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 신을 거부하는 자 -- > * 225화 *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죠. 우리에게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은 주시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시련과 함께 벗어날 길도 함께 마련해주신다고 합니다. 전 그 말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절 이렇게 시험하시지만 항상 그래왔죠. 그분의 말씀대로 전 계속해서 이겨내 왔고, 이번에도 그럴 겁니다. 지금 당신은 내게 그 시련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바츠는 그가 건네는 말을 듣고 나자, 자신이 얼마나 무모하게 대처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을 만큼 긴장감에 치가 떨렸다. 한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하는 그의 몸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는 착각이 든 것이다. 마치 아르크 플랫폼에 차오르는 수증기 같았다. 바닥에서부터 피어오른 뿌연 연기가 삽시간에 천장에까지 닿았다. 이대로 서 있다가는 그에게 깔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카니지를 쥔 손이 떨려왔다. 그에게 위축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써 힘을 주려고 노력하면 경련만 더 심해질 뿐이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바츠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경직된 눈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레이븐과 캣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안고 있는 아델리나도 보였다. 그녀는 잠이 든 것처럼 시커먼 고요를 덮고 있었다. 머지않아 걷혀질 얇은 담요였다. 그녀가 그 얇은 고요를 덮고 싸늘함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미안했다. 조금만 신중했더라면 보다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죄책감에, 짧은 시간동안 스스로를 몇 번이나 책망했다. 물론 그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는 안다. 이네오가 결코 호락호락 보내줬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믿고 싶었다. 자신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성급함으로 이루어진 참사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뭔가 더 나은 방향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자꾸만 반복했다. 그 사이 바짝 다가온 그가 말했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주 당신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의 결의에 찬 목소리가 그가 들고 있던 톤파와 함께 날아들었다. 지난 날 전진기지에서 들었던 천둥소리가 그의 톤파로 변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크게 휘둘러진 그의 톤파가 어스름한 허공을 스치며 바츠의 이마로 향했다. 바츠는 그 공격을 카니지를 들어 올려,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바로 앞에서 별다른 속임수 없이 내두른 공격이었지만, 오래 전 어둠과 함께 조롱하던 헤르만이 절로 떠올랐다. 이네오는 그때의 헤르만보다도 훨씬 위협적이었다. 단순히 자신의 몸이 허약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보고 느낀 대로 너무나 강했다. 헤르만과 비교한 것에 미안함을 느껴야 할 정도였다. 톤파 특유의 빠른 연계가 시작했을 때에는 거대한 좌절을 마주해야만 했다. 눈앞에 허공이 그가 흩뿌린 죽음으로 가득했다.
바츠는 그 위압감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다. 손에 쥔 카니지가 그가 휘두른 톤파에 의해서 저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바츠의 모습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던져지듯 날아가며 바닥에 버려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바츠가 카니지를 빠뜨린 것에 놀랄 겨를도 없이, 톤파를 빙글빙글 돌려 바츠의 왼쪽 무릎 뒤를 움켜쥐듯 후려쳤다. 바츠는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크게 휘청거렸고, 그는 자신의 톤파를 그대로 바츠의 무릎 뒤쪽에 걸어 잡아당기더니, 결국 균형을 잃고 앞쪽으로 무릎을 꿇도록 만들었다. 바츠는 안타까워 할 틈도 없이, 주저앉듯 지면에 무릎이 닿아야 했다. 춤을 추듯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뚱이를 전혀 가눌 수가 없었다. 그가 톤파를 바츠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얹으며 말했다. 바츠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아무런 감정도 묻어있지 않았다. 오로지 서늘한 죽음이 감돌뿐이었다.
“주님께서 명하시길, 힘과 용기를 내어라 하셨죠. 그리고 무서워말고 놀라지도 말라 이르셨습니다. 어디를 가시든 주 그분께서는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냥 그분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럼 주님께서는 당신의 후회를 자애로움으로 지켜주실 겁니다.”
바츠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내가 후회하는 것은 오직 하나야. 아델리나를 지킬 수 없었다는 것. 나의 무능함에 대한 한숨뿐이다.”
“다시 기회가 주어져도 같은 선택을 할 겁니까?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지금이라도 그분을 믿으시면 됩니다. 그분은 아주 너그러우신 분이시죠.”
바츠는 그가 기계적으로 내뱉는 목소리를 피해, 또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븐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바츠의 시선은 그가 아닌 그보다도 더 뒤를 향했다. 캣과 아델리나. 캣이 온전히 자신에게 맡겨진 아델리나를 겨우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에게 혹시라도 무리라도 갈 까봐,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캣의 시선은 그녀가 아닌 레이븐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아니라며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바츠는 고개를 다시 바로해서, 이네오를 올려다보았다.
“거절한다. 다시 또 내게 기회가 주어져도 다르지 않을 거야. 난 그때도 이렇게 너를 향해 칼을 겨누겠다. 내가 믿는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야.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너를 위한 그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아델리나와 우리를 위한 새로운 힘이거든.”
이네오가 자신의 톤파를 높게 치켜들었다. 이제 휘두르기만 하면 그는 바츠의 이마는 물론이고, 커다란 바위도 부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츠의 이마에 앞서, 어느새 이곳까지 달려온 레이븐에게로 먼저 휘둘렀다. 레이븐은 몸을 날려 그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자신의 톤파로 가까이 접근한 레이븐의 안면을 정확히 가격했기 때문이었다. 레이븐은 그의 공격을 얻어맞고는 옆을 스치듯 지나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얻어맞은 부위도 상처가 심하겠지만,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며 지면에 부딪힌 안면은 그에 못지않은 충격을 그에게 전해주었을 것 같았다. 그가 쓰러지며 낸 소음이 바위가 부서지는 것과 흡사하게 느껴졌다. 이네오가 다시 톤파를 치켜들며 바츠를 바라보았다.
“이단은 죽음처럼 강하다.”
바츠는 눈을 감았다. 많은 기억이 덧없이 지났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하나의 생각이 차츰 머릿속을 수놓았다. 미사를 졸업하고 지상으로 나왔을 때, 죽음에 대해 초연했었던 당시 자신의 모습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이 왜 삶에 집착을 느끼지 않도록 만들었는지 알 것만 있었다. 미련은 매우 초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초라함을 이겨내기 위한 모진 감정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 있었다. 원인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장로 로리나가 말했던 속박으로부터 특별하다는 말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원망으로 다가왔다. 손과 함께 꿇어앉은 다리가 마구 떨렸다. 눈물이 날 것만 같고, 비명을 질러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유혹해오기도 했다. 너무도 부끄러웠다. 잠시였지만 아델리나를 버리고 달아날 생각을 했다는 것이 너무도 치욕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수치스러운 것은 이 모든 감정이 온 몸으로 뿜어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느껴졌다. 앞에 선 이네오가 눈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 전해지고 있었다. 마지막 존엄성이 갈갈이 찢기고 있는 기분이었다.
바츠는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싶었다.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아 있는 캣이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을 뜨고 잠들어 있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캣은 조금 달랐다. 캣은 아델리나처럼 굳어져 있었지만, 눈동자는 오히려 생기가 넘치듯 급격히 커지고 있었다. 거리가 제법 있는데도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조금 의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레이븐이 힘없이 쓰러진 모습에 놀랐다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동시에 아직까지도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는 이네오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라면 벌써 자신의 머리를 후려치고도 몇 번을 더 짓이겼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캣의 반응보다도 더 신기한 일이었다.
바츠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순간 굵은 쇠몽둥이가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 보였고, 그 쇠몽둥이의 주인인 이네오가 성취감을 느끼기도 전에, 옆으로 치이듯 나가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거센 바람에 날리는 먼지 같았다.
바츠는 그쪽을 향해 얼른 시선을 옮겼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바로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서 날아온지 모르는 바람이 던진 것으로 보이는 낡은 옷가지가, 허공에 펄럭이며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옷가지는 결국 지면으로 떨어졌고, 이내 이네오가 자신을 덮친 커다란 바람과 짐승처럼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두 배는 큰 거대한 바람과 지면을 뒹굴며 엎치락덮치락 했다.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바츠는 이네오와 호각으로 다투는 바람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커다란 덩치의 등에, 작고 흉측한 모습의 아이가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의미 없는 몸짓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정체를 정확히 인지했을 때, 뒤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움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반가움이 뒤섞인 묘한 목소리였다.
“뭐야, 이거. 저 녀석 제정신이 아닌 줄 알았더니 정말이었잖아.”
바츠는 그 목소리를 향해 시선을 옮기기도 전에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에르네스트...어떻게 된 거야?”
바츠는 자신의 눈동자가 캣처럼 크게 팽창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그가 다가오며 말했다.
“저 뚱뚱한 녀석이 갑자기 아델리나 냄새가 난다는 거야. 가야 한다고 난리를 치더라고. 그래서 멋대로 하라고 했더니 정말 여기서 만나게 됐네. 이것 참...저 녀석 감각이 아주 대단한대? 그런데 넌 뭐하고 있는 거야? 아델리나는?”
그는 양손에 물에 젖은 헝겊처럼 푹 가라앉은, 두 사람의 목덜미를 꼭 쥐고 있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저쪽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이네오를 기다리던 그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삶을 잃고 멀리 사라진 상태였다. 그 어떤 미련도 느낄 수 없었다. 그가 그들의 시신을 바츠 앞에 버리듯 던져놓더니,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너...지금 다친 거야? 설마...아델리나는? 아델리나는 어딨어?”
바츠는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가 마치 전보다 훨씬 밝아진 회색빛 하늘을 등에 이고 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부로 크게 숨을 삼키며 애써 참아내고는 뒤쪽을 가리켰다. 자신이 생각해도 유치하게 느껴지는 바보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다시 아이가 된 것 같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저기에 있어. 저 녀석들이 아델리나를...아델리나를!”
바츠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차분하기 위해 했던 노력이 무색할 만큼, 감정이 복받쳐 올라버렸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캣과 함께 있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한 번 다녀오더니,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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