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06화 *
바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시선을 다시 닥터에게로 옮겨놓으며 물었다.
“내가 가면 달라질 수 있다는 건가?”
“그러네. 확실히 시도해볼 만한 일이지. 자네가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최소한 우리의 의사를 전달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난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네. 그를 만나서 우린 그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전해주게. 혹시 내키지 않는다면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네. 날 위한 것이 아니니 쉽게 내치지 말아주게. 이곳 주민들을 위해서 그렇게 해달라는 것이네. 이들이 가당찮은 이유로 위협 받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지 않나? 이곳 주민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은 가치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의 권리가 있지 않나? 고작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신체 일부가 다르다고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만큼 서러운 차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건 정말 끔찍한 죄악이나 마찬가지인 억지에 불과하네.”
“그러니까 당신 말을 종합하면 그들은 당신들을 몹시 증오하는데, 그 이유가 당신들이 이곳에 살며 당신처럼 특별한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억지스러운 일이고, 당신은 그들에게 그 억지를 멈추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그건 당신들에게는 번거롭고 어려운 일이지만 내게는 간단하고 효과적인 일이니까 말이야.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가?”
바츠의 물음에 진중하던 그의 얼굴에 착잡한 심경이 묻어났다. 바츠는 그의 복잡한 심정을 왠지 알 것만 같았다. 그저 믿어야만 할 수밖에 없는 자신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 그것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바츠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막연하게 좋아질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었다. 그가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좋아, 당신의 요구를 들어주겠어. 대신 필히 약속을 지켜야 할 거야.”
바츠는 매우 고민스러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를 무력으로도 제압할 수 없는 상황에, 오히려 기회를 준 그에게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는 얼마든지 바츠가 필요로 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닫을 수가 있었다. 어쩌면 힘으로 내쫓는 것도 간단했다. 그랬다가는 지금까지 바츠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괜한 시간 낭비만 한 꼴이었다.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만큼 최악은 없었다. 절대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부풀기 시작하는 조급함이 바츠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 보다 더 쉽게 만들었다. 게다가 어두워진 얼굴로 애원하듯 바라보는 그를 차마 외면하기 힘들었다. 그러자 그가 급격히 밝아지는 얼굴로 말했다.
“약속하네! 자네가 원하는 모든 대답을 해주겠네! 가장 마지막으로 대답을 들은 것도 자네와 비슷한 또래의 헌터였네. 고작해야 1, 2년 되었겠군. 그리고 그 전에 한 녀석도 다녀갔지. 그 녀석은 헌터가 아닌 일반 야인이었지만 매우 당돌한 녀석이었지. 아주 커다란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네. 그들을 만나보면 내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네.”
“됐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 당신을 믿어보도록 하지. 당신이 내게 의지하려는 것만큼 말이야.”
바츠는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도 않았고 한켠에 꺼림칙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의 절박함만큼은 믿었다. 절박함은 사람을 진솔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지상을 누비며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들이었다. 물론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고 있는 것도 이유였다. 그의 진정성까지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고 느꼈다. 이미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또 다시 엄청난 시간을 소모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외에 시간을 더 허비할 수 없었다. 또한 그가 앞서 말한 대로 부사령관이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 역시 마음에 걸렸다. 그에게 시간이 주어질수록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바츠는 그에게 지체 않고 길을 물어야 했다.
“도시를 나가서 서쪽으로 가다보면 금방 바다가 보이네. 바다가 무엇인지 아나? 진짜 스톡홀름 시티를 집어 삼킨 괴물 말이네. 그 바다의 해안선을 따라 엿새쯤 가서, 다시 남쪽으로 그만큼 그리고 하루 정도를 더 가면 아주 훌륭한 도시를 볼 수 있을 것이네. 바로 그곳이네. 아주 오래전 지명은 비엔나 시티. 하지만 지금은 크로스 시티라고 불리고 별칭으로 바티칸이라고도 불리네. 뭐, 딱히 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네. 그곳 역시 본래의 도시들은 바다에 수장된 지 꽤 되었으니까 말이네. 지상의 많은 부분이 바다 속에 잠겼지. 길이 어렵다면 안내자를 동행할 수 있도록 해주겠네. 그쪽으로 가는 길을 잘 아는 사람이 하나 있네. 크로스 시티까지는 아니더라도 근처까지 길을 안내해줄 것이네.”
바츠는 그의 배려에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매번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안내자의 유무는 그 신속함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다만 그 안내자가 이번에는 굉장히 껄끄러운 대상이 될 것 같아서 불안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금방 현실로 다가왔다. 바츠의 우려대로 그가 밖에서 기다리던 게르하르트를 다시 안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바츠는 물론이고 그 역시도 서로에 대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바츠와 아델리나를 떨떠름한 시선으로 흘겼다. 조금 전 앙금이 아직 가슴에 선명한 것이 분명했다. 바츠와 아델리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를 향해 매섭게 쏘아보며 그를 압박했다. 하지만 그는 둘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정면으로 받으며 들어와서는, 닥터를 마주보고 선 바츠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그가 한쪽 입술을 씰룩거리며 바츠를 또 한 번 흘겼다.
바츠는 그의 적의 가득한 태도에 안내자는 필요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닥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바츠의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켰다.
“게르하르트, 에르네스트를 찾아와 주게.”
닥터의 지시에 그가 깜짝 놀라더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츠와 아델리나를 한차례 씩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중 무시하는 기색이 가장 진한 눈초리였다.
“닥터! 이놈들은 정말 풋내기라고요! 아까 봤잖아요! 설마 이런 녀석들을 믿는 겁니까? 오히려 긁어 부스럼만 만들 겁니다! 그냥 날 보내줘요! 대체 어떤 헌터가 상대에게 죽일 거라고 협박을 한 답니까! 저 년이 진짜 헌터였다면 이미 내 목을 베었어야죠! 나를 보내주면 놈들을 깡그리 쓸어버릴 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들을 보내야 하는 것이네.”
“닥터!”
“그만, 거기까지네. 에르네스트가 그곳까지 길을 가장 잘 알지? 그를 데려와 주게. 내가 자네에게 지시하려는 것은 그것뿐이네. 부탁하겠네.”
게르하르트는 닥터의 단호한 목소리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바츠를 노려보았다. 그는 지금이라도 바츠의 목을 조를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카니지를 쥔 손에 더욱더 힘을 주며, 그가 팔을 뻗어오면 그의 목에 칼끝을 박아 넣을 생각을 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매우 흥분한 상태로 분노하고 있었지만, 이어지는 닥터의 등쌀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방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앞에서 그와 다른 누군가가 대화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발음이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게르하르트보다는 훨씬 젊은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혼자서 안으로 들어왔다.
바츠는 그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조금 전 이곳으로 들어올 때, 건물 입구에서 보았던 청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오른쪽 기계 팔이 눈길을 끌었다. 닥터의 것과 거의 흡사한 형태였다. 하지만 그가 가까이 다가와 바로 옆에 섰을 때에는 그가 기계로 된 오른쪽 팔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왼쪽 팔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기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손을 본다면 또 다른 닥터의 몸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을 정도로 그 정교함이 매우 닮아있었다. 그가 바츠의 시선에 방긋 웃어주고는 바로 닥터에게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완더, 내 왼팔은 언제쯤 되는 겁니까? 오키프는 아직까지도 불만으로 가득하다고요. 다시는 시술을 안 할 거예요. 잘 알잖아요.”
그의 우는 소리에 닥터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대꾸했다. 그를 바라보는 닥터의 시선에 애정이 넘쳐났다.
“다녀오면 생각해보도록 하지. 인사하게. U13 아르크에서 온 집사네. 그리고 이쪽은 에르네스트. 우리의 미래네.”
닥터의 소개에 에르네스트가 다시 바츠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바츠가 그를 굳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아, 반갑습니다. 에르네스트에요. 엘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어디를요?”
그가 바츠를 향해 기쁘게 인사를 건네다말고 닥터를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닥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헌터들을 따라 크로스 시티를 다녀와 줘야겠네.”
“드디어 놈들을 응징하려는 겁니까? 잘 됐네요! 그 놈들이 우릴 얼마나 괴롭혀 왔습니까? 며칠 전에도 민스크 시티에 갔던 주민들이 봉변을 당했다고요! 게르하르트가 정말 기뻐했겠어요!”
그가 의욕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며 잔뜩 달아올랐다. 아주 오랫동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닥터는 그의 흥분을 억지로 짓누를 수 있을 만큼 진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아니, 그는 함께 가지 않을 것이네. 자네와 여기 있는 헌터 둘만 가는 것이네. 어쩌면 셋일 수도 있겠군.”
닥터의 시선이 아델리나 곁에 머물고 있는 패토스를 한 번 다녀왔다.
“왜죠? 게르하르트가 함께라면 일이 더 쉬울 텐데요? 놈들은 비명을 지르기에도 바쁠 거라고요.”
“그래서 이들과 자네만 가는 것이네. 난 그들이 비명을 지르길 원하지 않네. 그들이 우릴 인정하길 바랄 뿐이지.”
닥터의 대답을 들은 그가 솟구친 자신의 흥분을 순식간에 안으로 집어 삼켜버리고는 기운을 잃은 사람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닥터의 대답이 아쉽고도 섭섭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고집을 부리거나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는 닥터가 다시 한 번 하는 당부를 거부감 없이 받아드리고는 바츠와 아델리나 그리고 패토스를 이끌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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