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22화 (222/268)

<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22화 *

거대한(big) 그는 거리에 얼마 남지 않은 약간의 조명을 교묘히 피해 서 있었다. 건너편 건물의 반쪽짜리 조명과 그 뒤쪽으로 어스름한 조명이 그가 선 자리를 오히려 더욱더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일부로 그 어둠 속에 몸을 파묻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집사님!”

바츠가 걸음을 멈추자, 뒤늦게 그를 발견한 레이븐과 캣이 숨이 넘어가는 듯한 외마디 탄식을 내뱉으며 기겁했다. 양쪽에서 바츠의 팔을 부축하고 있던 그들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바츠는 그들의 손등을 차례로 만져주며 진정할 수 있도록 도왔다. 둘의 시선이 의심과 믿음이 뒤섞인 채 돌아오고 있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들을 위로했다. 둘을 지켜낼 각오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둠과 함께 꿈틀거리는 버니에투와의 모습은 기운을 잃은 바츠의 모습과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둘은 온몸으로 뿜어내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그는 어둠 속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짙은 먼지처럼, 또렷하지는 않지만 그 윤곽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불안해보이기도 하고, 기괴해 보이기도 한 묘한 모습이었다. 흐느적거리듯 몸을 좌우로 꿈틀대기도 하고, 가끔은 고개를 살랑살랑 움직이기도 했다. 자신의 존재를 애써 알리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시도는 레이븐과 캣을 공포로 질리게 만드는데 매우 탁월했다. 레이븐과 캣이 바츠를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며, 믿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하도록 만들었다. 키예프 시티에서의 그날처럼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반드시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에 반해 바츠는 탈골된 것처럼 양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버니에투와를 가까이 가져다대면 공기가 반도 채워지지 않은 풍선처럼 힘없이 뭉개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바츠는 레이븐과 캣의 애원을 외면할 생각이 없었다. 둘의 기대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필요하다면 남은 힘을 버니에투와를 향해 휘두르는 카니지에 담을 생각이었다. 버니에투와가 말했다. 어둠을 타고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추위 때문인지 깊은 울림이 있었다.

“이쪽으로 가지 마. 이미 늦었어. 아델리나는 벌써 놈들의 신에게 바쳐졌을 거야.”

“버니, 그게...너 설마!”

버니에투와를 향한 바츠의 동공이 급격히 커지자, 그의 목소리도 덩달아 그만큼 커졌다.

“그러게 왜 내말을 듣지 않은 거야! 돌아가라고 했잖아!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다고! 돌아갔다면 모두가 좋았잖아! 너만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다고! 너만 내말을 듣고 돌아갔다면 다 좋아질 수 있었어! 아델리나도 무사했겠지!”

“너지! 네가 그런 거지! 네가 놈들에게 우리에 대해서 알리고, 우리의 위치를 알린 거지? 아르크의 눈! 그걸로 우리 위치를 확인한 걸 거야! 그렇지? 미친 거야? 대체 왜? 대체 왜 그랬어!”

“미친 건 너야! 지금 누가 너희를 쫓고 있는지 알아? 나 혼자인 것 같아? 천만에! 내가 아니었다면 너희들은 진즉에 민스크 시티에서 살해당했을 거라고! 그자에게 갈기갈기 찢겨졌겠지! 내가 말 많은 칼맨 놈의 목을 베가는 동안, 너와 아델리나는 잠에 푹 빠져 있었으니까 말이야! 서로 몸을 만지며 시시덕거리고 있었겠지! 그자가 가까이 와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내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라고! 내가 그때 너희들의 관심을 끌어서 도시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거란 말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왕 노릇을 하는 커다란 코가 부러진 녀석이 당한 봉변은 너희가 당했겠지! 아니, 그보다 훨씬 처참했을 거야! 그 자는 너희를 살해하는 게 목적이니까!”

바츠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몸을 털어 레이븐과 캣의 손길을 쳐내고는 한발 앞으로 내딛으며 소리쳤다.

“닥쳐!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네가 아델리나를 죽인 거라고! 네 손으로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게 내가 할 일이었어! 그게 내게 내려진 지시였다고! 다시 돌려놓을 수 없다면 너희를 살해하라고 했다고! 누군 좋아서 이러는 지 알아? 이 일을 하지 못하면 난 영원히 형을 이길 수 없을 거야! 난 실패자가 아니야!”

“그딴 변명하지 마! 넌 그냥 우리를 질투한 거야! 아르크에서부터 그랬잖아! 그게 싫었던 거지? 그것 때문에 이딴 짓을 한 거잖아! 아델리나가 널 좋아해주지 않으니까 미워하기 시작한 거잖아! 저리 물러나!”

바츠의 외침에 그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차갑게 변했다. 한껏 달아오른 흥분이 빠르게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주변의 어둠까지도 집어 삼키는 것 같았다. 주위에 기운이 그를 향해 마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가 냉랭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사납게 말했다.

“그 자에게 아델리나가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그럴 바에는 이곳에서 그들의 신에게 바쳐지는 게 더 나아. 정화가 되면 고통은 없을 거라고 했어. 그럼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고. 이네오가 그랬다.”

“멍청한 소리! 아델리나는 그 전에 고통 속에서 질식하고 말거야! 그들이 아델리나를 데려간 이유를 모르겠어? 놈들은 정화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가해 후회를 하게 만들고 있다고! 그렇게 고통으로 후회를 자백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니까! 그놈들은 미치광이들이라고! 아델리나는 후회 속에서 죽어가고 말거야! 난 아델리나를 데리러 가야 해!”

버니에투와가 카니지를 천천히 뽑아들며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리고 그렇게 못해. 내가 있는 한 안 돼. 날 방해하지 마라. 너에게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뺏기지 않겠어.”

“넌 항상 겁쟁이였어. 늘 그 자리에 서서 누군가가 다가와주길 바라기만 하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서지 않아. 넌 이기적이야. 모두가 네 중심으로 흘러가길 바라지? 네가 주인공이 되어서 모두가 너를 통했으면 하지? 웃기지마. 넌 그럴 만한  자격이 없어. 넌 정말 그냥 괴물일 뿐이야.”

바츠는 그를 진심으로 혐오스럽게 생각하며 말을 내뱉었다. 그가 정말 실망스러웠다. 그러자 그가 두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이 허옇게 빛난다고 느껴질 만큼 살의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의 눈빛이 어둠에 잔상으로 길게 그려진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가 소리쳤다.

“난 미사 때의 버니가 아니야! 난 강하다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아! 전부 날 불쌍하게 바라보잖아! 난 형보다 더 강해! 너 혼자 착한 척, 고귀한 척 하지 말라고!”

그의 붉은 카니지가 위에서 아래로 곧장 추락하듯 휘둘러졌다. 바츠는 레이븐과 캣을 동시에 옆으로 밀쳐내고는 허겁지겁 카니지를 뽑아들어야만 했다. 그의 엄청난 힘이 실린 카니지가 바츠의 카니지와 직각으로 부딪혔다. 바츠는 그가 얼마나 강한지 고작 한 번의 접촉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현재의 몸이 엉망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바츠의 두 눈이 절로 크게 떠졌을 만큼 강했다. 그러자 그가 검이 부딪힌 채로 바츠를 밑으로 짓누르며 말했다. 흥이 묻어나 즐거운 목소리였다.

“봐라! 네 카니지를 보라고! 네 카니지도 이렇게 붉은 색이 되어 있다고! 이런데도 뭐? 정말 가소롭다!”

바츠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옮겨 자신의 카니지를 훑었다. 어느덧 자신의 카니지가 붉게 변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버니에투와의  카니지와 비교하면 한참 옅은 색이었지만, 눈으로 확인될 만큼 붉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가 말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지? 그래놓고 내가 어떻다고? 웃기지 마. 우린 다 똑같아! 우린 결국 누군가를 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괴물들일 뿐이야! 나만 괴물이 아니라고! 우린 전부 괴물들이야!”

그는 바츠를 힘껏 밀어내고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왔다. 조금도 차이가 없는 같은 동작의 반복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듯 끊임없이 휘둘렀다. 바츠는 그의 빤한 공격조차 피해내지 못할 만큼 지쳐있었다. 고작해야 뒷걸음질과 함께 검을 가로로 들어 올려, 막아내는 데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손목과 팔꿈치가 모두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차츰 감각이 없어지고 있었다. 이를 악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옆으로 몸을 빼낼 수 있을 만한 기력도 없었다.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감각들은 머지않아 바츠를 집어삼켰다. 바츠의 카니지는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고, 바츠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칼날은 광기어린 눈과 함께 계속해서 내리꽂히고 있었다. 마치 헤러티커가 다 잡은 먹이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소리쳤다.

“날 그딴 눈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아무도 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바츠는 억울한 마음을 담아 그에게로 외쳤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과 아델리나를 살해하기 위해 쫓은 것도, 그가 아델리나를 놈들에게 넘긴 것도 그리고 그가 지금 자신을 향해 칼날을 휘두르는 것도 모두가 너무도 낯설었다. 테라치를 중심으로 모여서 함께 검술을 연습하고 공부를 하던 기억들이 빠르게 스쳤다. 그 기억들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미사 훈련소의 2학년으로 승급했을 때만 해도 이런 현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모두가 똘똘 뭉쳐 있었다. 테라치는 언제나 가장 앞에서 완벽한 칼날이었고, 아델리나는 가장 가까이에서 옆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버니에투와는 가장 뒤에서 듬직한 방패가 되어주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뿔뿔이 흩어진 기분이었다. 깊은 외로움이 느껴졌다. 바츠는 그 외로움을 억울함에 담아 다시 한 번 외쳤다. 그의 칼날이 이제 곧 이마를 내리치기 직전이었다.

“우리가 널 위해서 했던 걸 벌써 다 잊은 거야?”

버니에투와의 칼날이 정확히 바츠의 이마 앞에서 멈춰 섰다. 급속도로 냉각된 사람처럼 거짓말처럼 굳어졌다. 바츠의 방독면에 약간의 흠집이 만들어졌지만, 바츠는 물론이고 방독면도 전혀 다치지 않았다.

“널 위해서 우리가 전부 나서줬던 걸 잊은 것이냐고! 널 위해서 그런 거라고! 너로 인해 가이즈카가 사고를 당했을 때 말이야! 난 네 어머니가 널 위해 걱정하던 걸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 너만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너에게 실망한 적이 없어! 미워한 적도 없고! 네 형이 네게 인식표와 편지를 보내준 이유를 모르겠어? 그건 널 조롱하기 위한 것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더 헌터가 되려고 했던 것 아니야? 대체 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잘못된 건 모두 너라고! 대체 뭐가 문제야!”

“바츠...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여긴 어디지?...”

바츠의 외침에 번뜩이던 그의 눈빛이 빠르게 사그라졌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빛날 것 같았지만, 이제는 평범하다 못해 흔해빠진 보통의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히려 바보처럼 멍하기까지 했다. 바츠는 그의 칼날을 손으로 쳐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갑자기 생긴 힘인지 몰라도, 높은 벽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그의 멱살을 붙들며 소리쳤다.

“버니, 누구야!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누가 너에게 이런 짓을 시켰느냐고!”

버니에투와가 가까스로 바츠에게 초점을 맞추며 말했다. 아르크에서 보여주었던 진짜 그의 모습이었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어눌해 보일 정도로 너무 순한 모습.

“그 사람이야...그가 그랬어. 재앙이 스톡홀름으로 가는 걸 막아야 한다고 그랬다고. 내게 임무를 준다고 했어. 그럼 내가 형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고 했지. 그래, 그때 그랬어. 내가 지상으로 나오고 처음으로 아르크에 돌아갔던 그 날...내가 이것만 제대로 해내면 형도 하지 못한, 우리 가족들이 레벨2로 갈 수 있는 업적을 쌓게 되는 거라고 그랬다고. 아델리나도 내 성공한 모습에 기뻐하게 될 거라고 했어. 아델리나가 널 좋아하는 건 네가 집사라는 대단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너희를 쫓았어. 네가 가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했어.”

“버니, 이 바보야! 대체 그가 누구야? 누군지 말 해!”

“부사령관...그가 내게 그랬어...그런데 그가 그자에게도 같은 임무를 준 것 같아.”

바츠는 방독면 렌즈로 쏟아지는 그의 시선에 두려움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는 분명 겁을 먹고 있었다. 그저 그의 시선을 바라보는 것만인데도, 그 두려움이 전염되는 것이 느껴졌다. 흥분한 가슴이 절로 진정되고, 몸이 으슬거린다고 느껴질 만큼 싸늘했다.

“그자는...누군데?”

버니에투와가 거의 눈물을 흘리기 직전에 눈빛으로 대답했다.

“‘라파엘’ 스타드.”

============================ 작품 후기 ============================

음...버니에투와의 반응이 조금 억지스럽게 느껴지실 거라고 예상됩니다. 아마도 정말 오래 전에 언급이 되기는 햇지만 그 효과가 매우 흐릿했기 때문일 텐데요, 공지에 밝혔듯이 제가 소설 전개 일부 분량을 들어냈기 때문입니다...죄송합니다. 사실 아르크 미사 2학년 생활을 그린 부분이 바로 이런 크고 작은 사건에 밑그림이 되는 시초인데, 제가 그 부분을 통째로 들어냈죠...그 분량이 거의 종이 책으로 1권 분량이었습니다...예정대로라면 그곳에서 분위기가 만들어졌을 겁니다. 제가 스스로 조급함을 느끼고 빠르게 진행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며 만들어진 참사입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너그럽게 이해하고 봐주셨으면 합니다. 완결 이후 후기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정식으로 그리고 제대로 해명이나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