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28화 (228/268)

< --   14. 이별   -- >         * 228화 *

“닥터!”

게르하르트가 고개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 정말 놀란 듯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는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닥터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 게르하르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괜찮네. 믿음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지 해야 하네. 그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지. 그리고 그 믿음은 꼭 이해로써 만들어지는 건 아니네. 눈으로 보고 인정할 수만 있어도 충분하지. 난 확신하네. 이해하고 납득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인정해줄 수 있으리라 말이네.”

닥터가 바츠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 기대감이 묻어났다. 에르네스트의 표정에 복잡한 감정이 서리며 굳어지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뭔가 불편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게르하르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에르네스트의 크고 작은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치 에르네스트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닥터가 단 둘이 다녀오겠다며 이곳에서 에르네스트와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을 때에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기겁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에르네스트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르네스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할 사람 같았다. 정말 끔찍이 아끼기 때문인 듯 했다.

“이곳이네.”

바츠는 닥터와 함께 옆으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 옆 건물로 옮겨간 뒤, 그곳의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불투명 유리로 막힌 방이 있었는데, 그 문이 열리고 다시 앞을 가로 막는 투명 유리 문 너머로, 오로지 깨끗하다는 단어만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깨끗한 바닥과 깨끗한 천장 그리고 깨끗한 벽과 깨끗한 조명까지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레벨6과 스톡홀름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아르크 나르의 방이 절로 떠올랐다. 하지만 나르의 방에 가득하던 허전함과 외로움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들이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흩뜨려 놓여있었고, 전진기지에 있는 축음기에서나 나올 법한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또한 알록달록한 색감이 즐비했고 한쪽에는 녹색 빛이 또렷한 꽃과 식물들도 있었다. 지상의 피로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한 휴양지로 매우 탁월해보였다. 하지만 정작 방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피비린내를 두른 헌터도 아니고, 지상을 떠돌던 야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음을 앞두고 위로를 받기 위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젊은 여인과 각기 다른 연령의 세 아이 그리고 그들을 돕고 있는 중년의 여인 넷이 전부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질 만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스톡홀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지.”

닥터가 투명 유리 문 앞에서 멈춰서 말했다. 바츠는 방 안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아이들은 대부분 고작해야 2살 안팎밖에 되지 않아보였고, 그 중에서도 아직 걸음마를 떼지 못했을 만큼 어린 아이가 눈에 띄었다. 그 아이의 금발과 푸른 눈이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다 자라면 꽤나 아름다울 것 같았다.

중년의 여인들은 그 아이들을 각각 한명씩 전담해서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젊은 여인 곁에 머물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젊은 여인과 더불어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그녀는 젊은 여인을 챙기는데 더 바빴다. 중년의 여인들은 마치 레벨2로 허드렛일을 하러간 레벨1 거주자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고생으로 인한 힘든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부심과 더불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젊은 여인과 아이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바츠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젊은 여인의 얼굴이 아델리나와 거의 흡사할 만큼 닮아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터무니없다고 느껴질 만큼 믿기 어려워, 그녀의 얼굴에 한 번 고정한 시선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에르네스트의 누이네.”

닥터가 바츠의 시선을 읽고 말했다. 약간의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바츠는 그런 그를 황급히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우린 새로운 이주민을 환영하네. 대신 특별한 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아야만 하지. 유전자 검사가 바로 그것이네. 그것만 한다면 그 누구라도 스톡홀름의 주민이 될 수 있지. 모두 보다 더 우월한 인간을 만들기 위한 일이네. 환경에 적응하고 빠르게 진화하는 그런 인간 말이네. 진화와 적응만이 인간을 강하게 만들지. 그건 우리가 가진 축복이네. 나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네. 나 같은 사람들은 사라져야 하지. 세상은 다시 진짜 인간들로 가득해야 하네. 그것도 강한 인간들 말이네. 우리가 주민들에게 유전자 검사를 받도록 하는 이유네. 보다 탁월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이지. 보다 빠르고 훨씬 강해지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네. 무엇보다도 어머니라는 자리가 매우 중요했지. 남자의 유전자는 수십억의 다양성으로 나타나지만 여자는 단 하나뿐이니까 말이네. 상대적으로 훨씬 희소하지. 그래서 우린 주민이 되는 여자 중 그에 부합되는 젊은 여자를 선출하기 위해 노력해 왔네.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하지 않나. 그때마다 새로운 어머니를 구해야 했지. 그리고 에르네스트의 누이도 그 중 하나인 것이네.”

“설마...게르하르트가 그녀를 겁탈했나?”

바츠의 물음에 닥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네. 그리고 우린 그런 것을 원치 않네. 우린 브루드 메어가 되어줄 어머니에게 우리가 처한 현재와 우리가 마주하게 될 미래를 정확히 인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명을 하네. 그리고 선택하게 만들지. 그녀는 자신의 선택으로 결정한 것이네. 그리고 저 아이들은 그녀가 낳은 아이들이지. 저기 지금 그녀가 안아드는 아이가 가장 최근에 낳은 아이네.”

바츠는 닥터가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녀가 아까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걸음마도 떼지 못한 금발의 아이를 품에 안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닥터가 말했다.

“우린 결코 브루드 메어에게 강제하지 않네. 그녀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남자도 엄격하게 선별하지. 그리고 그 남자들을 허락하는 건 브루드 메어의 몫이네. 우린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선견지명을 믿기 때문이네. 그녀들이 거부한다면 우린 강요하지 않지. 그녀들이 받아드릴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생명이 잉태한다고 생각하네.”

“아버지는 누구지?”

바츠의 물음에 닥터가 바츠의 옆모습을 한 번 돌아본 뒤,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옮기며 대답했다.

“자네가 떠나기 전에 내가 했던 말을 전부 기억하나? 자네가 오기 전, 마지막으로 다녀간 헌터였네. 그는 매우 강력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지. 난 기대하고 있네. 저 아이는 나를 대신할 에르네스트를 도와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지.”

“그런데 그녀는 왜 당신들의 제안을 받아드렸지? 그녀가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 원대한 미래를 함께 하겠다고 생각한 이유 말이야. 그녀가 그럴 필요가 있었나?”

닥터가 안쓰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말했다.

“에르네스트 때문이었네. 정확히는 게르하르트 때문이라고 해야겠군.”

“무슨 말이지? 게르하르트는 그녀와 상관이 없는 것 아니었나?”

“상관이 없다고 한 적은 없네. 그녀와 에르네스트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덕분이었으니까 말이네.”

바츠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려 빤히 바라보며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가 우수에 젖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벌써 몇 년이 지났을 만큼 오래 전이군.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누이와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네. 그리고 그날 게르하르트는 근처에 출몰한 헤러티커가 민스크 시티를 다녀오던 주민들을 공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갔네. 하지만 이미 헤러티커는 주민들을 모두 살해했고,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떠돌이들을 공격하고 있었지.”

“그게 그 둘이었나?”

닥터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어린 남매였는데, 동생은 오른 팔이 잘린 채 죽어가고 있었고 그 누이도 곧 살해당할 차례였네. 아니, 그렇게 들었네. 그리고 게르하르트는 그 둘이 죽기 전에 구해왔다고 했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닥터는 바츠의 물음을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난 둘을 치료했네. 누이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지만 동생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 내가 가진 의술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 다행이었지.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더군. 둘은 갈 데가 없어, 이곳에 머물고 싶어 했지. 누이가 간곡히 청했네.”

“조금 전에 스톡홀름 주민이 되는 건 누구나 가능하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물론이네. 대신 검사를 받아야 했지. 그것도 별 건 아니었네. 우린 흔쾌히 수락했고, 우리의 규칙을 말해주었네. 문제는 그 다음이었던 거지. 에르네스트의 누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찾은 브루드 메어 중 가장 뛰어난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네. 우린 그녀에게 말했네. 하지만 그녀는 거부했지. 그녀는 아직 어렸거든. 두려워했지. 나중에는 에르네스트와 이곳에 머물지 않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때 게르하르트가 묘책을 내놨지. 동생을 치료한 대가를 요구하는 조건을 내걸자는 것이었네. 에르네스트는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했으니까 말이야. 그녀는 우리의 요구를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였네. 동생에게 의수 즉 기체를 주는 조건을 말이네.”

“그래서 지금 에르네스트가 기계 인간이 되어있고, 그녀의 누이는 여기에 있는 건가?”

닥터가 또 한 번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그러네. 처음에는 그에게 잘린 팔만 줄 생각이었네. 그 역시 그때는 어렸으니까 말이야. 우린 18살 이전에는 절대 기체를 권하지 않네. 시술을 해주지 않지. 성장이 계속 되고 있으니까 말이네. 하지만 우린 그가 완벽한 기체가 되려는 걸 말릴 수 없었네. 그는 자신의 누이가 이곳에 갇혔다고 생각하지. 누이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네. 우린 그가 강해지고 싶어 하는 요구를 꺾을 수 없었네. 그녀를 지키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네.”

바츠는 기분이 상쾌하다고 느껴질 만큼 의문들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와 게르하르트가 에르네스트를 끔찍이 생각하며 애정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르네스트가 아델리나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상쾌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레벨1에 가득한 붉은 쇳가루를 씹은 것처럼 씁쓸했다. 그 불쾌함을 닥터에게 고스란히 토해냈다.

“당신들도 미쳤군.”

닥터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는 듯 하다가, 바츠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을 뜨더니 물었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죄책감에 가까운 후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치 눈을 희번덕거리는 헌터들처럼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내가 약속한 이야기를 듣지 않을 텐가?”

“어차피 이건 당신들의 일이지.”

바츠는 콧방귀로 그를 한 차례 비웃어 준 뒤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하지만 때로는 빠르게 그리고 매우 진중한 목소리로 아주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