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13화 (213/268)

<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13화 *

창백한 하늘 아래에 놓여 있는 커다란 도시는 조용했다. 숨죽이고 움츠린 채,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지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도시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바츠의 눈에만 매우 낯설게 보일 뿐이었다.

바츠는 에르네스트가 가리킨 도시로부터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꼈다. 힘을 잃은 도시가 몸을 둥글게 말아 앉아서는, 머리를 파묻은 무릎사이로 이쪽을 음흉하게 훔쳐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버려진 아이처럼 보였다. 많은 도시를 봐왔지만 지금처럼 주저하는 마음이 드는 경우는 없었다.

“저 철로가 도시를 가로지르는데, 그것을 따라 계속 남쪽으로 가면 돼. 그럼 이틀 정도 뒤에는 여기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도시를 보게 될 거야.”

에르네스트가 걸음을 멈추며, 왼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에는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철길이 도시를 향해 쭉 이어져 있었다. 그때 보았던 곳부터 이곳까지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바츠는 그 철길이 도시 안으로 뻗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함께 가지 않는 건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아니었어?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야. 처음부터 너희들을 이곳으로 안내하는 일이었다고.”

아델리나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아직도 화 난 거야?”

“그런 것 아니야.”

“에이, 아직도 화났네. 되게 웃긴다 너. 네가 먼저 놀렸잖아!”

아델리나가 그를 향해 닦아세우듯 소리쳤다. 아직 그에 대한 분이 다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꽤나 시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억울함과 더불어 황당한 기색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만큼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역전된 상황을 쉽게 놓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가 발끈할수록 그녀의 즐거움은 더욱더 커졌다.

“닥쳐! 그런 것 아니라고!”

“그럼 뭔데? 그럼 무엇 때문에 함께 안 갈려고 하는 건데?”

“말했잖아! 원래 이곳까지만 함께 하기로 했던 거라고! 같이 있었으면서 못 들은 거야? 정말 한심하군!”

바츠는 둘이 또 다시 다투기 전에 서둘러 말려 세워야만 했다. 아델리나에게 삼가도록 말하고는 에르네스트에게도 진정하라며 다독였다. 언성이 높아지는 것을 보니 괜히 불안했다. 물론 둘이 심각하게 다투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것이었다면 일어나도 벌써 일어났을 일이었다. 하지만 둘은 비록 한쪽이 일방적으로 입을 닫으며 거리를 두었던 것이기는 했지만,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를 조롱하는 아델리나의 눈빛에 처음에 묻어나던 그 분노가 언젠가부터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둘은 더 이상 싸울 의도가 없었다. 오히려 이제는 에르네스트가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당해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진심은 바츠와 아델리나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때 드러났다. 그가 뒤에서 급히 불러왔다.

“잠깐! 그 녀석은 어디에 두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녀석 돌연변이잖아. 등에 뭔가가 있지? 브르노는 녀석들의 관할도시라고. 녀석들이 어떤 놈들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주민 대부분도 그들 추종자라고. 바보만 있는 것이 아니라면 금방 들통 나고 말 걸? 그럼 곤란해지고 말 거라고.”

바츠는 그의 말에 패토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은 상의 등 부분이 마치 꼽추처럼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게다가 거대한 체구는 누가 봐도 다른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탁월했다.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시간 문제였다.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의 말대로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아델리나가 말했다.

“그럼 네가 맡아줘.”

“뭐라고?”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네가 맡아달라고. 그 정도도 못해주는 거야? 어차피 스톡홀름으로 돌아갈 거잖아.”

“그렇기는 한데, 그게...”

“됐네! 바츠, 엘이 패토스를 맡아줄 거야.”

아델리나는 그에게 패토스를 거의 떠넘기다시피 맡겼다. 그가 마땅한 변명을 찾기도 전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가 애써 핑계를 찾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델리나의 독단에 당황하면서도 불만스런 기색을 보였지만, 별다른 반발을 하지는 않았다. 패토스에게 그와 함께 남으라고 납득시키는 것이 더 어려웠을 정도였다. 패토스는 아델리나가 자신을 떼어놓고 가려는 것을 용케 눈치 채고는 득달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아델리나를 고래고래 불러댔다. 그런 그를 진정시키고 얌전하게 만드는 데에 한참을 소요해야 했다.

“...조심해라.”

에르네스트가 패토스를 두고 가는 바츠와 아델리나에게 말했다. 잔뜩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쑥스러운지 괜히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딴청을 피웠지만, 그의 진심을 느끼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바츠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델리나만 대답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녀가 장난스러우면서도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야, 기분 나쁘게. 꼭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것 같네.”

“아니, 그런 것 절대 아니야. 오해하지 마라. 미안하다...”

에르네스트가 여전히 시선은 주지 못한 채, 풀이 죽은 얼굴로 바닥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쓸쓸한 목소리였다.

“네게 힘들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어. 그냥...그냥 널 보니까 한 사람이 떠올나서, 나도 모르게 그랬던 것 같아. 정말 미안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청승맞게 영원히 헤어지는 것처럼 굴지 말고.”

아델리나가 거쿨진 사람처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나무라듯 말했다. 조금 쌀쌀맞게 보였지만, 내심 그를 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에르네스트가 죄 지은 사람처럼 눈치를 살피듯 슬그머니 시선을 옮겨왔다. 아델리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고마워하는 마음이 서려있었다. 그녀의 활기찬 목소리가 위로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아델리나가 자신의 눈가에 희소를 걸어 보여주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을 만큼 넋 놓게 만들 정도의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바츠는 그 사이 먼저 걸음을 뗐다. 아델리나가 놓치지 않도록 서두르지 않고 느린 발걸음이었다. 그러자 아델리나가 얼른 달려와 팔짱을 껴오며 물었다.

“바츠, 나중에...정말 나중에 스톡홀름에 가서 살지 않을래?”

찰싹 달라붙어서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애틋함에 젖어있었다.

“우리 어차피 아르크로 돌아가지 못할 것 아니야. 그때 스톡홀름에 가서 살자. 꼭 스톡홀름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스톡홀름처럼 햇살도 들고, 파란 하늘이 보이는 곳 찾아가서 살자. 어때? 그렇게 할래?”

바츠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알고 있었지?”

“뭘? 엘이 나한테 못되게 군거? 당연히 알고 있었지. 나한테 소리치기 시작한 것이, 환타의 집에서부터였잖아? 내 얼굴을 직접 보게 된 날 말이야. 난 엘이 정말로 날 싫어하는 줄 알았어. 내 얼굴이 예쁘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진짜 나를 혐오스럽게 바라보기도 했고. 그런데 가만 보니까, 나한테 소리칠 때마다 시선이 묘하게 슬픈 거야. 꼭 원망스러운 것은 아닌데, 원망스러운 그런 것처럼 말이야. 말이 좀 어렵지? 누군가에게 너무 미안해서 자기 자신이 미워지면 나오는 행동을 말하는 거야. 엘이 딱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어. 왜 나한테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어. 아마 그 브루드 메어라는 사람과 관계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어쨌든 그때 알았어. 무슨 이유가 있구나 하고 말이야. 그래서 그냥 적당히 반응해주었던 거야. 날 싫어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말이야. 며칠 전에 엘이 나 때문에 토라져서 입을 닫았잖아, 그때 확신했어.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엘에게 말로만 그러지 말라고 그랬던 거잖아. 그렇지? 엘과 그 사람이 무슨 관계일까?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기에 나한테 그랬던 걸까?”

바츠는 그녀가 시선을 정면으로 옮기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드는 것을 그냥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녀가 말한 것처럼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추측만 해볼 뿐이었다. 그에게 뭔가 애처로운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 괜찮겠지?”

아델리나가 다시 바츠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짙은 회색빛 하늘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뭐가?”

“여기는 뭔가 음침하게 느껴져. 이곳 하늘만 유독 더 어둡고 침침하게 말이야. 너는 안 그래?”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우리 함께 있잖아. 그리고 에르네스트와 패토스가 기다리고 있어. 별 일 없이 돌아와, 둘과 함께 스톡홀름으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닥터에게 진실을 듣고, 전진기지로 가게 되겠지.”

바츠는 불안해하는 그녀를 위해 최대한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녀가 다시 활기를 되찾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 회색빛으로 물들며 물었다.

“그렇지? 그런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그 여자와 함께 아르크를 상대로 싸우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까? 모두가 좋아지겠지? 너에게 못되게 군 사람들은 혼이 날 테고, 우리가 겪었던 조롱은 더 이상 아무도 받지 않게 되겠지?”

“물론이야.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거잖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아델리나가 이제야 다시 웃었다. 방독면 렌즈 밖으로 흘러나오는 그녀의 시선에 미소가 묻어났다. 바츠는 그녀의 눈빛을 가슴에 차곡차곡 쌓으며 도시로 접어들었다. 안쪽으로 계속해서 이어진 철길이 잡아끌 듯 안내하고 있었다. 그 뒤를 쫓아 가로지르자, 머지않아 도시의 번화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여느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낡고 헤진 옷감들을 여러 번 기워 만든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그들 대부분의 표정이 다른 곳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밝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앞을 지나는 바츠와 아델리나를 향해, 미소를 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환영해주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 가장 낯설고도 놀라운 반응이었다. 조금 어려워하는 기색은 느낄 수 있어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그들의 몸에 크고 작은 십자가 모양의 액세서리나 문신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바츠와 아델리나를 향해 숙인 고개를 다시 들 때면, 항상 그 십자가에 한 번씩 키스를 하고는 했다. 심지어 저쪽에 지나가는 칼맨의 빅도그에도 그 십자가 모양이 수놓인 천이 덮여있었다. 마치 아이기스처럼 정체성을 알리기 위한 상징 같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눈에 익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헌터분들이 아니십니까. 브르노를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바츠는 그들이 일리디우스 일행과 똑 닮은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통해, 엑소시스트들이라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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