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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211화 (211/268)

<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11화 *

다음날, 바츠는 아침 일찍 환타의 집을 나섰다. 그녀는 집터 밖에까지 바츠와 일행을 배웅해주었다. 고작해야 20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틈이 날 때마다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자신의 딸이 별다른 후유증을 보이지 않는 것마저도 바츠와 일행들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아직 판단하기 이르기는 했지만, 헤러티커의 손톱이 깊숙이 할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딸이 감염을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어쨌든 그녀의 친절은 헤어지기 직전까지 계속되었고, 특히 에르네스트에게 도드라졌다. 그녀는 에르네스트가 몸을 가릴 수 있도록 따로 옷가지를 내주기까지 했다. 그들의 겉옷에 녹색 케찰이 그려진 걸 생각하면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의 아이들도 에르네스트의 금속으로 된 몸보다, 바츠와 아델리나의 검은 슈트를 더욱더 경계하고 어려워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둘 사이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이 맞지?”

바츠는 떠나기 전 에르네스트와 헤러티커의 사체를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내심 어제의 불안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헤러티커의 사체는 하룻밤 사이에 빠르게 부패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 살점이 전부 뜯겨 있었다. 뻥 뚫린 구멍으로 내장이 텅 비어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주위에 작은 설치류의 발자국들이 가득했다. 에르네스트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증거들이었다.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그제야 남아있던 어제의 불안을 모두 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길을 나서는 아델리나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녀는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부터도 얼굴이 좋지 않았다. 다시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반나절쯤 이동했을 때에는, 방독면 렌즈 밖으로 보이는 그녀의 눈빛이 매우 어두워졌을 정도였다. 밤새 피로가 오히려 쌓인 사람처럼 보였다. 패토스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수선하게 구는 것에도 날카롭게 반응했을 정도였다. 그녀의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바츠가 괜찮으냐고 묻는 말에는, 대답 없이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저기 하늘이 닫히는 곳이 보인다.”

에르네스트가 손끝으로 앞쪽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서 스톡홀름 시티에 가까웠을 때 보았던, 그때의 것과 똑같은 모습의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가로질러 나뉜 경계를 사이로, 맑고 푸른 하늘이 다시 본래의 회색빛 침침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을씨년스러운 그 특유의 싸늘한 하늘이었다. 그리고 그 경계에 가까웠을 때, 아델리나가 잠시 쉬어가자며 애원하듯 말했다. 눈빛만큼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바츠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서 긴박함을 느껴야만 했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도 힘들어보였다.

“괜찮아?”

바츠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그녀의 후드를 젖히고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칼이 흠뻑 젖었을 만큼 땀이 흥건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방독면 렌즈에 김이 서리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아델리나! 정말 괜찮은 거야?”

“응...아니...배가 좀...”

바츠가 기겁하며 묻자,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배를 움켜쥐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심한 복통을 앓는 모양이었다. 바츠는 함께 자리에 앉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그러게 내가 먹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잖아. 바보 같이...거기다 너 환타가 준 물도 마셨잖아?”

“제대로 된 물을 마실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렇지...정말 먹고 싶었단 말이야...”

바츠는 서럽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사실 바츠가 어제 환타가 내어준 음식을 먹지 않은 것은 굳이 먹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 음식 자체에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이었다. 쉽게 말해 그 음식들을 먹으면 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델리나는 그 음식들을 무리하게 먹고, 결국 이렇게 탈이 났다. 아마도 그녀는 패토스를 보고 안심했던 것 같았다. 그는 어떤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당연히 탈이 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와 아델리나는 달랐다. 그에게 그런 음식들은 이미 매우 익숙한 것들이었지만, 아델리나에게는 그보다는 더 위생적인 것들이 필요했다. 적어도 민스크 시티에서 먹은 음식 정도가 되거나 전진기지에서처럼 제대로 된 조리가 가능해야 했다.

“잠깐만 기다려 줘.”

아델리나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저쪽을 향해 달려갔다. 멀리 큰 바위들과 약간의 수풀이 자란 곳이었다. 그녀는 그 안으로 얼른 뛰어들었다. 패토스가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해 하며 그 뒤를 쫓아가려고 했지만, 바츠가 말려 세우는 바람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바츠는 패토스를 따끔한 목소리로 불러, 자신의 바로 옆에 서게 했다. 그는 아델리나가 걱정되는지 몇 번이나 머뭇거리며 돌아보았지만, 바츠가 무섭게 타이르자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는 터덜터덜 돌아왔다.

“뭐야? 무슨 일인 거야?”

에르네스트도 갑작스런 상황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아델리나가 몸을 감춘 수풀과 바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바츠는 그의 시선에 다리가 아프다는 너스레를 떨며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에르네스트의 황당한 얼굴은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느닷없이 허허벌판에 멈춘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바츠가 자리를 잡고 앉는 모습을 보자 조금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헛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그가 그렇게 바츠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던 얼굴이 어느새 진지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어제...사실 어제 물으려고 했던 건데, 너 정말 집사야? 그 아르크의 전진기지에서 헌터들을 지휘하는 집사 말이야.”

“그럼 어제 그것도 모르고 나와 그런 대화를 주고받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이미 알고 있었다고! 단지...단지 닥터가 젊은 집사가 자신을 찾아오는 날, 세상에 큰 혼란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말이야. 어제는 뭐...다른 걸 생각하느라...어쨌든! 이 이야기 어떻게 생각해? 딱 널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아?”

그가 바츠의 장난스런 비아냥에 잠깐 머쓱해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으며 목소리에 힘을 줘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말에 별다른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워낙 뜬금없기도 했지만, 너무도 억지스럽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 류의 말은 누구나 그리고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지난번 오데사 시티에서 프레디를 만났을 때도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녀도 헤르만이 자신에게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테니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었다고 했던 기억이 있었다. 물론 닥터의 발언과 비교하면 신뢰도에서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지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물음을 곱씹다보니 왠지 모를 석연찮은 구석을 느낄 수 있었다. 헤르만이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는 그 무게감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에게 물었다.

“닥터와 장로 로리나가 무슨 사이지? 둘이 특별한 관계라도 되나?”

“장로 로리나? 그녀가 누군데? 너희들에게 닥터 같은 사람인가?”

바츠의 물음에 에르네스트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완전히 처음 듣는 이름인 듯 보였다. 바츠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괜히 자신이 민감하게 굴었던 것 같았다. 차라리 나중에 닥터를 다시 만났을 때, 묻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냐, 됐어.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했군.”

“그래? 그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한 말도 바보 같다는 거야? 닥터가 분명 그랬다고. 이전과 다른 정말 큰 혼란이 될 거라고 말이야. 어쩌면 인류가 멸망하던 그날만큼 큰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했지.”

에르네스트가 심각하게 다시 말했지만 바츠는 실소를 참기 힘들었다. 어느 틈에 그 옆으로 다가간 패토스가 그의 어깨에 일어난 보풀들을 손으로 하나씩 하나씩 떼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로 보이는 회색 하늘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바츠의 눈에 그 모습이 익살스럽게 비쳐졌다. 바츠는 그에게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이미 그가 전해온 진중함에는 관심을 저버린 뒤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어제부터 뜬금없는 말들이 많은 것 같군. 원래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불쑥불쑥 꺼내놓는 편인가? 스톡홀름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다른 곳에 가게 되면 그러지 말라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뿐이니까. 널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바츠의 핀잔에 그가 어깨를 털어 패토스를 떼어내고는 말했다. 용케 방독면 안에 감춰진 바츠의 미소를 발견했는지, 발끈하며 소리쳤다.

“닥쳐! 너 따위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내가 어때서?”

“넌...넌 그냥 평범하잖아! 내가 본 진짜 헌터들은 너나 저 여자애처럼 가볍지 않다고. 그들은 온몸에 핏물을 뒤집어 쓴 것 같지! 시선부터 작은 손짓까지 그들에게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꼭 차가운 금속 같아! 너희들처럼 전혀 헤프지 않다고!”

바츠는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그에게서 아예 돌려버렸다. 시선을 아델리나가 사라진 수풀로 옮겨놓으며 말했다.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 재미있군. 하지만 그들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들도 결국 똑같거든. 어쩌면 너희들처럼 말이야. 내가 장담하지.”

에르네스트가 고개가 움직였을 만큼 흠칫 놀라며 말했다.

“오! 닥터도 너와 같은 말을 했어.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은 것뿐이라고 말이야. 다른 곳에서 그들의 눈물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지. 하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아. 그 괴물 같은 놈들이 눈물을 흘린다는 건 있을 수가 없어. 놈들은 살인을 서슴지 않고 하는 녀석들이니까 말이야. 절대 용납할 수 없어! 그런데 그 눈물을 볼 수 있는 게 바로 너 같은 집사라며? 정말 그들이 눈물을 흘리는 걸 본 적이 있어? 그들이 우는 걸 본 적이 있느냐고.”

바츠는 몇 마디 건네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변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만나본 헌터들의 인상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만남이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잦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중에서 눈물을 흘렸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웃는 경우만 몇 차례 있었을 뿐이었다. 무덤덤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눈물을 흘렸던 것은 오직 아델리나 뿐이었다. 바츠는 대답했다.

“그래. 그들은 내게 매일 찾아와서 자신들의 후회를 눈물로 내려놓지. 그들은 항상 후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

“멋진 대? 너 생각보다 멋진 일을 하는 것 같다. 꼭 아주 중요한 비밀을 너만 볼 수 있는 것 같잖아. 닥터는 내게 이런 말을 하고는 했어. 과거 그 날, 집사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 어떻게 생각해? 너도 그런 것 같아?”

에르네스트가 크게 기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역시도 조금 전 진지한 분위기는 잊고, 약간 들뜬 상태였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 닥터는 후회스럽다고 하던가? 그럼 내게 찾아와서 고백하라고 해. 내가 하는 일이 그것이니까 말이야.”

바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그에게 가볍게 던지듯 물었다. 그만 대화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아델리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이쪽을 향해 돌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가 달아오른 흥분을 급격히 짓누르고는, 다시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기는 해. 그는 그때 이야기를 하고나면 항상 울고 말거든. 물론 그가 정말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야. 알고 있다시피 그는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야. 하지만 알 수 있어. 느껴져. 그가 그때를 얼마나 슬픈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지 말이야.”

“슬픈 기억인데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그것 참 재미있군.”

바츠는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 그가 알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안다고 해도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바츠의 대답을 듣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돌아오는 아델리나에게로 시선을 옮겼을 뿐이었다. 바츠는 그것 역시도 닥터에게 직접 듣기 위해 잠시 미뤄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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