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14화 *
“이곳을 방문한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면 실례가 되겠습니까?”
그가 얼굴 가득 미소를 그린 채 물었다.
“우리가 시시콜콜 설명을 해야 할 이유가 있나?”
바츠는 퉁명스런 말투로 되물었고,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허리춤에 고정해놓은 방독면을 만지작거렸다.
“물론 그럴 필요는 없으시죠. 가끔 주민들이 아이기스에게 변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도시 안에는 감염도 없고 정화 대상도 없죠. 그런데도 이렇게 헌터 두 분이 함께 오셨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의미니까요. 어딘가에 헤러티커가 서넛이라도 목격이 된 건가요?”
바츠는 그의 보라색 허리띠를 흘깃 훔쳐보고는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다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일리디우스 뒤에 서 있던 두 사람과 영락없이 같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심지어 복장은 물론 남녀 각각 한 명씩으로 조직된 것까지 같아 기분이 묘했다. 바츠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크로스 시티로 가기 위해 지나는 길이다.”
그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오, 이런 정말 잘 됐군요. 저희도 곧 그리로 향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내일 출발할 예정이었죠. 저희와 함께 가도록 하시죠. 두 분이서 가는 것보다 더 빠른 길로 가게 될 겁니다.”
“이미 길은 알고 있어. 호의는 고맙지만, 우린 지금 당장 가야 해.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거든.”
“어차피 멀리 못가서 어두워지고 말 겁니다. 그럴 바에는 오늘 여기서 저희에게 근사한 식사 대접을 받으시고, 함께 떠나는 것이 낫죠. 고작 몇 시간 서두르려다가 괜한 고생만 하게 될 겁니다. 지상의 밤은 차가운 긴장감으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따뜻한 음식과 편한 잠자리를 누리고, 내일 일찍 출발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겁니다.”
바츠는 고개를 슬쩍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늘 어두침침한 하늘이지만 밤이 가까웠다는 것을 아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길어야 두어 시간이면 어둠이 내릴 것 같았다. 그럼 또 다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신경을 곤두세우고 밤을 보내게 될 것이다. 아델리나를 생각해서라도 오랜만에 푹신한 이부자리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나을 듯 했다. 요 며칠 동안 그녀와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밀레스입니다. 가시죠. 이쪽입니다. 깨끗한 식수도 드실 수 있습니다.”
바츠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는, 한쪽으로 비켜서며 뒤쪽으로 보이는 한 건물로 안내하기 위한 손짓을 취했다. 매우 정중한 태도였다. 바츠는 그의 호의를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안내에 따랐고, 그는 바츠의 걸음에 맞춰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아델리나는 한발 뒤에서 쫓았고, 다른 두 사람은 그보다도 더 뒤에서 따라왔다.
“올리브기름을 바른 프레이 고기가 일품입니다. 알싸한 파슬리가 그 위에 뿌려지면 맛이 정말 그만이죠.”
밀레스가 안내한 곳은 퍼브(pub)였다. 크고 작은 테이블들이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절반 이상의 자리가 채워져 있었는데, 저쪽에는 이미 술에 취한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이 여급들을 희롱하며 떠드는 바람에 내부가 조금 산만했다. 밀레스는 자신의 수하에게 간단하게 음식들을 주문하라고 지시한 후, 바츠와 아델리나를 그들로부터 최대한 먼 자리로 데려갔다.
“이해하십시오. 저번에 자신의 아이를 성녀로 추대한 가족들입니다. 그보다 영광스러운 일은 없죠.”
“성녀? 그게 뭐지?”
바츠의 물음에 그가 바츠와 아델리나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도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저희들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성하께로 보내지는 여자 아이들입니다. 아무나 보내질 수는 없고, 오직 처녀들만 가능합니다. 순수한 영혼들이죠.”
“보내지면 어떻게 되지?”
“성하 곁에 머물며, 성하를 도와 신께 기도합니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염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죠. 평생을 헌신하게 됩니다. 성하께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할 때까지 말이죠. 매우 고귀한 일이죠.”
그의 얼굴에 어느새 자부심이 피어났다. 그는 그것이 정말로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때마침 음식을 주문하고 온 그의 수하가 종업원들과 맑은 물이 담긴 잔들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그 행위를 자랑스럽게 떠들며 계속해서 찬양했을 것만 같았다.
“순수(純水, pure water)입니다. 귀한 것이죠. 하지만 이곳에서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습니다. 데들리 크로스 일원이 된다면, 언제든지 손톱 20개만 내면 한 잔을 마실 수 있죠. 그 외에 사람들이라면 200개나 주고도 절반 밖에 마실 수 없습니다.”
그가 약속한 물은 호언한대로 정말로 깨끗했다. 전진기지나 여타 도시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맑은 물이었다. 아르크의 물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토록 투명한 물은 지상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심지어 사람의 머릿수대로 잔이 놓여졌다.
“부담 없이 드십시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더 드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는 드시지 마십시오. 그럼 정작 식사는 소홀하게 되고 말테니까요.”
바츠가 앞에 놓인 자신의 잔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자, 그가 만족스런 미소로 말하고는 자신의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보는 것만으로도 청량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바츠는 가슴이 터질 듯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자칫 환호성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방독면을 벗기 위해서 그런 가슴을 애써 짓눌러야 했다. 웃는 얼굴로 지켜보는 밀레스에게 깨끗한 물을 보고 설레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겨우 물을 마시게 되었을 때에는, 그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목을 타고 흘러내려가는 산뜻한 기분이 외마디 감탄사를 저도 모르게 내뱉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엄청난 상쾌함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아델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긴장한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시고는, 굶주린 사람처럼 남은 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을 마시고 난 그녀의 얼굴이 감동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밀레스는 그런 바츠와 아델리나에게 각각 두 잔씩이나 더 물을 대접했다. 바츠는 고민하지 않고 전부 마셨고, 뒤이어 주문한 음식인 빵과 스프 그리고 프레이 고기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가 음식을 대접하겠다며 자신만만하게 굴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지상에서 먹은 음식 중 최고의 것들이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쯤, 그가 물었다.
“그런데 크로스 시티로 가시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하를 만나 할 이야기가 있거든.”
바츠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대답했다. 뒤늦게 그런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만큼 순종적이었다.
“음...헌터 분들을 언제나 환영하지만, 그분을 쉽게 뵐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턱대고 오셔서 알현하겠다고 하신다고 뵐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가 고민스런 표정으로 대꾸했다. 조금 탐탁지 않은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이어진 바츠의 대답에 금방 표정이 변했다.
“그런가? 내가 헌터가 아니라 집사라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나?”
“오! 그게 사실입니까? 아! 그래서 이렇게 두 분이 함께 오셨던 것이군요! 이렇게 신부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그분과 고견을 교환하실 생각이시군요. 그럼 만나셔야죠. 먼 길을 오신 것 아니십니까? 저희가 꼭 직접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네오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심각한 얼굴을 했던 사람이 지금은 완전히 흥분해 있었다. 그의 두 눈이 마치 우상을 만난 것처럼 존경으로 가득했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물었다.
“이네오? 그가 누구지? 그가 성하인가?”
“아닙니다. 그 분은 이 도시의 수호자이십니다. 추기경이시지요.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크로스 시티에 가셨습니다. 이곳에 필요한 엑소시스트들을 직접 선별하시기 위해 가신 것이지요. 곧 돌아오실 때가 됐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계실 겁니다. 정말 놀랍군요. 집사라니...다시 한 번 영광입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츠를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의 두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감격을 주체하기 어려운 듯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장내로 한 여인이 다급하게 들어오더니, 입구에 서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바츠의 눈에 띄었다. 한 눈에도 매우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마구 흔들리는 눈으로 사람들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바츠가 앉은 자리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정확히는 밀레스에게로 다가온 것이었다.
“주교님!”
그녀는 황급히 달려와서는 밀레스를 향해 무릎으로 주저앉으며 외쳤다. 거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밀레스는 그런 그녀를 환한 얼굴로 맞이하며, 어깨를 잡아 얼른 일으켰다. 바츠를 만난 감동에 그녀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오, 필리아가 아닙니까? 신부님, 이쪽은 필리아입니다. 이번 집회에 아이를 성녀로 추대하신 분이시죠. 필리아, 인사하세요. 이쪽은 아르크에서 오신 신부님입니다.”
그녀는 밀레스가 바츠를 소개하는 것은 들은 채도 않고, 절망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주교님, 도와주세요! 큰일 났습니다!”
“필리아? 무슨 일입니까?”
그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이가! 애 아빠가 아이기스에게 납치당했습니다! 제 딸과 함께 말이에요!”
“이번 집회에 성녀로 추대될 기젤라를 말하는 겁니까?”
“네! 놈들이 애 아빠와 함께 기젤라를 데리고 갔어요!”
밀레스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두 눈에는 불꽃이 튀겼고, 양 볼은 꽉 문 어금니로 몇 번이나 움찔거렸다. 그가 대단히 분개하고 있었다.
“필리아, 납치당한 것이 맞습니까? 당신의 남편은 제정신이 아니었잖습니까? 세례조차 받지 않았죠.”
“네? 무슨 말씀이신지...설마? 아닙니다! 저희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주님을 믿고 섬기며, 성하를 따릅니다! 저희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분뿐입니다!”
밀레스가 무서운 목소리로 묻자, 필리아가 겁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으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자신의 손등에 새긴, 십자가 문신에 수차례 키스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밀레스의 허리춤에 매달리며 그의 보라색 허리띠에도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자 밀레스는 그녀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얼굴에 가득하던 노기를 천천히 거두며 물었다.
“좋아요. 당신의 믿음을 잘 보았습니다. 이제는 말해보세요. 그들이 어디로 갔습니까? 이네오 추기경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기젤라를 찾아와야 합니다. 기젤라가 순결을 잃지 않았길 기도하면서 말이죠. 그들이 어디로 갔죠?”
“서쪽이요! 서쪽에 있는 자유도시로 간다고 했어요!”
밀레스는 그녀의 얼굴에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을 자신의 허리띠로 닦아주고는, 바츠를 돌아보며 말했다.
“신부님, 당신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제가 가진 주님에 대한 믿음은 전혀 부족하지 않지만, 분명 기젤라를 납치해간 아이기스 일당 중에는 칼리에도 섞여 있을 겁니다. 그들을 제가 전부 감당하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당신이 함께 해주시면 제 믿음은 더욱더 공고해지고, 부족한 용기는 모두 채워지게 될 겁니다. 제게 당신과 함께 나란히 서서, 그들을 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바츠는 느닷없이 자신을 향해 간곡히 부탁하는 그를 난감하게 지켜보았다. 그 옆에 있던 수하들도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필리아도 뒤늦게 바츠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눈물 젖은 눈으로 애절하게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바츠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는 눈치였지만 애원하듯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다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로 요란스럽던 장내가 조용해지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마저도 어느덧 이쪽을 향하고 있는 바람에 바츠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불쾌한 적은 있어도, 이토록 부담스러운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에게 너무나 융숭한 대접을 받은 터라,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바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아델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체념한 듯한 짧은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말했다.
“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바츠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다시 밀레스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서두르도록 하지. 밤이 깊으면 이곳에 하루 머물게 된 것이 무의미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바츠의 대답을 들은 밀레스의 표정이 급속도로 환하게 변했다.
============================ 작품 후기 ============================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