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09화 (209/268)

<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09화 *

“그래요? 난 우리가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아닌가 봐요?”

에르네스트는 바츠의 냉대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볼멘소리보다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대쪽 팔뚝에 남아있는 옷을 잡아뜯어냈는데, 손을 흠뻑 적신 헤러티커의 누런 피를 닦아내기 위함이었다. 게르하르트와는 눈에 띄게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와는 다르게 절대 화를 내지 않을 사람 같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그의 순순한 태도에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솔직해야만 했다.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군.”

에르네스트는 바츠의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얼굴이 더욱더 환해졌다. 헤러티커를 쓰러뜨렸다는 자부심이 증명되자 몹시 기뻐보였다. 당장 바츠를 껴안으며 감격할 표정이었다. 바츠가 미리 눈치를 채고 경고를 하기 위한, 외마디 감탄사를 내지 않았다면 정말 행동으로 옮겼을 것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덕분에 그의 얼굴에는 서운한 기색이 피어났다. 바츠는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겨우 삼켜내며 그에게 물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한 관심이었다.

“상처들은 어때? 상처라고 해도 되는 건가?”

바츠의 물음에 그가 그제야 자신의 팔과 몸통을 유심히 살폈다. 팔에는 눈에 띌 만한 특별한 손상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몸통에는 여기저기 자잘한 흠집들이 가득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흔적이 아닌, 전부 방금 전 헤러티커의 손톱에 의해서 생겨난 상흔들이 틀림없었다. 그 정도가 긁힌 정도의 매우 가벼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등에 난 흠집들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마찬가지로 어딘가 심각하게 손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으나, 크고 작은 흠집들 사이에서 구겨지거나 찢겨진 부위가 보였다. 힘줄 역할을 하는 미세 관절들이었다.

에르네스트가 그 부위를 쳐다보는 바츠의 시선을 읽고는, 고개를 돌려 찾아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눈으로는 직접 찾아볼 수 없었다는 걸 금방 깨닫고 물었다. 꽤 궁금한지 조바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왜요? 상태가 심각한 가요?”

“음...글쎄...심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가는 관절 두어 군데가 잘려져 있어. 부러졌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군.”

“아, 왠지 허리 쪽이 뻐근한데, 아마 그 때문인 것 같네요. 움직임에는 무리가 없는 걸로 봐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나중에 스톡홀름으로 돌아가서 수리를 하도록 하죠. 저보다는 저 사람부터 돌보는 것이 나은 것 같으니까요. 심한 충격으로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여요.”

에르네스트가 자신의 상처를 찾아보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고는, 저쪽에 주저앉아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그녀는 겁에 질려 긴장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러티커가 숨을 거뒀는데도 여전히 두려움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공포가 정말 무엇 때문인지 짐작해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의 불안한 시선에 머쓱함을 느껴야 하는 것을 보면 분명했다. 바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우리가 떠나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왜죠? 어깨도 치료해주고 다독여주고 가도 늦지 않잖아요. 설마 의료 킷을 사용하는 게 아까운 건가요? 습윤 밴드 몇 개쯤은 그냥 줘도 되잖아요?”

에르네스트가 진짜로 이유를 모르는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며 물었다. 바츠는 그녀의 한쪽 치맛자락에 보이는 녹색 케찰에 시선을 고정하고 대답했다.

“너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환영할 것 같지는 않거든. 아마 내가 다가가면 저 여자는 헤러티커에게 쫓기는 것처럼 달아나고 말거야. 저 여자가 장님이 아니라면 말이지.”

“그런가요? 그래도 일행으로 보이는 저 시신도 묻어주고 조금 돌봐주고 가고 싶은데...어떻게 안 될까요?”

“나한테 묻지 말라고. 우리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바츠는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아델리나와 한 차례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 역시 꽤나 조심스러워 하는 눈치였는데, 약간의 연민이 엿보이는 것을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다만 그 결단을 내리는 것이 어려운 듯 했다. 그런데 그때, 뒤쪽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중년의 여인이었는데 10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과 함께, 조금 전 저쪽에 주저앉아있는 소녀와 헤러티커가 차례로 뛰어나온 건물에서 막 빠져나온 것 같았다. 그 건물 앞에 서서는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물었다.

“스톡홀름 시티에서 오신 분들이신가요?”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물음에 환한 얼굴로 손을 높이 흔들며 대꾸했다. 그들의 경계심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 같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저쪽의 소녀처럼 두려움을 쉽게 떨치지는 못했다. 기계 몸을 하고 있는 에르네스트보다도 바츠와 아델리나가 훨씬 더 낯선 눈치였다. 손을 흔들어주는 에르네스트에게는 비록 어색했지만 미소를 슬쩍 지어보였지만, 그 뒤에 바츠와 아델리나를 향한 시선은 긴장감으로 완전히 젖어있었다. 둘에게 머문 시간조차도 매우 짧았다. 에르네스트가 여인과 아이가 선 곳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안심해요. 당신들을 해치지 않을 거예요. 우린 그냥 지나는 길입니다.”

에르네스트는 그들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별다른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위로였다. 그들은 그의 변명에 가까운 설명을 듣는 동안 멀찌감치 선 바츠와 아델리나를 몇 번이나 훔쳐보았다. 그때마다 바츠와 아델리나는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들의 경계심이 풀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로 어색했다. 중간에 저쪽에 주저앉아있던 소녀가 황급히 여인과 아이가 있는 곳을 향해 달아나듯 뛰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마치 남 몰래 나쁜 짓을 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들이 결국에는 경계심을 풀었다는 것이었다. 에르네스트의 밝은 표정과 목소리가 큰 도움이 되었다.

“별 건 없지만 맛있게 드세요.”

바츠는 그들이 마음을 놓고 난 뒤, 앞쪽에 쓰러져 있던 사내를 묻는 것을 도왔다. 그는 그들의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즉, 그들은 모두 가족이었던 것이다. 4년 전 이곳에 정착했다고 말했다. 키예프 시티로 가려고 했지만, 근방에 프레이를 자주 볼 수 있어서 가는 길을 포기했다고 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프레이를 사냥해, 스톡홀름 시티를 통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운이 나쁘게 헤러티커를 만난 것이라고 했다. 만약 바츠와 일행들이 아니었다면, 결국 모두 죽었을 것이라면 몇 번이나 감사의 말을 전해왔다. 그들이 변변치 않은 살림에도 음식을 대접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자신을 환타라고 소개한 중년의 여인이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했다. 바츠는 조금이라도 더 지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아델리나가 성의를 무시하지 말자며 종용하는 바람에 결국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녀와 아이들이 봉변을 당하고 있던 건물이, 바로 이들의 집이었던 것이다. 패토스는 시신을 묻고 난 다음에 데리고 왔다. 그는 처음 그 자리 그대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훌륭한 음식들이야.”

아델리나가 앞에 내놓은 음식들을 먹기 위해 방독면을 벗어 제쳤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말린 프레이 고기와 반쯤 썩은 사과 그리고 막 불에 구운 개고기가 차려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상에서 이 정도면 정말 호화스런 차림이었다. 심지어 조금 상하기는 했지만 식수까지도 있었다. 아델리나는 애니밀 덕분에 영양이 부족하거나 굶주림을 느끼지 않을 텐데도, 그것들을 맛있게 먹었다. 바츠가 조금만 먹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만류에도 아랑곳 않았다. 손을 대지 않는 바츠에게 오히려 권했을 정도였다. 에르네스트가 그 모습을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그녀가 환타와 아이들이 자신과 일행을 너무 무서워하지 않길 바라는 의도로 하는 행동이 특별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미 이들이 아이기스라는 것을 잊은 것으로 보이는 아델리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패토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차려진 음식을 정신없이 먹어치우는 데만 바빴다. 굳이 문제를 찾자면 음식이 적다는 것뿐이었다.

“왜 드시지 않나요?”

환타가 바츠와 마찬가지로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그가 음식을 앞에 두고 별다른 반응이 없자 염려스러운 것 같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에르네스트에게 가장 고마워하고 있었다.

“난 음식을 먹지 않아. 18살 때까지는 당신들처럼 음식을 먹었지만, 이제는 먹을 필요가 없거든. 보이는 것처럼 내 신체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니까 말이야. 왼쪽 팔도 마찬가지야. 생긴 건 피부로 덮여있어서 감쪽같지만, 머지않아 전부 들어내고 이쪽도 오른팔처럼 만들 거야. 안은 이미 똑같은 금속들로 채워져 있지. 머리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아까 머리와 왼팔을 보호하려고 애쓴 이유는 뭐지? 다른 부위에 비해서 내구성이 떨어지나?”

바츠의 물음에 에르네스트가 부끄러운지 수줍은 얼굴로, 괜히 자신의 왼쪽 팔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다른 부위처럼 강화소재로 겉을 둘러야만 하죠. 그 전까지는 어쩔 수 없어요. 자칫 손상이라도 입으면 부위 전체를 교체해야 하니까요. 부품을 구하고 만드는 것이 쉽지 않으니 항상 조심해야 하죠.”

바츠는 방독면을 벗어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것 참 부럽군. 다치거나 부러져도 그냥 교체만 하면 되니까 말이야.”

“그런 가요? 어쩌면 필멸자인 당신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당신...생각보다 어리네요?”

에르네스트가 수줍게 대꾸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바츠는 그의 변한 태도에 조금 불쾌감을 느끼며 물었다.

“왜? 그게 문제라도 되나?”

“아니 그게 아니라...난 당신에게 예를 갖췄는데, 당신은 내내 내게 하대를 했잖아...요. 난 당신이 최소한 30년은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요.”

“그게 지금 중요한 건가? 그래서 넌 얼마나 오래 살았지? 닥터처럼 수백 년이라도 살았나?”

바츠는 그에게 빈정거리고는 옆에 서서, 둘을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지켜보는 환타에게 자리를 피하라는 눈치를 슬쩍 주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런 바츠에게 고개를 작게 내두르며 언쟁을 멈춰주길 요구했으나, 다시 이어진 바츠의 시선에 결국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저쪽 구석에서 상처를 돌보던 자신의 아이들도 잊지 않고 챙겨,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에르네스트가 조금 창피해하는 얼굴로 하소연을 하듯 말했다.

“난 단지 이제부터는 나도 당신에게 편하게 하겠다고 말하고 싶은 거라고...”

“그런 거라면 네 마음대로 해. 날 무시하거나 조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상관없으니까.”

바츠가 시원하게 대답하자 에르네스트는 허무함을 느꼈는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시며 민망해했다. 자신이 괜히 민감하게 군 것 같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이 슬며시 침묵이 밀려들자 갑자기 발끈하며 소리쳤다. 게걸스런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고 있던 패토스는 놔두고, 조용하고 얌전히 음식을 먹으며 지켜보고 있던 아델리나를 향한 것이었다.

“적당히 먹으라고! 필멸자들은 다 이런가? 정말 짐승 같군!”

“응?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뭐라는 거야!”

바츠와 에르네스트의 신경전이 순식간에 아델리나와 에르네스트의 언쟁으로 변했다. 그녀는 느닷없이 자신에게 핀잔을 주는 그를 매우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반발했는데, 그녀로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 그녀는 욕을 제외한 모든 말로, 그를 향해 불만을 쏟아냈다. 재미있는 것은 비록 언쟁으로 인해서 불가피하게 늘어난 것이었지만, 에르네스트와 아델리나가 주고받는 대화가 급증했다는 사실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조금 수다스러운 편이기는 했지만 아델리나는 물론이고 바츠에게도 항상 조심스럽게 굴며, 필요한 말 이외는 따로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건 서로간의 거리 탓이었는데, 그 거리가 급격히 좁혀진 것만 같았다. 둘은 한참동안 서로를 비난하며 말다툼을 벌였다. 패토스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음식을 먹는데 바빴고, 바츠는 황당한 기분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슬쩍 2층 난간에서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밑에 상황을 훔쳐보는 아이들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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