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21화 (221/268)

<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21화 *

거기까지였다. 그는 더 이상 바츠와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싸늘한 미소와 함께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방안에 남아있던 엑소시스트 중 일부에게 눈치를 주었는데, 그의 눈치를 받은 엑소시스트들은 바츠에게 다가와 무차별적으로 톤파를 휘둘렀다.

바츠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머리를 팔로 감싸며 몸을 둥글게 말아야만 했다. 그리고는 머리를 감싼 자신의 팔 사이로 비치는 그의 뒷모습을 무섭게 노려보았는데, 그것이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바츠는 그를 따라 자리를 떠나는 일부 엑소시스트들의 안쓰러운 시선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오직 검은 복도를 통해 사라지는 그에게만 두 눈을 고정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온몸으로 쏟아지는 고통이 결국 칼날처럼 마지막 남은 정신 줄을 싹둑 잘라버리며, 강제로 깊은 잠에 빠져들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침묵과 어둠으로 보내지는 고요의 안식이었다.

“정신 차려요!”

바츠가 다시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난 뒤였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에 익숙한 방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직 숨이 붙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찌는 듯한 통증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이 애초부터 자신을 살해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레이븐! 눈을 떴어! 이리 와 봐!”

흥분에 젖은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이미 그 전부터 들려오고 있었지만, 바츠는 이제야 그 목소리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머리맡에 자리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맙소사...”

바츠는 힘겹게 고개를 움직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무 바닥에 얼굴이 눌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불편했지만, 그녀를 확인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녀는 방독면과 더불어 헌터 슈트를 꼭 닮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바츠는 아직 몽롱한 정신으로도 그 옷이 엑소시스트의 것이라는 걸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 겁을 먹으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바츠를 달래는 데 바빴다.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겨우 신음소리를 내뱉는 바츠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뒤이어 방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다른 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바츠 곁으로 바짝 다가와 주저앉으며 절망으로 가득한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바츠는 그 역시도 엑소시스트라는 것을 확인하며 더욱더 달아나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막다른 벽이 야속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진정해요! 우리에요! 우리라고요!”

바츠는 뒤늦게 들어온 사내와 이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인이 한참동안 달래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그들의 작은 손길까지 악에 바친 소리를 질러대며 거부했다. 그들에 대한 경계를 푼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력을 잃은 자신의 몸에 한계를 느끼고 포기한 것뿐이었다. 그러자 그들이 차례로 방독면을 벗으며 말했다. 바츠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당신 맞죠? 그때 그 헌터, 그 집사님이 맞죠? 맞잖아요?”

“이거! 여기 이거! 분명 그때 그분이 맞죠? 틀림없이 기억해요. 당신 얼굴을 기억한다고요.”

사내가 끝까지 차분하게 물은 것과 다르게, 여인은 결국 흥분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진한 슬픔과 걱정 속에 왠지 모를 반가움이 뒤섞인 묘한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적극적인 모습에 살짝 놀랐지만, 그녀가 내미는 방독면을 바라보며, 다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방독면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그녀가 바츠의 반응을 보고는 또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 보라고요! 이거!”

바츠는 그녀가 자신의 방독면을 들이밀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부위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흔적이었다. 지상으로 나와 처음으로 누군가를 살해하며 생겨난 흠집이었다. 샤오밍과 함께 기지국에 갔었던 그때가 아련하게 떠올랐다. 분명 그때 그곳에 있던 아이기스의 습격을 가까스로 피해내며 얻은 훈장 같은 흔적이었다. 그때 그 중 하나가 뒤에서 휘둘러 온, 날이 무른 칼날이 스치며 생겨난 왼쪽 뺨에 긴 상처! 바츠는 앞에 있는 남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살폈다. 그리고 머릿속에 불현 듯 떠오르는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았다.

“레, 레이븐...그리고 캣...?”

“맞아요! 우리라고요! 우리에요!”

둘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캣은 빠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밑으로 떨어뜨렸을 정도로 감격했다.

“맙소사, 신이 정말 있기는 있나 봐요. 당신과 우리가 이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캣, 진정해. 우선 이분의 상처를 돌봐야 한다고. 어서.”

레이븐이 눈물을 쏟아내는 캣을 다독여 바츠를 침대 위로 옮겼다. 바츠는 고작 침대 밑에서 위로 옮겨졌을 뿐인데도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에, 몇 번이나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내야했다. 레이븐이 말했다.

“그래도 어디가 부러지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들은 당신에게 끔찍한 상처를 주려는 의도는 없었거든요. 정말 다행입니다. 우린 당신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까봐 몇 번이나 두려움에 떨었다고요. 정말 다행입니다.”

바츠는 어느덧 레이븐도 캣을 따라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무사히 살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반가운 것이라는 걸 처음 느꼈다. 마치 원하던 모든 일이 지금 막 이뤄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몸이 조금만 더 건강했다면 신이 나서 미친 사람처럼 웃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헌터들이 가끔 뜬금없이 웃고는 하는 이유가 왠지 이해가 됐다. 너무도 감격스러워 기뻤다. 하지만 그 기분이 머문 것은 아주 잠시였다. 바츠는 이를 물고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델리나...”

“아델리나? 그 헌터를 말하는 거죠? 그들에게 끌려간 여자 아이요. 진정해요. 지금쯤이면 이미 집회로 데려가졌을 거예요. 그리고 정화 의식에 바쳐졌을 겁니다.”

레이븐이 캣과 함께 바츠를 다시 눕히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무슨 소리지?”

“우린 가끔 집회에 재물을 바칩니다. 우리가 행하는 정화에 무운을 기리기 위해 하는 의식이죠.”

“그게 뭐지?”

둘은 바츠의 물음에 서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한 뒤 입을 열었다. 캣이 말했다.

“...거대한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것이에요. 손등과 발등에 말뚝을 박아 매달고, 기도를 하죠.”

“안 돼!”

바츠는 그들의 손을 온몸으로 뿌리치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바츠는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그들의 손길조차 뿌리치지 못한 채 둘에게 붙들려야만 했다.

“이미 늦었어요! 지금쯤이면 벌써 신에게 바쳐졌을 겁니다!”

“닥쳐! 난 가야 해! 그럴 수 없어! 모조리 다 죽여 버릴 테야!”

“틀렸어요!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요! 그리고 당신 몸을 봐요! 우리도 이기지 못하잖아요! 당신은 지금 몸도 가누기 힘들다고요!”

레이븐과 캣은 바츠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바츠는 어떻게든 일어나기 위해 애를 썼다. 셋은 그렇게 한참동안 티격태격하며 괜한 몸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바츠가 도저히 그들을 뿌리칠 수 없다는 걸 느꼈을 때에야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이거 놔! 난 가야 한다고! 기억 안 나? 그때 당신이 내게 어떻게 했지? 당신이 캣을 위해 뭘 했느냐고! 그때 당신이 그런 이유가 뭐야! 내가 당신의 부탁을 듣고 간 이유가 뭐냐고! 난 그때처럼 가야만 한다고!”

바츠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레이븐의 멱살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고집을 부리듯 잔뜩 흥분해있었지만, 그에게 전하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그러자 레이븐이 그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하던 행동을 멈췄다. 아직까지 바츠를 자리에 눕히기 위해 노력하는 캣을 대신해서 말려 세우기까지 했다. 그녀의 의아한 시선은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뿌리쳐 버렸다. 그는 그녀가 혼란스런 얼굴로 멈추고 나자, 다시 바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랬군요. 미안합니다. 서두르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레이븐!”

“캣, 그만해. 우린 이분을 막을 수 없어. 그래선 안 돼.”

“레이븐! 그랬다가는 정말 죽는다고! 그걸 몰라서 그래?”

“그래서 더 보내드려야 해. 캣, 잊은 거야? 키예프 시티에서 내가 널 구하기 위해 이분께 얼마나 사정했는지 잊었냐고. 이분이 널 구하기 위해 달려갔던 걸 잊었느냐 말이야.”  캣이 하소연을 하듯 애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아. 왜 기억 못하겠어.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어.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이분을 위해서 여기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난 더 못 보내. 가면 죽는다고. 상대가 누구야? 이네오 추기경이야. 몰라서 그래?”

“그게 이네오 추기경이라도 상관없어. 그게 성하이고 진짜 신이라도 이분은 가야만 하는 거야. 내가 널 위해서 어디든 가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야.”

레이븐의 무거운 목소리가 그녀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닫아야만 했다. 그저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시선으로 걱정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사이 바츠는 레이븐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슈트를 입었고, 구석에 던져져 있던 카니지를 챙겼다. 아델리나의 짐 역시도 함께 챙겼다.

“집사님, 정화 의식을 어디서 하는지 압니다. 함께 싸워드릴 수는 없지만, 그곳까지 안내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바츠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호의를 받아드렸다. 걷는 것조차 힘에 겨워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키예프 시티에서 지독한 감기 몸살을 앓았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땅이 몸을 밑으로 잡아끌고, 하늘이 머리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세상이 자신을 향해 구겨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밖을 가득 메운 수많은 어둠을 보았을 때에는 야속한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곳에 가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없을 거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서러웠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몹시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그 걱정은 잠시 미뤄두어야만 했다. 그보다 더 앞선 다른 걱정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캄캄한 밤을 몸에 두른 커다란 벽이었다. 바츠는 앞을 가로 막아서는 그 벽을 실루엣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러보았다.

“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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