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07화 *
“조심해라. 항상 긴장하고.”
복도로 나오자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게르하르트가 초조함이 엿보이는 얼굴로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항상 퉁명스럽고 흥분한 상태로 사납게 굴기만 할 것 같던 그였는데 전혀 뜻밖의 모습이었다. 마치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에르네스트를 신경 쓰고 있었다.
“걱정 말아요. 놈들 따위 하나도 겁나지 않으니까요. 벌써 놈들을 상대해본 적도 있는 걸요? 게르하르트도 알잖아요.”
“알지. 그때 아주 훌륭하게 해줬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염려에 에르네스트가 우쭐거리는 것마저도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그에게서 닥터가 보여주었던 만큼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상대가 바츠였다면 그는 분명 눈부터 부릅떴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의 미소는 잠깐 한눈을 팔면 보지 못했을 정도로 짧았고, 나름 상냥한 말투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이전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엄중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크로스 시티에 가까워질수록 더 대단한 녀석들을 만날 거다. 네가 상대한 것은 고작 해봐야 주교 정도였지. 그마저도 고전해야 했잖아? 추기경 급의 엑소시스트를 만난다면 두려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놈들은 나조차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들이니까 말이야.”
바츠는 짧은 시간동안 보여 진 게르하르트의 모습에서 미사의 교관인 마티프가 절로 떠올랐다. 그도 무섭게 윽박지르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내심 찬찬한 구석이 있었다. 그가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여전히 검은 얼굴을 무섭게 씰룩대며 학생들에게 겁을 주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왠지 모르게 그리웠다. 에르네스트가 그제야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닥터랑 똑같은 말을 하네요. 그렇게 대단한 가요?”
“물론이지. 놈들이 헤러티커도 사냥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네가 아무리 단단해도 미세관절이 부러지면 인체와 똑같이 불능상태가 된다. 놈들은 네 미세관절을 부수는 것은 물론이고 기체에 커다란 손상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 늘 조심해야 해.”
“알겠어요. 주의하도록 할게요. 어차피 난 크로스 시티까지 가지 않을 거예요. 닥터가 이들을 그 근처까지만 데려다주면 된다고 했거든요. 브르노까지만 같이 가면 될 것 같아요. 거기에서 놈들을 찾아보기 쉬우니까요.”
게르하르트가 뒤에서 어색하게 기다리고 있던 바츠와 일행에게 시선을 준 것은 그때 비로소 였다. 그의 시선이 차갑게 빛나며 아델리나를 거쳐 바츠에게로 날아들었다. 바츠는 그에게 핀잔에 가까운 볼멘소리로 물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지?”
“애송아, 잘 들어라. 그곳은 놈들의 중요 거점 중 한 곳이다. 추기경 급의 엑소시스트가 있는 곳이란 말이다. 물론 네 놈을 환영하겠지만 놈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거야. 네 놈이 우리를 변호하는 것까지 좋아 할리는 없으니까 말이야. 각별히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을 거야. 조금 전처럼 네 놈을 구해주기 위한 구세주가 거기에는 없을 테니까 말이지.”
바츠는 그가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말을 건넸지만, 이번만큼은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뭉클했을 만큼 그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진심으로 걱정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비록 표현이 부드럽지 않았지만 그의 호의를 느끼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매우 낯선 모습이었다. 그가 혹시 조롱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때문에 바츠는 그의 호의를 매몰차게 대해야 했다. 나름대로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오히려 더욱더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당신의 걱정 따위는 필요 없어.”
바츠는 쌀쌀맞게 한마디 던지고는, 에르네스트를 앞질러 홀연히 밖으로 향했다. 뒤에서 발끈한 게르하르트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흥분하는 만큼 좋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갈 뿐이었다. 입 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우선 하늘이 닫힐 때까지 가야 합니다.”
도시를 벗어나자 에르네스트가 곧장 서쪽으로 안내했다. 그는 닥터가 언급한대로 가까운 해변을 멀리 시야에 두고 해안선을 따라 쭉 나아갔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우 냉랭했지만, 바닷물만큼 푸른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 때문에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무엇보다도 태양과 맑은 하늘이 없는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들을 바라보느라 추위를 느낄 새가 없었다. 그건 분명 하늘이 열릴 때부터 시작된 변화였다. 땅에서부터 피어난 생명들이 여기저기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히스(heath)들이 자라난 무어지대를 보는 듯 했다. 크고 작은 수목들도 눈에 띄었다. 특히 총천연색을 가진 칼루나(heather)들이 인상 깊었다. 물론 남쪽에서도 빈도의 차이는 있지만, 생명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른 관목이나 선태류들을 찾아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곳은 그곳과는 달랐다. 가득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가득하다고 느껴질 만큼 그 빈도가 훨씬 잦았다. 패토스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더욱더 날뛰게 만드는데 충분할 만큼 넓고 많이 분포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에르네스트가 헤러티커 걱정을 하며 우려스럽게 바라보았지만, 바츠와 아델리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소란으로 인해서 헤러티커를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반나절을 이동했을 때였다. 날이 어스름해지기 시작할 쯤, 저쪽에서 부산스럽게 굴던 패토스가 갑자기 서둘러 이쪽을 향해 돌아왔다. 그의 정처 없는 시선이 겁에 질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들 의아한 분위기였지만, 그 이유를 아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먼 곳에서부터 날아드는 비명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에르네스트가 바츠와 아델리나의 동의를 구한 뒤, 잠시 경로를 벗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바츠는 딱히 관심이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아델리나와 함께 그의 뒤를 쫓았다. 혼자 남은 패토스가 신음소리에 가까운 괴성을 내뱉으며 주의를 끌었지만 소용없었다. 바츠는 그가 만들어내는 분란을 애써 무시해 버렸다. 아델리나가 걱정하지 말라고 기다리라며 위로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그가 그토록 가지 못하게 만류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오래된 작은 마을이었다.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곳이었다. 4, 5채의 낡은 집들이 앙상한 뼈대만 들어낸 채 겨우 버티고 있고, 그 어디에서도 생기는 찾아볼 수 없다. 지상에 매우 흔한 버려진 집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조금 달랐다. 생기라고 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했지만, 흥분으로 가득한 역동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악에 바친 고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활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소란스럽지만 안정감을 느끼는 그런 활기가 아닌,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어수선함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눈에 띄었다.
바츠는 마을 입구에서부터 붉은 혈흔을 찾아볼 수 있었다. 푸석한 지면 위에 흩뿌려진 핏자국이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도 윤기와 점성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는 그 혈흔을 남긴 주인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등을 보인 채 이미 사망해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그 시신을 반대로 뒤집고는 말했다.
“단 번에 찢겼군요.”
누가보아도 알 수 있는 뻔한 말이었다. 시신은 커다란 열상으로 내장이 드러났을 만큼 처참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한쪽에서 반대쪽으로 길게 이어진 3개의 절창이 눈에 띄었다. 마치 동시에 휘둘러진 세 자루의 검에 베인 것 같았다. 바츠와 에르네스트의 입에서 같은 이름이 불려졌다.
“헤러티커.”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돌려 뒤에서 지켜보던 바츠를 돌아보았다. 바츠는 그의 시선에서 긴장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쪽에서 이어지던 소란 속에서 평소 패토스가 내뱉는 의미 불명의 외침보다도 더욱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깨가 완전히 접혀 움츠려진다고 느껴질 만큼 섬뜩한 소리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물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바츠는 잠시 고민스러웠지만, 카니지로 손이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냥 모른 척 지나쳐도 되는 일이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에르네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그쪽을 향해 다가가는 것을 보니 더더욱 그랬다. 그를 따라 절로 걸음이 내딛어졌다. 하지만 그때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델리나가 바츠의 팔을 잡아왔다. 그녀는 시신을 발견했을 때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바츠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자, 그녀가 혼란스런 눈으로 시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녹색 케찰이야.”
바츠는 그제야 시신의 오른쪽 어깨에 녹색 염료로 그려진 작은 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색이 많이 바래있었지만, 그 윤곽만큼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아이기스였다. 바츠가 걸음을 멈추자, 앞서가던 에르네스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돌아보았다. 그가 어깨를 한 차례 으쓱하며 답답한 마음을 표현했다. 분명 왜 함께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이기스야.”
바츠의 짧은 대답에 그의 시선이 뒤늦게 시신의 녹색 작은 새를 다녀왔다. 그 모양을 처음 보는지, 필요 이상으로 오래 살폈다. 그 사이 건물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점점 더 처절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많은 물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거나 부딪히는 소리도 격렬하게 들려왔다. 에르네스트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래서요? 헌터들은 원래 헤러티커를 사냥하기 위한 자들 아닙니까?”
바츠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아델리나를 한 번 바라본 뒤에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그때까지도 복잡한 심경을 비치고 있었다.
“맞아. 하지만 이 녀석들 역시 우리에게는 헤러티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자들이지. 너와 스톡홀름 시티의 사람들과 데들리 크로스라고 불리는 자들 사이의 관계와 같거든.”
“그래서 지금 저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가자는 겁니까? 어차피 헤러티커를 사냥할 거라면 누군가가 더 다치기 전에 하는 게 나은 것 아닙니까.”
바츠는 그의 말을 듣고 나자 건물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적어도 세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다른 비명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이윽고 그 하나가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 17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그녀는 피로 물든 자신의 한쪽 어깨를 움켜쥐고는 맞은편 건물을 향해 위태롭게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건물 앞에 다다르기 직전, 바츠와 일행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방향을 바꿔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그녀의 간절한 외침이 그녀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했다. 그리고 그 뒤를 쫓는 그녀의 등 뒤로, 방금 그녀가 뛰쳐나온 건물을 빠져나오는 흉측한 괴물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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