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19화 (219/268)

<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19화 *

바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아버지 시신 곁에 앉아있던 기젤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바츠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약간의 원망이 묻어났다. 아델리나가 보여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진한 억울함이었다. 바츠는 한 차례 망설인 뒤에야 그녀에게 물을 수 있었다.

“...기젤라, 방금 아델리나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야? 네가 말해야 돼. 여기 있는 모두를 위해서 말이야. 말해 봐. 정말 사실이니?”

기젤라는 뒤쪽에 서 있는 이네오를 비롯한 엑소시스트들을 한 번 돌아본 뒤,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아빠를 유혹한 적 없어요...아빠는 언제나 저를 이곳에서 내보내려고 했죠. 성하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었어요. 성하는 10살이 되는 여자아이들을 데려가서 온갖 이상한 짓을 시키고는 했거든요. 언니가 그랬어요. 언니에게서 전부 들었어요. 제가 알고 있던 멋진 일이 아니었어요. 전 성하 곁으로 가면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질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건 모든 아이들의 꿈이에요. 그건 정말 멋진 일이니까요. 하지만 언니가 알려줬어요. 그곳에는 그 어떤 축복도 은총도 없다고요. 거대한 짐승이 홀로 기다리며 살점을 핥는다고 했어요. 전 그렇게 되기 싫었어요. 아빠는 그 사실을 믿었죠. 언니가 죽고 나서 더욱더 확실해졌어요. 언니의...언니의 시신이 더럽혀져 있었거든요. 아빠는 저마저도 성하에게 바쳐지는 걸 원치 않았어요. 저 역시 가고 싶지 않았죠. 그래서 그랬던 거예요. 그래서 아빠가 아이기스의 일원이 된 거라고요. 그들은 우리를 보호해줄 거라고 말했거든요. 하지만 엄마는 우리 말을 듣지 않았어요.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는 아빠가 저 때문에 미쳤다고 생각했죠. 죽은 언니마저도 욕했어요. 하지만 정말 미친 건 우리가 아니라 성하와...”

“이단이다!”

밀레스와 엑소시스트들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터져 나오며 기젤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조금 전 아델리나만큼 흥분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 어리숙해 보이던 두 사람만이 어쩔 줄 모르며 불안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네오는 그때까지도 조용히 기다렸다. 눈가에 미소도 보였다. 바츠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절로 마른 침이 삼켜졌다. 본능적으로 지금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델리나가 바츠의 얼굴을 잡아채,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며 말했다.

“너도 저런 사람들이 어떤 짓을 하는지 알잖아. 내가 말했잖아,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끔찍한지 말이야. 기젤라는 고통 속에서 죽어갈 거라고.”

바츠는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눈빛만 보냈더라도 충분했다. 그녀는 기젤라를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눈치였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기젤라에게서 자신을 본 것 같았다. 기젤라가 자신처럼 외로움을 느끼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에게 동의할 수 없었다.

“아델리나, 그만해.”

바츠의 대답에 그녀의 시선이 혼란스럽게 변해갔다. 너무도 당혹스러워 정신이 멍하다는 것이 눈에 보일 만큼 복잡함으로 물들었다.

“바츠?”

“저들을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지 마. 우린 저들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야.”

“바츠...나를 못 믿는 거야? 미친 건 나와 기젤라의 아빠가 아니야. 기젤라도 아니고! 필리아가 미친 거라고! 그녀가 미친 거란 말이야! 저들이 미친 거라고!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야!”

아델리나가 두 눈을 부릅떴을 만큼 대단히 분개하며 소리쳤지만, 바츠는 여전히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그녀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그녀가 옳다는 것도 알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츠에게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작은 아이나 낯선 도시에 사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보다 바로 앞에 있는 아델리나가 훨씬 더 소중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사람을 지금 이곳에서 무사히 지켜낼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이네오의 실체를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해서 모르고 있었다. 기껏해야 지난 번 만난 일리디우스와 그의 일행들 정도로 생각하는 듯 했다. 물론 아델리나는 무척 강했다. 어쩌면 바츠 자신보다도 강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바츠는 그가 혼자서 자신과 아델리나를 때려눕히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바츠는 그들의 심기가 더 불편해져, 좋지 않은 상황이 만들어지기 전에 지금의 분위기를 어떻게든 무마시켜야만 했다.

“바츠, 모르겠어? 필리아는 자신의 남편과 기젤라를 시기한 거라고! 혼자 헛된 망상에 젖어서 말이야! 그렇게 기젤라의 언니를 희생시키고, 기젤라마저도 고통 속으로 보내려고 한 거라고! 그녀 남편은 남은 자신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도망치려고 했던 거야! 아이기스가 되면서까지 달아나고 싶었던 거라고!”

아델리나가 다시 한 번 소리치자, 드디어 그가 나섰다. 이네오는 계속해서 아델리나를 향해 이단이라며 소리치는 사람들을 간단한 손짓으로 진정시키더니, 아직까지는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하께서는 신의 선택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분께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허락되어 있죠. 그건 신의 뜻입니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물론이야. 당신들의 뜻을 존중하지. 그건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니까 말이야.”

바츠는 그에게로 얼른 대답했다. 오직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절박했다. 하지만 아델리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지, 분한 감정을 담아 바츠를 불러왔다. 그녀는 필리아를 벤 것처럼 눈앞의 엑소시스트들을 모두 베고 싶은 듯 했다. 이네오가 그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눈빛이 조금 달라지며 말했다.

“우리 검은 목자께서 믿음을 잃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신부님께 간절함이 부족했던 모양이군요.”

바츠는 아델리나의 부름은 무시하고, 그의 목소리에만 반응했다.

“걱정하지 마. 그건 당신들이 판단할 일은 아니니까.”

“물론입니다. 전 그저 우리 신부님께서 수고스럽게 되실까 우려되었을 뿐입니다. 그럼 신부님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주님과 성하를 부정하는 건 이단입니다. 이단은 오로지 정화만으로 심판하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가 약속하지.”

“믿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우리가 데려 가겠습니다. 아이는 그분의 종이 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해.”

“바츠!”

아델리나가 크게 놀라며 기젤라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다가오는 엑소시스트들보다 먼저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델리나는 고작 한 발짝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그들이 그녀를 데려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바츠가 황급히 몸을 잡아채며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들에게 카니지를 휘두르기 위한 시도까지도 했다. 바츠로서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끝까지 몸부림치며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애를 먹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젤라의 몸부림에 곤혹을 치러야만 했다. 그녀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달아나 아델리나에게로 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너무도 닮은 둘의 모습이 매우 처량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손을 놓은 사람은 없었다. 바츠도 그리고 그들도 자신이 손에 쥔 것을 더욱 세게 움켜지며, 속박을 공고히 할 뿐이었다.

아델리나가 진정한 것은 그들이 뒷문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간 뒤 였다. 그녀는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비명소리에 눈시울을 붉히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포기했다기보다는 너무 분한 마음에 지쳤기 때문으로 보였다. 아직 자리에 남은 이네오와 밀레스를 무섭게 노려보는 것을 보면 분명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게 숨을 내뱉는 그녀에게서 큰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네오는 달라진 눈빛을 거두고는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들이 보내오는 그 특유의 막연한 호의가 묻어났다.

“함께 가시지요. 브르노에 있는 우리의 성당이 안락함을 선사할 겁니다.”

“아니, 우린 우리의 길을 가겠어. 호의는 고맙지만 이미 성대한 대접을 받은 것만으로 충분해. 그 이상은 부담이 될 것 같군.”

바츠는 아델리나의 팔을 꼭 붙든 채, 밀레스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이네오가 짧고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성하를 배알하기 전에, 저희에게 고명한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내려주실 수 있으면 했는데 서운하군요.”

이네오가 진심으로 아쉬운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는 정말 함께 가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바츠는 끝내 그의 요구를 거절했고, 그는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바츠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츠는 그들이 떠나고 난 뒤에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브르노로 향했다. 되도록 그들과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과 더 이상 엮이지 않는 것이 매우 이로울 것 같았다. 너무 불안했다. 그 때문인지 브르노로 돌아오는 길이 왠지 모르게 힘겨웠다. 싸늘한 날씨와 황량한 대지가 모두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아련하게 밀려드는 어수선한 감정이 낯설게 느껴지도록 만들며 마음을 편치 않게 만들었다. 비록 늦은 밤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도시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아델리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화났어?”

바츠는 여관에 방을 잡고 나서야,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돌아오는 며칠 동안 그녀가 매우 걱정되었지만,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녀가 너무도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독면을 벗어놓는 그녀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져 있었다. 정말 많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녀가 이토록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대꾸도 하지 않고, 낡은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을 뿐이다. 바츠는 그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아델리나, 이러지마. 우리 너무 늦어지고 있다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게다가 그들과 분쟁이라도 생기면 우린 헛걸음을 하게 된다고. 너도 알잖아.”

“왜 그랬어?”

바츠가 거의 우는 목소리로 하소연하듯 말하자,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너무 차가웠다.

“왜 그런 거야?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

“우리 너무 늦었으니까...엉뚱한 곳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우린 닥터의 말을 전해주기만 하면 돼. 무사히 말이야.”

“정말 그것 때문이야? 그게 진짜 이유냐고.”

바츠는 그녀가 다그치듯 묻는 말에 잠시 입을 닫아야만 했다. 냉기를 품어내는 그녀의 시선이 입술을 얼려버린 것만 같았다.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나 정말 속상해. 우린 그 아이를 살해한 거라고. 우린 그 아이를 지킬 수 있었어. 그 아이가 어떻게 될지 정말 모르는 거야? 이미 그런 자들을 수 없이 봐왔잖아.”

“알아. 너를 믿어. 그리고 기젤라를 믿어. 하지만 너도 말했잖아. 우린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누군가를 살해할 거라고. 기젤라는 그 중 하나일 뿐이야. 우린 모두를 구할 수도 없고, 모두를 지킬 수도 없어.”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건 이것과 달라. 이 아이는 다르다고.”

바츠는 아델리나의 눈에 눈물과 원망이 함께 차오르는 걸 보며 물었다.

“뭐가 다른데? 그래, 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하고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아? 아무도 다치지 않더라도 행복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지? 하지만 그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내가 너를 처음 안았던 그날은 오브러시의 집사를 살해했고, 샤미르의 노예들을 구하기 위해 갔을 때에는 여러 명의 야인들도 살해했지. 그뿐 만인 줄 알아? 우린 그것 말고도 수 없이 싸웠고, 수 없이 누군가를 해쳤어. 그 모든 것이 네가 말한 대로 어쩔 수 없이 싸웠던 것 같아? 그렇지 않아. 결국 누군가는 계속해서 희생당하고 있다고. 뭔가를 지킨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실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해. 그게 우리가 아니었을 뿐이야.”

바츠는 말끝에 아직까지 라는 말은 생략했다. 그러자 그녀가 결국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며 소리쳤다.

“듣고 싶지 않아! 그건 변명일 뿐이라고! 우린 비겁했던 거야!”

“아델리나, 이러지마. 너를 위해서 뭐든 하고 싶어. 네가 기분이 나아질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말이야.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어. 날 이해해줘.”

바츠는 그녀가 아이들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과거는 보호받지 못한 채, 외로움에 사무쳐 있었다. 고작 몇 년 전 일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결코 지울 수 없는 흉터였다. 불에 심하게 데인 것처럼 완전히 일그러져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역겨운 그런 흉터. 어쩌면 오히려 얼마 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언성을 높이며 몰아세우자, 서운함과 억울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것 같아 매우 섭섭했다. 그녀는 조금도 이해해줄 것 같지 않았다.

“왜 아니야? 왜 아니냐고! 난 널 이해할 수 없어! 넌 변했어! 왜 변한 거야? 그 아이를 외면하면 그들과 대체 뭐가 다른 거야? 같은 행위를 하지 않았으니,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틀려! 그건 결국 같아! 아이에게 절망을 심어주는 건 똑같다고! 아이가 우는 소리를 못 들었어? 아이는 이미 죽어가고 있다고!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전부야? 그게 진심이야?”

바츠는 그녀의 나무라듯 원망하는 목소리에 더 이상 섭섭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미울 만큼 가슴이 아파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상처가 분노로서 튀어나왔다. 자신에 대한 혐오도 있었다. 바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널 지켜줄 수 없었어! 널 지켜줄 자신이 없었다고! 널 지켜줄 수 없단 말이야! 진심이 듣고 싶어? 이게 진심이야! 그딴 작은 꼬마 따위 난 상관 안 해! 여기에 살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조차 관심 없어! 하지만 난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라고! 그게 내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욕해도 좋아! 하지만 난 그것만이라도 하고 싶어! 어떻게든 그것만이라도 하고 싶다고! 하지만 아까와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난 그것마저도 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인 줄 알아? 난 무엇보다도 널 잃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거야! 난 그들로부터 널 지킬 수 없어! 안다고! 그게 얼마나 빌어먹을 것인지 알아! 하지만 난 내가 그들보다 힘이 없다는 것도 알아! 그건 더 빌어먹을 거야! 그게 잘못이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날 신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모든지 다 할 수 있는 신 말이야! 나도 정말 그렇게 되고 싶어! 하지만 난 신이 아니야! 신이 대체 뭐야! 그딴 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난 나를 신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뭐! 그 꼬마가 뭔데! 난 이 사람들을 몰라! 이 사람들 따위는 상관하고 싶지 않다고! 내가 대체 얼마나 더 해야 하는데! 무서워! 무섭다고!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이 계속해서 눈앞에 나타나고, 그것들이 자꾸만 내 주위를 맴돌아! 젠장! 난 그것들로부터 널 지킬 수 있다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고! 내가 비겁해? 비겁해도 좋아! 널 지킬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짓이든지 할 거라고! 널 케일리처럼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아!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변한 건 너야! 우리가 왜 여기에 와있는지 잊었어?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필요 없는 건 다 버릴 거라고!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내가 잘못한 거냐고! 제기랄!”

바츠는 답답한 마음에 그녀를 무섭게 몰아붙였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 발로 바닥을 세게 구르며 몸을 돌려세웠다. 차마 그녀를 끝까지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물이 이제는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길어지고 강해질수록 그녀의 눈물도 짙어지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애써 가슴을 짓누르며 말했다. 너무 억지로 짓눌러 뼈가 부러진 것 같은 통증이 가슴을 지배했지만, 이를 물고 참아냈다.

“...아델리나...이런 내가 초라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허무함은 날 비참하게 만들어. 난 그 허무함이 다시 찾아오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 난 모든지 다 해낼 수 없단 말이야. 그 허무함을 견뎌낼 수 없다고...난 전부터 테라치처럼 완벽하지도 않았고, 버니에투와처럼 힘이 세지도 않았어. 그렇다고 지훈이나 가이즈카처럼 머리가 비상하지도 않았지. 차라리 내게 실망했다고 말해. 그럼 적어도 내가 비참함은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야...”

바츠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밖은 이제 가득 내린 어둠과 살을 에는 바람으로 끔찍하겠지만, 텅 빈 허전함에 그들이라도 채워 넣으며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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