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18화 *
바츠는 문득 머릿속에 만약 칼바람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형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났다. 그 모습을 쉽사리 그릴 수가 없었다. 그건 아마도 단 한 번도 듣거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고, 그로 인해 그 어떤 추측에도 확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 모습을 그려보자면, 지금의 이네오를 닮아있을 것 같았다. 그가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칼리에들을 향해 오히려 몸을 던져 넣는 모습이, 갑자기 차오른 물안개로 파고드는 바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이내 주변을 가득 채운 물안개를 사방으로 붉게 흩뿌리며 마구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그가 휘두른 톤파가 그들에게 악몽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뱉는 악에 바친 기합소리가 한순간에 끔찍한 비명으로 변해갔다. 다른 4명의 엑소시스트들은 옆에서 거들며 그를 도왔다. 그들은 이네오가 칼리에를 마음껏 유린할 수 있도록 노련하게 보좌했는데, 매우 수준 높은 훈련을 통해 얻어진 정교하고 숙련된 움직임이었다. 이네오에게 생기는 사각을 그들이 먼저 선점하며, 혹시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그들의 보좌가 없더라도 이들을 모두 제압하는 데는 무리가 없어보였다. 다소 번거로운 일이 더해질 뿐이었다. 그는 그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그들의 보좌는 그가 보다 쉽고 완벽해질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그들의 비호 속에서 이네오는 마음 놓고 칼리에를 침략했다.
“어린 양들이 가여운 것은 무모함을 용기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밀레스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그는 방금 전까지도 칼리에에게 방독면 렌즈에 입김이 서렸을 만큼 몰아세워졌던 사실을 잊은 모양이었다. 아직까지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그들의 안쓰러운 모습을 기분 좋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말에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네오의 움직임은 그가 의기양양할 수 있도록 만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상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바츠와 밀레스를 상대하며 처음보다 수가 조금 줄어있었지만, 그 차이는 눈으로 봐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바츠와 밀레스 일행이 맞선다기보다는 견딘다는 말이 더 어울렸을 만큼, 힘겹게 싸웠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오히려 그가 십 수 명의 칼리에들을 포위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들은 서너 명을 제외한 모두가 완전히 무력하게 변해버렸다. 대부분 그대로 방치해두면 곧 숨이 끊어지게 될 것 같을 만큼 위태로운 상태였다. 남은 서넛도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고만 있을 뿐,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머리 한쪽이 깨지거나 얼굴이 부서진 채로, 치사량의 혈액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네오는 그들에게 차례로 다가가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그들의 이마를 자신의 톤파로 하나씩 하나씩 내리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가 만들어내는 둔탁한 화음은 겨우 남아있던 그들의 마지막 신음까지도 완전히 앗아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옷자락에 피에 젖은 자신의 톤파를 닦아냈는데, 그의 옷이 붉은 이유가 마치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착각이 들만큼 소름끼치는 모습이었다.
“서둘러 달려온 보람이 있군요.”
이네오가 바츠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수하들이 쓰러진 칼리에들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살피는 사이, 무기를 집어넣고는 바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방금까지 격렬하게 움직이던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한 분위기였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정갈한 태도로 바츠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인사를 건넸다.
“각하, 어떻게 된 겁니까? 어찌 알고 이곳까지 출수하신 겁니까?”
옆에 있던 밀레스가 바츠를 대신해서 그를 맞아주었다. 그는 아직 감격의 여운이 남았는지, 한껏 들뜬 목소리였다.
“검은 목자께서 우리를 이쪽으로 인도해주셨네. 그분의 확고한 목소리가 자네와 여기 있는 또 다른 검은 목자를 구할 수 있도록 내게 계시를 전한 것이지. 그분의 하해와 같은 선견에 감복할 다름이네.”
바츠는 그의 대답에 약간의 궁금증이 생기며 조바심을 느꼈지만, 밀레스가 아무런 의심 없이 그의 말을 쉽게 받아드리는 모습을 보고, 말을 그냥 삼켜야만 했다. 심지어 밀레스의 수하들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이해하며 작은 목소리로 ‘아멘’을 외쳤을 뿐이었다. 바츠는 애써 태연한 척, 시선을 그의 어깨너머로 옮겨야만 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아직 숨이 붙어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칼리에들의 숨통을 마저 끊고 있는 이네오의 수하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이미 의식조차 없는 그들의 머리를 톤파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이들에게서 자애로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다. 정말 지난번에도 느꼈던 것처럼 또 다른 헌터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그 중 두 사람은 아직 일이 서툰지 몇 번이나 머뭇거리는 바람에, 다른 두 사람에게 자꾸만 꾸지람을 듣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엑소시스트가 된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의 어리숙한 모습은 더욱더 헌터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결국 저들도 나중에는 다른 엑소시스트들과 똑같아 질 것이라는 생각하면 벌써부터 괜히 마음이 착잡했다. 이네오가 그런 바츠의 시선을 발견하고는 함께 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격은 부여받았지만 아직 믿음이 부족한 자들입니다. 성하께서 직접 제게 저들에게 주님의 뜻을 가르치라는 명을 내리셨죠. 전 확신합니다. 저들에게 믿음이 있다면 곧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걸 말이죠. 세상에 정화가 필요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츠는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아델리나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돌아오는 동안 밀레스가 이네오에게 그간의 일들을 설명하고 바츠를 정식으로 소개했고, 이네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는 그 어떤 궁금증도 생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츠가 그의 모든 것을 미심쩍게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그냥 믿는 눈치였다. 마치 이미 다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연한 모습은 밀레스를 더욱더 감복시켰다. 그는 이네오가 웃는 것으로 보이는 눈빛을 보내며 짧게 대답할 때마다 놀라움에 젖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꼭 이네오가 자신이 말한 사실들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네오의 태도에 매우 만족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당연한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바츠로서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이네오에게 바라는 밀레스의 기대가 너무도 엄청난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의 기대보다도, 그 기대를 담담하게 받아드리는 이네오의 태도였다. 그는 그런 태도를 통해 신비감을 만들어내며, 알 수 없는 신뢰를 전하고 있었다. 바츠가 지금까지 봐온 사람 중 가장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는 여유와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자신의 강력한 무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불안하게 흔들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돌아왔을 때까지도 변함없이 단단함을 유지했다. 다만 기다리고 있던 아델리나가 너무도 놀라운 광경을 펼쳐놓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결코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델리나!”
바츠는 그녀가 손에 쥔 카니지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녀의 카니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런 카니지를 들고는 시체처럼 굳어진 자세로 딱딱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밑에는 필리아가 목이 잘린 채 쓰러져 있었고, 기젤라는 이미 바츠에게 숨을 거둔 자신의 아버지 곁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밀레스와 다른 엑소시스트들도 바츠만큼 놀랐는지, 심각함이 묻어나는 의아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오직 이네오만이 여유 있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약간 흥에 젖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흥미롭군요.”
바츠는 그런 그를 뒤로한 채, 그녀에게로 달려가야 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울고 있는 기젤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츠가 몇 번이나 이름을 부르고 난 뒤에야 초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필리아는 미친 여자였어...”
“아델리나! 무슨 소리야?”
“이 여자는 정신이 나가서 자신의 아이를 짐승에게 바치려고 하고 있었던 거라고!”
아델리나가 갑자기 흥분하며 소리쳤다. 뭔가 대단히 분한 눈빛이었다. 뒤에서 밀레스의 목소리가 무게감 있게 날아들었다.
“설마 그 짐승이 성하를 칭하는 것입니까? 그게 맞다면 말씀을 삼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성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 어떤 영광보다도 고귀한 일입니다.”
“닥쳐! 그 짐승에게 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를 갖다 바쳤지? 아이들을 얼마나 많이 희생시킨 거냐고!”
아델리나가 눈을 번뜩이며 그를 향해 소리쳤다. 바츠는 그녀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아델리나!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냐고!”
“기젤라가 그랬어! 그에게 가게 되면 노리개가 되고 만다고! 그에게 가면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짐승의 변태 욕을 해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아무리 헌터분이라도 성하를 모욕하고 주님을 부정하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밀레스가 다시 한 번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번에는 약간 경고성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하지만 아델리나는 너무 흥분해서 느끼지 못하는지, 더욱더 화를 내며 소리쳤다.
“닥치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바츠, 정말이야! 그 놈에게 보내지면 놈에게 비참하게 유린당하고는 죽임을 당한다고! 기젤라의 언니가 그렇게 해서 이미 죽었대!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 죽음뿐이라고! 그는 성스럽거나 고귀한 자가 아니야! 그저 성욕에 굶주린 변태성욕자일 뿐이라고! 난 기젤라에게 다 들었어!”
“이단이다!”
“이단자!”
밀레스를 비롯한 엑소시스트들이 아델리나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적의로 가득한 무서운 목소리였다. 이네오만이 유일하게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츠는 그런 이네오를 슬쩍 훔쳐본 뒤에, 밀레스와 엑소시스트들을 향해 한쪽 손을 펴 보이며, 입을 닫게 만들었다. 아직 아델리나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았기 때문이다.
“아델리나, 진정해. 그게 사실이라면 필리아가 왜 기젤라까지 그에게로 보내려고 한 거야? 그의 아버지는 왜 아이기스를 따라 달아난 거고?”
바츠가 차분한 목소리로 묻자, 아델리나가 억울함이 묻어나는 눈으로 하소연하듯 대답했다.
“필리아가 미친 거라고. 그녀는 기젤라가 자신의 남편을 유혹해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어. 내게 직접 말했다고. 기젤라가 가고 싶지 않다니까, 이제는 더 이상 네가 탐낼 남자는 없다고 말했다고. 남편이 죽은 이유가 다 기젤라 때문이라고 했단 말이야. 그녀는 그냥 미친 여자야. 우리 엄마처럼 돌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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