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15화 (215/268)

<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15화 *

“물론입니다. 실망시켜드릴 수 없죠. 함께 가주시면 어렵지 않게 해결이 될 겁니다. 놈들이 어디에 있을지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다. 자유 도시로 간다는 것은 거짓말일 겁니다. 필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놈들은 아이는 칼맨에게 팔아버리고, 어른은 잡아먹거나 유흥거리로 쓰려고 할 겁니다. 북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비르케나우라는 작은 도시가 있죠. 틀림없이 그리로 갔을 겁니다.”

“그래?”

“확신합니다. 거기는 지상에서 가장 악랄한 도시거든요. 곳곳에서 모여든 온갖 모리배들로 가득해서, 성하께서도 어찌 손을 쓰기 힘들 정도입니다. 우리 엑소시스트들의 마지막 염원인 곳이죠. 그곳을 완전히 정화시키는 것이 말입니다. 벌써 수년 동안 여러 차례 걸쳐서 정화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엑소시스트 중 가장 강한 갈디노 추기경께서도 실패하셨죠. 20명이 넘는 엑소시스트들을 거느리고 가셨지만, 놈들의 거센 저항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3일 만에 돌아오셔야만 했습니다.”

바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 정도로 대단한 곳인데 고작 우리 다섯이서 어쩌려는 거지?”

밀레스가 천천히 걸음을 밖으로 옮기며 대답했다. 다들 그의 뒤를 따랐다.

“두 분께 그곳의 정화를 시도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옆에 함께 해주시며 힘이 되어달라고 부탁드린 겁니다. 그곳을 정화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민을 돌려받기 위해서 가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곳은 그곳만의 규칙만 지킨다면 누구라도 머물 수 있는 곳입니다.”

“그 규칙이 뭐지?”

“그곳을 방문하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죠. 그렇지 않으면 그곳을 방문한 모두의 응징에 곤욕을 치러야 할 겁니다.”

바츠는 그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델리나와 함께 그를 따라서 도시를 벗어났다. 날은 빠른 속도로 어두워졌고, 완전히 밤이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걸어야만 했다. 그의 호언이 이번에는 거짓이 되는 순간이었다. 겨우 밤을 피해서 버려진 폐가에 자리를 잡았을 때, 방독면을 벗는 그의 얼굴에 민망한 기색이 서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바츠가 원망을 꺼내놓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뜻하지 않은 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한 법입니다.”

바츠는 그의 뻔뻔함에 괘씸함을 느꼈다. 차라리 간절함을 내세웠더라면 불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만이 얼마나 발칙한지 모르는 듯 보였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그저 신세를 갚는 셈 치며 애써 개의치 않고 넘겼을 뿐이었다. 대신 몇 번이나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밀레스의 당부에도 기어이 따라온 필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도시 밖에서 어둠을 처음 만나는지, 꽤나 위축된 모습이었다. 구석에 양 무릎을 끌어안고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 매우 불안해 보였다. 가끔 주변을 맴도는 세찬 바람이 안쪽으로 달려들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거렸다. 밀레스가 바츠의 시선을 쫓아 그녀를 쳐다보았다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옆으로 옮겨오며 속삭였다.

“필리아의 남편은 전부터 조금 이상했습니다. 그는 세례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고는 했죠. 납치당한 것이 아니라, 놈들을 따라나선 것일지도 모릅니다.”

“무슨 소리지?”

바츠가 돌아보며 묻자, 그가 필리아를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훔쳐보고는 대답했다.

“그를 오래 전부터 지켜봤습니다. 이네오 추기경의 명이었습니다. 그가 수상쩍은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죠. 그리고 그가 전에 놈들과 몰래 접촉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칼리에 말입니다.”

“그래서 칼리에가 함께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건가?”

“그렇습니다. 분명 그가 기젤라를 데리고 놈들과 함께 달아난 것일 겁니다.”

“그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당신들을 추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달아나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닌가?”

“물론 세례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도시에 머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하와 주님은 매우 너그러우신 분들이죠.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성하와 주님을 부정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두 분을 부정한다면 이단일 뿐입니다. 그가 놈들과 접촉하며 그들을 따른다면 곧 두 분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건 용서 못할 죄악이죠.”

“재미있군. 그래서 그가 자신의 딸을 데려간 이유가 뭐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는 당신들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 것 같은데 말이야. 아이는 자신의 의지로 따라간 것이 아니라, 그가 강제로 데려갔다는 말이잖아. 그가 그렇게까지 아이를 데려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것도 부인만 남겨두고?”

바츠의 말투에 조금 빈정거림이 묻어났기 때문인지, 밀레스가 미묘한 눈으로 바츠를 빤히 바라본 뒤에 입을 열었다.

“...기젤라가 성하께 바쳐지면 우리의 기도는 더욱더 간절하게 됩니다. 순수한 영혼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는 점점 더 강해지죠. 주님께로 우리의 목소리가 훨씬 가깝게 전해지는 겁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더욱더 강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죠. 우리의 간절함에 주님께서 감동하시고 은총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은총은 우리를 좀 더 빠르고, 좀 더 강인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스스로 악의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는 것이죠. 놈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죠. 우리가 강해지는 것을 무서워하는 겁니다. 자신들을 정화하기 위한 우리들의 신념이 거대해지는 것에 공포심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해 그랬을 겁니다. 아이기스는 매우 영악한 놈들이죠. 놈들은 분명 제정신이 아닌 필리아의 남편을 포섭해서, 순수한 영혼이 성하 곁에 머물며 주님께로 간절함을 전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약해지길 바라는 것이죠.”

바츠는 그가 굳은 의지를 담아 말하는 이야기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가까운 곳에서 함께 듣고 있던 그의 수하들이 ‘아멘’이라며 읊조리는 것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다시 묻지 못했다. 그 ‘아멘’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정말 기분 나쁜 말이었다. 꼭 누군가를 현혹하기 위한 주문 같았다. 하지만 밀레스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 바츠와 나란히 앉아있던 아델리나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저쪽에 있던 필리아조차도 용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시선이 마구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것이 눈으로 보일 만큼 경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밀레스의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 그녀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이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이는 성하와 주님을 독실하게 믿습니다! 모두 기젤라 탓이죠! 그 아이가 그이를 꼬드긴 겁니다! 항상 그이에게 브르노를 떠나고 싶다고 말했어요! 성하가 무섭다고 말해왔죠! 모두 그 아이 때문입니다! 그 앙큼한 계집이 그이를 유혹한 것이에요!”

바츠는 어둠에게 짓눌렸지만, 필사적으로 외치는 그녀의 모습에서 억울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물었다.

“기젤라는 당신의 딸이 아닌가? 친딸이 아닌 건가?”

“친딸입니다! 내가 배 아파 난 아이에요! 하지만 그 계집이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도 사실이죠! 그이가 정신 나간 것이 아니에요! 부모는 아이에게 한없이 약하죠! 그래서 그이가 그렇게 보인 겁니다! 하지만 난 강해요!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분명히 알죠! 그이가 도시를 떠나려고 할 이유가 없어요! 더군다나 아이기스와 접촉하다니요! 그이의 마음속에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제게 항상 그렇게 말했다고요! 분명 이번에도 기젤라가 고집을 부리는 걸 그이가 달래기 위해서 도시 외곽에 간 걸 겁니다! 아이가 제정신을 차리도록 위로한 것이죠! 그러다가 화를 당한 거예요! 틀림없어요!”

바츠는 자신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는 그녀에게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처절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눈길이 가는 것은 바로 옆에 앉아있던 아델리나였다. 방독면 렌즈를 빠져나와 필리아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복잡한 마음에 젖어있었다. 마치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의심되고 있는 듯한 눈초리였다. 바츠는 그녀가 걱정되었지만, 애써 마음을 차분하게 다잡으며 필리아에게로 물었다.

“그럼 당신은 그 정신 나간 아이를 성녀로 보내려고 한 건가? 당신들 말대로라면 성녀는 꽤나 중요한 역할인 것 같은데, 그런 아이를 보내도 되는 건가?”

“그분 곁에 있으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성하께서 아이를 치유해주실 거라고 믿었다고요...그분은 자애로우신 분이니까요...”

필리아가 방금 전까지 끓어올랐던 감정을 일순간에 누그러뜨리며 대답했다. 깊은 회한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바츠가 이해할 수 없는 회한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밀레스는 그녀를 충분히 이해하는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거들었다.

“틀림없습니다. 그분 곁에 있으면 모두가 경건해지고 올바르게 되죠. 그분께로 보내졌다면 기젤라는 분명 훌륭한 성녀가 되어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만들어주었을 겁니다. 길 잃은 어린 영혼의 믿음은 그 어떤 믿음보다도 강력하죠. 그들이 그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고, 성하의 뜻입니다. 아무래도 그 전에 사달이 난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주님의 뜻일 겁니다.”

밀레스는 필리아에게 믿음을 의심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위로처럼 따로 건네기까지 했다. 그녀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을 만큼 진중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의 진심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서럽게 울었다. 가족이 곤경에 처하게 된 사실이 믿기 힘든 것 같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남편으로 보였다. 밀레스의 수하들이 그런 그녀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여 주기도 했다. 바츠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은 오직 ‘아멘’뿐이었다.

“아무래도 좋아. 다들 아이와 남편이 무사하길 바라자고.”

바츠는 그 모습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굳이 의구심을 키우지 않고 흘려보내듯 넘겨버렸다. 자신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지상에서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늘 그랬다. 지상은 온통 낯선 것들로 가득했고, 그 중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저 받아드려야만 했을 뿐이었다. 이들은 그 불확실함 중 하나였다. 어떤 것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들의 삶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마음이 강했다. 자신은 그저 목표한 바를 따라 나아가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들은 그 과정에 불과했다. 그러자 밀레스가 굳은 얼굴로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기젤라가 아직까지 순결하길 바라야죠.”

그의 관심사는 오직 기젤라인 것 같았다. 필리아의 부탁으로 그녀의 남편과 아이를 구하러 가고 있다는 것이 무색할 만큼 편협했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그녀의 가족이 아닌, 기젤라를 위해 나선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바츠는 절로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어찌되었든 둘 모두 누군가의 걱정을 사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이들의 모습이 우스웠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까지 우스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곳까지는 그로부터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더 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하룻밤을 편하게 보내보겠다는 욕심이 이렇게 괜한 고생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그냥 계속해서 가야만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델리나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도시는 그 미안함 마음을 잊게 했을 만큼 매우 인상적이었다. 입구에 걸린 팻말부터 시선을 단숨에 잡아끌었다.

‘일하면 자유로워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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