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20화 *
“어딜 가려는 거야!”
아델리나는 그런 바츠를 서둘러 붙들었다. 침대를 박차고 뛰어내려와, 바츠를 뒤에서부터 양팔로 끌어안았다. 바츠가 막 문을 열기 직전이었다.
바츠는 서운한 마음에 순간적으로 그녀를 뿌리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등을 울려와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방금 전 끌어 올랐던 분한 마음까지도 전부 잊으며 애잔하게 변했다.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네게 실망할 리가 없잖아. 그냥...그냥 너무 슬퍼서 그랬어. 가슴이 너무 아파서 그랬어. 난 너 없으면 안 돼. 날 혼자 두지 마. 날 혼자 두고 아무대도 가지마.”
바츠는 아델리나의 애원하는 목소리에 다시 몸을 돌려세웠다. 몸에 둘러진 그녀의 양팔이 숨이 막힐 정도로 조여 와 쉽지 않았지만 기어이 그녀를 마주보고 섰다. 조금 전 그녀의 격앙된 분위기는 이미 온데 간데 사라진 뒤였다.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었다. 눈시울은 벌써 붉게 부어올랐고, 코끝도 빨개져 있었다. 양 볼은 물기로 흠뻑 젖었고, 몇 번이나 딸꾹질을 하듯 훌쩍였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자, 발끈하며 화를 냈던 자신이 참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억지를 부린 거잖아, 그렇지? 안 그럴게. 정말 잘못했어.”
바츠는 아델리나를 품안으로 와락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물에 젖은 애원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파묻고, 몇 번이나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꾸지람을 들은 아이가 달래진 것처럼 매우 서럽게 울었다. 그 와중에 바츠의 가슴에 대고 계속해서 사과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뭉개진 발음으로 잘못했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바츠는 그녀의 발음이 슬픔에 얼룩져 불안해질수록, 가슴이 아리는 걸 느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심장을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양 볼을 잡아당기며, 그녀가 더 이상 가슴 속에 슬픔을 밀어 넣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차라리 자신의 얼굴에 대고 설움을 토해내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몇 번이나 거부했다. 얼굴을 가슴에 파묻은 채, 자꾸만 숨어들려고 했다. 바츠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다독인 뒤에야 조심스럽게 눈만 치켜 올렸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이 완전히 충혈 된 채, 눈물에 잠겨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결국 들어 올리고는, 입술과 이마와 눈에 차례로 키스를 퍼부어주었다. 그녀에게 이제는 다 아무렇지도 않게 된 거라고 입술로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아직 한참 남아있는 눈물만큼 얼굴 여기저기에 슬픔이 눌어붙어 있었다. 바츠는 그 슬픔들을 다시 한 번 일일이 입술로 찍어내 지워버린 뒤 그녀를 침대로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경계심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온몸으로 말하며 진심을 전했다.
‘이제 괜찮아. 그럴 일은 없어.’
아델리나가 다시 웃은 건, 바츠의 소리 없는 대화가 전혀 다른 언어로 끝나고 난 뒤였다. 눈물과 울음대신 땀과 뜨거운 숨결이 둘을 감싸 안았다. 바츠는 그녀와 함께 옆으로 마주보고 누운 채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얼굴에 눈물의 흔적들이 아직 여기저기 남아있는 것이 보였지만, 붉게 상기된 볼과 입가에 걸린 부드럽고도 진한 미소를 통해, 그녀가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츠는 그녀에게 미처 전하지 못하고 아껴두었던 마지막 말을 건넸다.
“미안해.”
아델리나는 누운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고개를 따라 움직이는 미소가 허공에 잔상처럼 채워졌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선뜻 품안으로 파고들었고, 바츠는 그녀의 얼굴이 가슴에 닿고 숨결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목덜미가 짜릿하고 솜털이 바짝 서는, 매우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그녀의 차분한 숨소리에 사로잡히며, 정신이 점점 아득해지는 저 먼 곳으로 끌려 내려갔다. 길게 자란 푸른 수풀이 가득한, 넓은 초원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바츠는 그 초원을 느긋하게 돌아보았다. 무릎보다 높이 자라있는 수풀과 새파란 미소의 하늘 그리고 한가롭게 노니는 새하얀 구름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렜다. 심지어 막 옆을 스치며 어깨를 치고 달아나는 산들바람의 장난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그 바람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사각거리며 서로에게 치대는 수풀의 웃음소리는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 바람을 쫓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바람을 보고 웃던 그녀들이 바츠를 보고도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부끄러워서 손을 잡아보지는 못하고, 서로 엉겨 붙은 채 눈치만 살피며 웃기만 했다. 바츠는 그런 그녀들을 위해 먼저 손을 내밀며 그녀들을 쓰다듬었다. 그녀들의 감격에 겨운 비명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작은 외침이 그녀들의 기분 좋은 비명을 뚫고 날아들었다.
‘블러드 케찰이 전하라고 했다. 살아서 나를 만나러 와라.’
바츠는 그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옮겼지만, 끊임없이 펼쳐진 초원에는 그 누구의 실루엣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수풀의 수줍은 웃음소리와 바람의 장난스럽게 치근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조롱 섞인 비웃음으로 변해가고, 바람은 손가락질을 하듯 주위를 맴돌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까 느꼈던 그 설렌 기분이 삽시간에 당혹스러움과 불쾌감으로 변해갔다. 푸른 하늘은 어느 덧 검게 변했고, 하얗던 구름은 진한 회색빛 안개로 변해있었다. 바츠는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갑자기 몸을 간질이던 수풀의 스침이 가시처럼 따갑고, 바람의 속삭임은 바늘처럼 고막을 마구 찔러오기까지 했다. 특히 고막을 찌르는 바람은 온몸을 따끔거리게 만드는 수풀의 심술을 느끼지 못하게 할 만큼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이를 악물고 참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고, 머지않아 비명까지 질러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바츠가 선 자리가 느닷없이 밑으로 쑥 꺼지며 지면이 추락했고, 바츠는 캄캄한 땅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가야만 했다. 가슴이 철렁하며 눈을 질끈 감아야 했을 만큼 너무도 아찔했다. 하지만 그 추락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떨어진 것 같은데도, 그 끝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추락하고 있다는 기분만 계속 전해질 뿐이었다. 바츠는 힘겨웠지만 억지로 두 눈을 부릅뜨며 가까스로 주위를 살펴볼 수 있었다.
“바츠!”
갈색 격자 나무 바닥과 활짝 열린 낡은 문, 검은 어둠이 내린 좁은 복도와 여러 개의 횃불. 그리고 그 횃불들을 들고 있는 검은 옷에 방독면을 착용한 사람들과 그들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강제로 끌려 나가며 소리치는 벌거벗은 여인까지 모든 것이 생소하게 느껴질 만큼 정신이 멍하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 여인의 얼굴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보였다. 어딘가 심하게 부딪힌 것처럼 벌써 여기저기 부어오른 작고 가름한 얼굴이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의 겁에 질린 두 눈이 이쪽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소리쳤다.
“바츠!”
바츠는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도 모른다. 그저 본능이 현재 매우 위험하고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려올 뿐이었다. 서둘러 몸을 일으켜 그들을 향해 달려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랬는지 모를, 침대 밑 바닥에 누워있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상체를 반도 일으키지 못했는데,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다시 바닥으로 던져지듯 너부러졌다.
“아델리나!”
바츠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검은 복도로 잔인하게 끌려 나가,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복도를 따라 이곳으로 계속해서 전해져 왔다. 점점 멀어지며 희미해졌지만, 아직까지는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조차 사라졌을 때, 바츠의 눈앞에 한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내려다보았다. 바츠는 그를 겨우 올려다보았지만 방독면을 뒤집어 쓴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방독면 렌즈 밖으로 흘러나오는 그의 시선이 차갑게 느껴질 뿐이었다. 바츠는 그 눈빛과 더불어, 그가 입고 있는 붉은 옷과 냄새 그리고 분위기만으로 그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네오...무슨 짓이야...”
바츠는 그에게 무섭게 묻고 싶었지만, 코가 꽉 막혀 숨 쉬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너무 답답해서 기침을 하고 코에 힘을 줬더니 바로 앞에 붉은 피가 튀어나왔다. 그가 자신의 옷깃으로 바츠의 얼굴을 닦아주고 말했다.
“우리가 이단을 용서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난 집사야. 일리트시의 집사, 아르크의 집사라고. 당신들이 말하는 신부(father)라고. 당신들은 부모에게 이런 짓을 하나?”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불경한 짓도 하지 않죠.”
“그런데도 잘도 이런 짓을 벌이고 있군.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바츠는 지금이라도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지만, 손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무거운 짐에 깔린 것처럼 온통 욱신거리며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 사실을 아는지, 여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부님, 저를 너무 우습게보시는 것 같군요. 고명하신 것은 존경해 마지않지만, 그렇다고 제가 무지하고 우매한 것은 아닙니다. 아르크의 집사가 여기까지 오게 된 연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변절자가 된 것이죠. 아르크의 집사는 결코 자신의 구역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런 내 생각이 틀립니까?”
바츠는 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분한 마음에 그를 노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가 말했다.
“무엇보다도 스톡홀름 시티에서 오셨다지요? 닥터가 우리를 농락하라고 사주라도 했습니까?”
“어떻게...”
“우리에게 아주 귀한 정보가 있었습니다. 며칠 전 제게 신부님과 우리 형제자매님들을 구할 수 있도록 계시를 내려준 검은 목자께서 제공하신 것이죠.”
바츠는 그 검은 목자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그것을 생각해볼 겨를은 없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왜 스톡홀름의 그 돌연변이들을 증오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의 삶에 방식이 매우 불경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아십니까? 특별히 선별한 젊고 건강한 여자들을 데려다가 윤간으로 아이를 낳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보다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로 도시를 채우려는 속셈이죠. 믿기 힘드시겠죠?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렇게 선별된 여자를 ‘브루드 메어’라고 칭하더군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그렇게 낳은 아이들을 기계로 만들고 있습니다. 아주 강력한 군대를 만들고 있는 것이죠. 그들은 우리의 정화에 반하며, 세상을 혼란으로 이끌려고 합니다. 아르크는 물론이고 모두를 파멸로 이끌길 바라죠. 그리고 거기에 사는 놈들은 모두 그 삶에 동의한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정화하려는 우리가 잘못된 겁니까?”
“...모르겠어. 하지만 너희들과 그들과 다른 게 뭐지? 너희들도 어린 여자 아이들을 데려다가 몹쓸 짓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사람들을 다르다는 이유로 학살하고 핍박하지!”
“우린 다릅니다. 우린 주님의 선택을 받았죠.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전부 허락된 일이죠.”
“억지스럽군.”
“믿음이 없는 자들이 볼 때면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믿음이 없는 자들을 강제로 설득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히 하겠습니다. 언젠가 당신들도 심판할 생각이었다는 걸 말이죠. 당신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는 오만한자들이니까요. 주님은 오직 한 분. 그분뿐이시고, 그분과 교감을 할 수 있는 건 성하뿐입니다. 우린 모두 그분의 자녀이자 종이고 그분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당신들은 일찍부터 그분을 부정하는 이단을 저질러 온 겁니다.”
바츠는 그의 얼굴에 붉은 침을 뱉고 나서 말했다.
“네 놈들도 언젠가 벌을 받게 될 거야. 반드시 그날이 온다. 네 놈들의 그 성하라는 더러운 이름까지도 모두 말이야!”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단지 그 차이만 있을 뿐이죠.”
“네 놈들은 그들보다 훨씬 비참하고 초라하게 죽어 갈 거야. 세상이 결코 너희들을 용서 하지 않아. 너희들의 만행을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바츠가 악에 바친 목소리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저주를 퍼붇자, 그가 방독면을 벗어 옆에서 기다리던 다른 엑소시스트에게 건네고 나서 말했다. 다시 돌아보는 그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그리고 섬뜩할 만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신부님, 세상은 이미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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