는 말했다.

“고맙군. 자네 혹시 데들리 크로스라고 들어봤나? 이미 실용학적으로 변한지 수백 년이나 지난 종교를 여전히 신념으로서 믿고 계승하는 자들의 모임이네.”

바츠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매우 생소한 이름이었다. 종교라는 단어의 의미도 낯설었지만, 데들리 크로스라는 이름은 아예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그의 부연 설명은 바츠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엑소시스트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네. 그들을 지칭하는 것이네.”

바츠는 그의 말을 듣자, 지난번에 만났던 일리디우스와 그의 일행들이 떠올랐다. 분명 그때 그들은 자신과 아델리나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었지만, 결코 반가운 만남은 아니었다. 그 끝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비록 일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도 넌더리가 나는 일이었다. 닥터가 그런 바츠의 얼굴을 살피고는 고개를 만족스럽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 이름은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들은 우리를 매우 경멸하네.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돌연변이일 뿐이기 때문이네. 그들은 돌연변이를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취급하네. 이단이 뭔지 아는가?”

“빌어먹을 것이지.”

바츠는 그가 다시 묻는 말에 짧게 내던지듯 답했다. 무성의한 태도였지만 진심으로 느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그가 처음에는 놀란 듯 멈칫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이었는지 이내 바츠를 향해 기분 좋게 손가락질 하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말했다.

“멋진 대답이군! 맞네. 우린 그들에게 있어 빌어먹을 존재네. 그들은 우리를 헤러티커와 동일시하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그들이 말하는 정화에 당신들도 포함이 되었다는 것이지.”

“훌륭하네. 정확히는 정화가 아니라 말살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네. 자신들이 가진 정의로 내려진 기준을 토대로, 그에 어긋나는 것들을 모조리 이단으로 간주, 판단하고는 배척하니까 말이네. 그들에게 다름은 그저 자네가 말한 대로 빌어먹을 것일 뿐이네. 빌어먹을 것은 언제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지.”

바츠의 대답이 이어질 때마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밝고 환하게 변했다. 대화 자체가 즐거운 것 같았다. 하지만 바츠는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조급함만 더해질 뿐이었다. 바츠는 그에게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지? 쓸데없이 말이 길어지는 것 같군.”

닥터는 바츠의 차가운 말투에 호흡을 골라,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대답했다. 무척 진중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성하라고 부르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직접 만나, 더 이상 우리에게 참견하지 않겠다는 확언을 받아와 주게. 그게 내가 자네에게 원하는 것이네. 그럼 그때 자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도록 해주겠네.”

바츠는 그의 요구에 응하기에 앞서, 슬며시 피어나는 의문부터 앞에 내놓았다.

“당신들이 직접 할 수도 있는 일인 것 같은데, 굳이 나에게 부탁하는 이유가 뭐지?”

“물론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네. 최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 하지만 그들은 우릴 너무도 끔찍하게 생각하네. 함께 마주 서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자들이지. 자네 뒤에 선 진짜 돌연변이가 자네 여자를 탐낸다면 그 사실을 받아드릴 수 있겠나? 같은 이치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이 받드는 그자를 만날 기회조차 주지 않네. 무엇보다도 우린 헌터나 집사가 아니라는 것이지.”

바츠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돌려, 아델리나가 게르하르트에게 얻어맞은 부위를 옆에서 걱정스런 모습으로 챙기는 패토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옆에서 계속해서 안부를 물으며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더욱더 그녀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바츠는 그가 고마우면서도 왠지 모를 불만이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걸 느꼈다. 그가 아델리나와 가까이 있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환한 눈웃음으로 보답하는 그녀도 미워보였다. 괜히 소외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닥터가 대신 위로하듯 힘을 실어 말했다.

“아마 쉽지 않을 것이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와 그들과의 관계는 특별하지. 그들은 헌터를 존경하거든. 특히 집사라면 발등에 키스를 할 정도지. 집사는 신부(father)라고도 불리지 않나? 그들에게도 아주 특별한 존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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