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16화 *
도시는 일리트시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을 만큼 작았다. 건물들과 거리의 사람들만 아니었다면 반대쪽 끝을 입구에서 눈으로 볼 수 있을 것만 같을 정도였다. 도시라고 불러야 하는지조차 의문이었다. 마을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딱 적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바츠는 그 이유를 누가 따로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마을 크기의 도시가 대단히 많은 수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수가 적어도 수백 명이었다. 여타 다른 큰 도시의 번화가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훨씬 더 소란스러웠다. 헤러티커에 대한 걱정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서 말을 해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만큼의 엄청난 소음에 오히려 헤러티커가 질겁하고 달아날 것만 같았다. 매우 놀라운 광경이었다. 건물 사이사이로 지나는 도로에, 그런 사람들이 제각각 다양한 차림새를 하고는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은 한 눈에도 세상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이라고, 풍기는 냄새와 분위기를 통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최소 하나 정도는 소지하고 있는 무기들 때문에 더욱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무장을 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 정도였다. 방독면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건물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건물들 거의 대부분이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새를 하고는, 줄 맞춰 선 군인들처럼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다. 마치 정교하게 훈련된 하나의 군대를 보는 듯 했다. 사람들은 그 건물들을 돌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밀레스가 바츠와 일행들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따라 안쪽으로 안내하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아마도 지상에서 가장 큰 노예 시장일 겁니다. 방문객들보다 노예가 더 많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죠.”
바츠는 그의 말을 듣고 나자,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사이로,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양 발목에 채워진 족쇄에 보폭과 거의 일치할 정도 길이의 쇠사슬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는 크고 작은 짐을 나르거나 주변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꼭 그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들을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각각의 건물 앞에 그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상점의 물건들처럼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발가벗겨진 채, 한쪽 벽을 허문 건물의 무대 위에서 자판의 과일들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들이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오직 발목에 채워진 족쇄와 쇠사슬뿐이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주위에 사람들은 전부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것이었다. 특히 건강한 어린 아이들이 진열된 건물 앞에는, 다른 곳에 비해 배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무대 위에 유일하게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선, 한 사람을 향해 다양한 숫자들을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진열된 노예의 번호와 가격으로 보였다.
“키예프 시티보다도 많은 세력들이 모여 있을 겁니다. 건물을 누가 많이 소유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 영향력을 알 수 있죠. 저 문장이 이곳에서 가장 힘이 센 무리입니다.”
밀레스가 건강하고 깨끗한 아이들이 진열된 한 건물을 가리켰다. 그 건물의 옆면에 데들리 크로스의 상징인 십자가와 닮은 문장 하나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붉은 테두리에 검은 색 염료를 사용해 그려져 있었는데, 십자가를 옆으로 조금 돌린 뒤 각 끝을 약간씩 구부려 놓은 모양이었다. 적어도 주변 10여동 이상의 건물에 그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밀레스가 그 문장을 바라보며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꽤 골치 아픈 일입니다. 성하께서도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시죠. 보시다시피 사람들이 자칫 우리와 혼동을 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까? 저들은 인신매매를 주도하는 무리이죠. 우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가끔 저들과 혼동하고는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하루 빨리 지상 전체가 정화되어야 할 텐데...”
바츠는 그의 말을 애써 무시했다. 그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푸념에 가까운 한탄이 아닌,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지을 수 있는 확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필리아의 가족들은 어디에 있다는 거지?”
바츠의 물음에 밀레스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뭔가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닌, 뜻밖의 상황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바츠는 그런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설마 잊은 것은 아니겠지? 내게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더 이상 내가 실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제가 큰 무례를 저지르고 있었군요.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그제야 눈빛을 평소대로 돌리고는 대답했다. 유감스러움에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서 약간의 섭섭함을 느꼈지만, 모른 척 무시해버렸다. 그가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기 위해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그는 바츠와 아델리나에게 차례로 사과를 하고는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주변 노예상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 그들에 대한 수소문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부분 그의 방문을 못마땅한 얼굴로 꺼렸지만 그가 주머니에서 손톱 몇 개를 꺼내 공짜로 건네기만 하면, 금방 경계심을 풀고는 친절하게 돌변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렇게 물어물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자, 북쪽 외곽에 위치한 독특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 어디에서도 듣거나 본 적이 없는 특별한 곳이었다. 바츠의 눈에는 만약 헤러티커의 둥지가 어딘가에 있다면, 바로 이곳과 같을 것처럼 보였다. 세상 모든 괴물들이 한 데 모여 있는 것만 같았다.
수십 개에 이르는 성인 가슴 높이의 원형 철장과 그 안에서 사활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처절한 비명소리와 악에 바친 고함소리,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는 사람들까지,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철장 주위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미친 것만 같았다. 그 안에서 벌거벗은 채 싸우고 있는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을 지켜보며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들은 맨손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향해 열광하고 있었다.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것을 보니 전부 노예들로 보였다. 그들은 노예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노예들은 건장한 사내들부터 여인들까지 다양했다. 심지어 아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상대들은 항상 공정하지만은 않았다. 대부분 신체조건까지 꼼꼼히 따져서, 사내는 사내와 여인은 여인과 아이는 아이와 싸우도록 만들고 있었지만, 중간 중간마다 사내 한 사람과 3명의 뚱뚱한 여인 혹은 마른 여인과 2명의 사내 아이 그리고 뚱뚱한 사내와 5명의 여자 아이처럼 매우 잔인한 상황도 즐비해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철장에 문신처럼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들의 것으로 보이는 살점들이 여기저기에 눌어붙어 있고, 바닥은 그들의 것으로 보이는 검고 붉은 혈흔으로 가득했다. 사투가 끝나고 빈 철장에, 그 처절함이 계속해서 맴돌 만큼 진했다. 그리고 그 처절함은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붙잡아두고 있었다. 그들은 매 시합이 끝날 때마다 다음 시합을 요구하는 외침을 질러대고는 했다. 하지만 철장 안에서 싸우는 것은 꼭 사람만이 아니었다. 꽤 드물기는 했지만 일부에서는 개들이 싸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개들이 동물이 아닌 기계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빅도그와 닮아있었지만 그보다는 훨씬 작고 빠르며 위협적이었다. 사람도 충분히 해칠 수 있을 만큼의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밀레스는 그 철장 주위를 유심히 살피다가 한 사내에게로 접근했다. 상의 끝자락에 녹색 케찰이 그려진 사내였다.
“조용히 따라오는 것이 좋을 거야.”
“여기서 난동을 부리면 오히려 그쪽이 더 곤란할 텐데?”
그는 밀레스가 어깨를 잡아채자 처음에는 헤러티커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내 금방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대꾸했다. 가볍게 느껴질 만큼 여유가 묻어나는 태도였다. 하지만 밀레스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더 무섭게 닦아세웠다. 양손으로 그의 볼을 감싸 쥐고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그의 눈을 뽑아낼 기세였다.
“영원히 장님이 되고 싶은 건가? 네 놈의 눈을 뽑는 정도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군. 어떻게 생각하나?”
“죄,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여기서 구경하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흥이 올라오는 걸 말입니다. 제가 그 흥에 정신이 나갔던 모양입니다.”
그의 태도는 오랜 고민도 없이 곧바로 공손하게 변했다. 밀레스의 손길에 이끌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따라나서기까지 했다. 밀레스는 그를 도시에서 조금 벗어난,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그를 더욱더 압박하며 따져 물었고, 그는 자신의 일행들이 있는 곳을 순순히 알려주었다.
“그자들이라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납치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를 따라가겠다며 나선 것뿐이죠. 참말입니다.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문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시면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그들을 팔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지나는 길이었을 뿐입니다. 우린 서울로 가는 길이었죠.”
“거짓말쟁이!”
그의 대답에 가장 크게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필리아였다. 그녀는 뒤에서 지켜보다가 그에게로 달려들어 멱살을 붙들었다. 그의 대답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이가 그럴 리가 없어! 그이가 나를 버리고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다고! 그이는 독실한 주님의 종이야!”
그녀는 밀레스의 수하들이 강제로 떼어놓지 않았다면 그의 귀라도 물어뜯을 기세였다. 진심으로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밀레스의 수하들에 의해서 다시 뒤쪽으로 끌려오는 동안에도 그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쉽게 진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음흉한 시선을 보내오는 밀레스와는 대조적이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군요.”
그는 만족스러움이 묻어나는 흐뭇한 목소리로 바츠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생각이 사실로 밝혀지자, 꽤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는 바츠는 물론이고 자신의 수하들에게까지 기젤라는 구하고 나머지는 정화한다고 뜻을 공표했다. 필리아가 악에 바친 목소리로 끝까지 자신의 남편을 변호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잡아온 사내를 앞세워, 그의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바츠는 아델리나와 그 뒤를 따랐고, 머지않아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낡은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안에는 10여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한쪽에 여자아이와 꼭 붙어있는 한 사내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밀레스를 필두로 바츠 일행이 입구로 들어오자, 크게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동시에 굳어졌다. 밀레스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심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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