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 이별 -- > * 227화 *
“그래, 몸은 이제 좀 괜찮나?”
그가 환한 얼굴로 반겨주었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 뭔가를 열심히 옮겨 적고 있었는데, 바츠가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멈췄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그런 행동보다도, 한쪽에 삐딱하게 서서 바라보는 게르하르트가 더욱 신경 쓰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대고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아직까지 감정이 남은 듯 보였다. 바츠가 닥터의 물음에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끼어들며 물었다.
“실패했다지?”
바츠는 고작 한마디 밖에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 수많은 조롱이 담겨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실망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한쪽 입술을 꿈틀대며 이죽거렸다. 바츠는 순간적으로 감정이 요동치며 분한 마음이 들어야만 했다. 그간의 고생이 하찮게 폄하되는 것 같아 매우 억울했다. 특히 아직까지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아델리나의 얼굴이 스치며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닥터가 먼저 나서서 그에게 주의를 주는 바람에, 감정을 표현할 기회는 없었다. 그가 닥터의 지적에 머쓱해하며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던 것이다. 함께 온 에르네스트도 옆에서 거들며 그를 나무랐다. 닥터가 그런 에르네스트에게 손바닥을 펴 보여 진정시키고는 바츠에게 말했다.
“저 친구가 저렇게 말해도, 자네 걱정을 많이 했네.”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게르하르트가 발끈하며 소리를 질렀다. 꼭 숨겨둔 보물을 들킨 사람 같았다. 그러자 닥터가 그를 향해 능청스런 미소를 보내며 물었다.
“분명 자네가 하루도 채 되기 전에, 지금이라도 보내달라고 보챘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틀린가?”
“난 단지 에르네스트가 걱정되었던 것뿐입니다!”
닥터는 그의 변명에 대한 대답을 콧방귀로 대신했다. 시선도 그를 무시하고 바츠에게로 옮겼다. 그러자 그가 벽에서 몸을 일으켰을 정도로 흥분했다. 당장 닥터의 책상 앞으로 달려가 그에게 따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닥터는 그런 그를 간단한 손짓으로 물리쳐 버렸다. 그가 걸음을 옮기기도 전이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닥터를 노려보았지만, 금방 다시 전처럼 벽에 등을 기대버렸다. 닥터에게 목소리를 높여봤자, 별 소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체념한 모양이었다. 씁쓸하게 입맛만 다셨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에르네스트의 눈치도 보았다. 그 사이 바츠는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닥터가 말했다.
“아직 조금 불편할 것이네. 완전히 회복하려면 적어도 20일 가까이 소모될 것이네. 자네가 무척 건강하다면 열흘로도 충분하겠지.”
“아델리나는? 아델리나는 어떻지?”
바츠의 물음에 닥터가 몸을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대답했다. 중간에 몇 번이나 바츠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녀도 한 달 정도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네. 단지...제대로 걷게 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군. 어쩌면 영원히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네. 발배뼈를 지름 3cm 말뚝이 관통했네. 최선은 다했지만 현재로서 완치는 할 수 없었네...하지만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말이네.”
바츠는 대답대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이미 바츠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가질 수 없겠지. 자궁 손상이 너무 심하네. 응급조치를 한 것도 너무 서툴러서 오히려 화를 키웠네. 그저 출혈만 막겠다는 생각이었겠지? 출혈이 적어서 안심했을 거야....”
닥터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했다.
“...그래도 그것 말고는 문제가 없네. 말이 조금 이상한가? 이해하게. 위험한 고비는 이미 다 넘겼으니까 말이네. 이곳까지 숨통이 붙어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왜 깨어나지 못하고 있지? 당신 말대로라면 눈을 뜨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바츠의 물음에 닥터가 사색에 잠긴 사람처럼, 바츠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시선을 흘리듯 띄우며 대답했다.
“글쎄...너무 지쳤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깨어나기 싫은 것일지도 모르고. 나도 모르네...미안하네.”
바츠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게르하르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가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다가 얼른 시선을 피해 고개들 반대쪽으로 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매우 어두웠다. 그가 마치 자신이 벌인 일인 것처럼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타까운 감정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닥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츠는 시선을 다시 닥터에게로 옮겼을 때, 그가 자신의 시선을 허공에 흩뿌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미안해하지마. 말해봐. 당신은 알고 있었을 거야. 틀림없어. 결과가 결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런데도 날, 그런데도 우리를 보낸 이유가 뭐지? 에르네스트 때문인가? 녀석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나를 골탕 먹이고 싶었던 것인가? 일이 기대한대로 흘러가면 그것대로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었잖아. 당신으로서는 뭐가 되었든 손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지. 말해봐. 우리를 왜 보낸 거야. 당신이 날 보낼 때 했던 말은 그저 핑계였잖아.”
닥터가 훔쳐보듯 시선만 빠르게 바츠의 얼굴을 한 차례 다녀갔다. 바로 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거운 침묵을 만들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그는 잠시 후에 바츠가 아니라, 그 뒤에 서 있는 에르네스트에게 시선을 옮기고 대답했다.
“자네가 말했지 않나. 이단은 빌어먹을 것이라고. 난 그 빌어먹을 것이 무엇인지 자네가 진짜로 알 길 바랐을 뿐이네. 자네 말대로 에르네스트가 직접 보고 경험할 수 있길 바랐고 말이네.”
“왜지?”
바츠 역시 질문은 닥터에게 했지만, 시선은 고개를 돌려 에르네스트를 향하게 했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닥터를 마주보고 있었다. 닥터가 힘 줘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우리의 미래네. 그리고 난 죽어가고 있지.”
“닥터,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죽다니요! 당신은 영원히 살 수 있잖아요! 우린 기체를 가지고 있잖아요!”
에르네스트가 크게 놀라며 소리쳤다. 믿기 힘든 듯 보였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츠 역시도 뜻밖의 대답에 제법 놀라고 있었다. 수백 년의 살아온 사람이 느닷없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하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닥터는 에르네스트가 더 이상 수선 떨지 못하도록, 그를 향해 자신의 한쪽 손목과 고개를 동시에 까딱여 진정시키고는 말했다.
“엘, 네가 보이기에 내가 어때 보이지? 내가 여기서 이렇게 많은 책들을 적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영원이라는 건 없어. 내 기체는 이미 노후화되었다. 그리고 재원은 한정되어 있지. 우린 새로운 기체를 만들어내기는커녕, 당장 스톡홀름의 장벽을 보수하는 데에도 벅차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니었나?”
“그것들 보다 당신을 먼저 고치면 되잖아요!”
에르네스트가 바츠 옆을 지나 닥터의 책상 앞에 바짝 붙으며 소리쳤다.
“아니, 그런 것은 의미가 없어. 새로운 것만이 진짜 새로운 것을 만든다. 그게 내 생각이다.”
“맙소사, 그랬다가는 이곳은 망하고 말 거예요! 당신이 없다면 다들 두려움에 떨고 말거라고요! 당신만큼 이곳을 잘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게르하르트, 당신도 말 좀 해요!”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목소리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지, 게르하르트까지 끌어들였다. 그가 함께 말해주면 좀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게르하르트는 조금 전 바츠의 시선을 피했던 것처럼, 그의 얼굴을 외면했다. 다만 전과 다르게 칼로 자르듯 냉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에르네스트를 외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지 고개를 몇 번이나 머뭇거리며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전혀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자 닥터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쉬며 말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완벽하게 공정했던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를 이끌 미래는 누구보다도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이야. 난 네가 그들을 통해 우리를 다시 돌아보며, 그게 무엇인지 깨닫길 바랐다. 그리고 자네도 마찬가지고.”
닥터가 오랜만에 바츠에게 시선을 주었다. 바츠는 물었다.
“당신들의 미래까지는 이해하겠어. 하지만 나는 왜지? 내게 그럴 필요가 있었나?”
“그때, 그러니까 인류가 멸망할 쯤 사람들이 자네와 같았거든. 어쩌면 자네보다도 훨씬 더 위험했지. 그들은 자네처럼 끊임없이 의심하고 탐구했네.”
“그건 좋은 것이잖아. 당신도 그렇게 말했지.”
“물론이네. 하지만 문제는 그 답을 이미 정해 놓은 상태였다는 게 문제였네.”
“무슨 말이지?”
바츠가 묻자, 그가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후회처럼 아련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그들의 의심과 탐구는 자신이 추측하고 바라는 대답을 얻기 위한 부산물이라는 것이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진실이 궁금했던 것이 아니란 말이네.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결과가 나오길 바라던 것일 뿐이었지.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가? 그 결과에 맞추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비틀지. 그건 결국 파멸을 만날 뿐이야. 아무런 발전도 없이 혼란만 야기하지.”
바츠는 그의 대답에 문득 장로 로리나가 떠올랐다. 그녀가 말했던 혼란이 혹시 지금 닥터가 말하는 혼란과 같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밀려드는 의심이 그 생각을 떨쳐버리게 만들었다. 바츠가 물었다.
“당신 역시 진실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나? 내가 거기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온지 알아?”
“궁금하지 않을 만큼 빤하군.”
닥터가 시큰둥하게 느껴질 만큼 태연한 모습으로 대꾸했다. 바츠는 그 모습에 약간 불쾌함을 느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는 그가 솔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선심을 쓰듯 물었다.
“내가 할 말을 듣고도 계속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말해 보게. 나를 놀라게 하고 싶은 건가? 내 생각으로는 그럴 것 같지 않네. 하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놀란 척은 해줄 수 있네.”
바츠는 콧방귀로 그의 당당함을 비웃고는 말했다.
“그들이 그러더군. 그들이 당신들을 혐오하는 이유는 당신들의 삶에 방식이 몹시 더럽기 때문이라고. 여자를 윤간해서 강제로 아이를 낳게 만든다지? 내가 당신을 믿게 만들려면 솔직한 게 좋을 거야.”
닥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의 브루드 메어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어렵고도 불쾌하게 하는 군. 자네에게 그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네.”
“그래? 그럼 변명을 해봐. 내가 당신은 물론이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더 이상 모욕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바츠는 고개를 돌려 에르네스트와 게르하르트를 차례로 살폈다. 에르네스트의 표정이 잔뜩 굳어지고, 게르하르트가 고개를 숙이며 고민스런 얼굴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쉽지 않은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닥터가 그 둘에 못지않은 신중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변명이랄 것이 있나? 그것이 사실인데. 나와 함께 그녀를 만나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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