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 이별 -- > * 230화 *
그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힘이 없는 눈꼬리와 어두운 안색이 매우 서글프게 느껴졌다. 바츠는 기뻐해야 할 상황에 침울한 분위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당시 사회상을 설명할 때 이해하려던 것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그는 마치 그 해결책을 원치 않는 듯 했다. 그가 여전히 방 안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다논 회장의 제안이었네. 그가 중동 지역 전체에 값싸고 질 좋은 물을 공급할 것을 국가들에게 약속했던 것이네. 그는 헌신적인 사람이었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을 거야. 인근 국가 팔레스타인에 인공 호수를 만들기까지 했네. 그곳으로 담수를 실어 날랐지. 참 우직하고 바보스러운 사람이었네. 그는 그곳에 마르지 않는 수원(水源)을 만들고 싶어 했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담수를 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으니까 말이네. 특별히 가혹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부족이라는 단어를 몰랐지. 정말 큰 사업이었네. 대신 그 대가로 수혜를 받는 국가들로부터 보조금을 받았지. 천문학적인 금액이 소요되는 사업에 다논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네. 하지만 그 액수는 국가들이 전쟁이나 담수를 확보하기 위해 드는 비용에 비해서 훨씬 저렴한 수준이었고, 각 정부는 사람들의 각별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니 여러모로 값어치가 있는 일이었네. 아마 당시 사람들의 정부에 대한 환호가 역사상 그렇게 열렬했던 적도 없었을 것이네. 그건 단순히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분쟁거리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네. 그곳은 정말 복잡한 곳이었네. 다논이 많은 부분을 부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하나의 비용을 여럿이 나눠 내는 셈이 된 것이 아닌가? 그것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말이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지. 누군가는 그런 그를 음흉한 꼼수를 가지고 있는 기회주의자라고 폄하했지만, 해당 국가들에게만큼은 구원자였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논이 손해를 보았던 것은 아니었네. 그들의 브랜드 가치는 상승했고, 생수판매 자체만으로도 투자금 회수에 어려움이 없었지. 그래서 그를 시기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네. 어쨌든 전운은 그렇게 사그라졌네. 고질적인 감정의 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 싸워야 할 명분만큼은 확실하게 사라졌지. 애플 구글 공화국만 정식 국가로서 입지가 탄탄해지는 수확을 거둬갔네. 해외 파병이 주는 의미는 곧 자주성을 입증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네. 심지어 그들은 그 기회를 통해 전단(戰團) 운영 계획까지 세워 공표함으로서 더욱더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고히 했네. 그리고 그 다음해가 되었을 때, 그때가 바로 자네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이 시작될 조짐이 나타나는 시기이네.”
2030년 세계적으로 물 부족의 심각성이 대두 되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그 문제에 대한 우려와 논의가 계속되어왔지만, 실질적인 필요성으로 인해 모두의 관심을 끌어 모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난해 중동에 불어 닥친 커다란 전운이 경각심을 일깨우는데 일조한 덕분이었다. 게다가 남아메리카 국가 브라질의 아마존 강에 수인성 질병이 돌며, 유역 수천만 ha의 우림에 식물들이 고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는 전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강물을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수 처리로도 한계가 뚜렷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수인성 질병이 원인을 찾기도 전에 아메리카 전역은 물론이고 유럽에까지 빠르게 확산되었던 것이다. 위기감을 느껴야 할 정도로 그 심각성이 분명했다. 그리고 원인은 그때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각종 산업 폐기물로 인한 환경오염 때문이라는 추측만 나돌았다.
덕택에 생수 사업은 유사 이래 가장 큰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오염되지 않은 수원지에서 퍼낸 생수들이 전 세계 각지에서 부족할 정도로 팔리기 시작했고 가격은 급속도로 솟구쳤다. 다논의 주가 역시 덩달아 수직 상승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다논은 단 한 기업을 제외하고 전 세계 모든 생수 기업들을 인수 합병한 상태였다. 그리고 남은 그 하나는 티난트라는 기업이었는데, 워낙 다논이라는 브랜드의 호감도가 높아 수혜를 입은 것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다논의 회장이 의도했던 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었지. 그리고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해수면 상승의 위험이 현실화되고 있었네. 침수 위험에 놓인 대도시들의 내륙으로 이전이 탄력을 받기 시작한 것이지.”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오던 도시 이전 사업이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짐작이나 가는가? 세계 경제를 지탱하던 각국의 대도시가 이동하고, 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귀해졌지.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면 그것에 못지않은 대혼란이었을 것이네. 모두가 불안해했지.”
“현재 도시들 일부가 물에 잠긴 것이 그때부터였군. 그런데 지금 나에게 이런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지?”
바츠가 결국 지루함을 표현하자, 그가 그런 바츠를 진중한 눈으로 돌아보며 대꾸했다. 미련으로 가득한 눈이었다.
“아니, 도시들이 물에 잠기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만 하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 당시 국가들은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었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자네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네. 모두 알고 있어야만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네.”
바츠는 그의 회유에 잠시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그가 괜한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그 어떤 불순함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바츠는 탐탁지 않은 심정을 짧은 한숨으로 내뱉고는 고개를 끄덕여만 했다. 그를 믿었다. 그러자 그가 바츠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듯,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더니 결국 바닥에 고정하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2034년 전 세계에 내리는 빗물의 90프로가 중금속 함량 기준치를 초과하기 시작했다. 빗물을 음용수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비용이 필요로 하게 된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는 곧 아직 오염되지 않은 지하수는 물론이고 강물 등 모든 담수에 대한 비용이 상승한다는 것과 다논의 사업이 날로 번창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논 회장이 그토록 원하던 무기가 완성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뒤늦게 국가들이 다논의 생수 가격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고 통제를 시도했지만, 애플이나 구글 그리고 각국의 국가와 견줄 수 있는 혹은 초월한 기업들의 반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이 애플이나 구글처럼 독립 국가를 세우게 되는 것을 훨씬 더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뜻을 철회했던 것이다. 대신 국가적으로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는데, 2035년 각 국가들은 생수 수입과 판매에 더욱 박차를 가함과 동시에 빗물 정화에 많은 비용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일부 국가에서 강물을 다시 음용수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성과를 달성하지만 그다지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값이 치솟은 생수를 수입 판매하는 것이 그보다 훨씬 경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였네. 다논은 생수의 제조와 유통 그리고 판매에 제한을 두기 시작했지. 그가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네. 물론 중무장한 사병들을 고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네. 그 시기에 세계적인 기업들은 다들 이미 막강한 사설 군대를 가지고 있었지. 각국의 정부들은 더 이상 기업을 일방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게 되었네. 여전히 국가 내에 속하기는 했지만 그 위상이 전과는 매우 달랐지.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지기 시작했네. 폭력적인 시위가 끊이질 않았지.”
2042년 다논과 함께 남아있던 티난트가 재정상의 문제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생수를 제조하는 데에 드는 비용에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수익이 점차 줄어들든 것이 문제였다. 다논에게 상징처럼 여겨지는, 3차 세계대전을 미연에 막아낸 도덕적인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사람들의 선택을 고민하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티난트가 두 배나 싼 가격에 내놓은 계획도 소용이 없었다. 극심한 빈부 격차로 양극화된 소비자들은 돈이 많으면 다논을 선택하였고, 돈이 없으면 티난트의 생수조차 사먹기 어려웠다. 그들 대부분은 제대로 정수되지 않은 수돗물을 음용수로 사용했다. 그렇게라도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다면 다행인 국가가 더 많았다.
결국 티난트는 공개적으로 세계 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다논의 생수 산업 독점화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다논이 횡포를 부리게 된다면 많은 국가들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대안은 자신들에게 투자해서 다논과 경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국가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물에 대한 예산 편성이 차츰 안정적인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논의 회장이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기 때문에 우려하지 않았다. 그가 즉시 유통 제한을 해제하고 충분한 양의 생수를 다시 공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물에 대한 투자보다는 최첨단 기계 연구 등 미래 산업에 투자하는 것이 보다 더 경제적으로 이득이었던 것도 한몫했다. 즉, 미래 산업을 통한 수익으로 물을 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기업들과 정부 모두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그 외에 사람은 이제 거의 안중에 없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재미난 줄 아나? 잔인한 고문을 일삼는 주인이 있네. 그리고 그에게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열 명의 노예가 있지. 그는 그 열 명을 일렬로 세워두고 벌을 주네. 벌을 주는 동안 오로지 분노만 쏟아낼 뿐, 그 어떤 다정함도 보이지 않지. 노예들은 그를 증오하고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불만과 비관으로 얼룩져 있네. 그런데 그가 그런 노예들 중 한 명에게 특별히 한마디 말을 건네주며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나? 그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지 묻는 것이네. 그들이 여전히 주인을 증오할까?”
바츠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고, 그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말을 계속 이었다.
“내가 대신 답을 말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가 정답일 것이네. 그들 중 일부는 주인의 그 사소한 행동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기 때문이네. 아닐 것 같나? 물론 모두는 아니네. 극히 일부겠지. 적당한 호감에서 끝날 수도 있네. 하지만 단 하나, 주인의 말을 건네받은 노예만큼은 확실히 변하게 될 것이네. 그는 오히려 주인이 자신들을 벌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하겠지. 그 이유는 당연히 주인의 못된 성격이 아닌 자신들의 부족함에서 찾을 테고 말이네. 주인이 자리를 잠시 비우면 그것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네.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나면 모두가 온갖 저주를 퍼부을 테니까 말이네. 단 한사람 바로 그를 제외하고 말이지. 어쩌면 그는 다른 노예들에게 주인을 옹호하는 발언을 할지도 모르네. 그리고 다른 노예들은 그를 의심하며 경악하겠지. 하지만 그것이 반복된다면 그 중 몇몇은 그에게 동조하기 시작하네. 그와 친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렇게 될 것이네.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노예라면 더할나위가 없지. 그러면 그들 사이에 편이 갈리기 시작하네. 파벌이 생긴 것이지. 그들은 어느새 주인에 대한 증오는 잊고 자신들끼리 비난하며 싸우기 시작하네. 주인과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고민과 불만이 아닌, 어느 쪽이 옳은가에 대한 싸움이지.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자신들이 왜 싸우는지도 잊게 되네. 그저 상대가 악으로만 느껴지지. 진짜 재미있는 것은 그때부터네. 주인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지. 주인은 변함없이 똑같이 행동하네. 그들을 잔인하게 벌하지. 하지만 받아드리는 것은 달라져 있네. 주인을 옹호하던 무리는 주인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참아내는 것이지. 그리고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아 주인에게로 전해지네. 그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그에게 복종하기 시작한 것이지. 주인으로서는 그들을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네. 그러면 주인은 그들과 남은 노예들의 대접을 다르게 하기 시작할 테고, 그들 사이에서는 결국 주인을 옹호한 쪽이 옳다는 결론이 나네. 즉, 다른 무리의 노예들에게 분열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이네. 대접을 받기 시작하는 그들이 되고 싶은 노예가 생겨나고, 끝까지 소신을 지키던 노예를 따라 함께 했던 노예들이 그를 원망하기도 하겠지. 완전히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네. 이쯤 되면 주인은 노예를 부리는 데 더 이상 매를 들 필요가 없지. 말을 잘 듣는 노예들에게 일을 시키고 밥을 주면 그만이니까 말이네. 소신을 지키며 여전히 말을 안 듣는 노예들을 따로 벌 할 필요도 없지. 말을 잘 듣는 노예들에게 맡기면 되네. 그럼 그들끼리 알아서 해결을 하게 되네. 그들에게 또 다른 주종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지. 그들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관계를 욕했지만 이제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순응하게 되네. 모순적이지? 주인은 이제 우아하게 앉아서 그들 중 가장 말을 잘 듣는 노예에게 명령을 하고 가끔 빵이나 한 조각 더 주면 되네. 정말 재미있지 않나? 열 명이 똘똘 뭉쳐서 주인을 살해하고 그의 재산을 빼앗아 똑같이 나누면 모두가 행복할 텐데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 노예라는 이름에서 달아나려고 했던 본질적인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나?”
그가 바닥에 고정하던 시선을 어느새 다시 방안으로 옮겨 넣었다. 그 안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여인들은 아직까지도 이쪽을 발견하지 못한 듯 보였다. 단 한 번도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그런 그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츠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며 기다렸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려 마주보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짙은 어둠처럼 매우 깊다고 느껴졌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네. 사람은 말이야 진실과 상관없이 확신이 없다면 망설이게 되네.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의구심이 자꾸만 자신감을 빼앗아가거든. 사람을 비겁하게 만드는 힘이네. 노예들도 자신들이 힘을 합치면 주인을 때려눕힐 수 있을 것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네. 하지만 한 켠에는 혹시 나 혼자서 달려들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의심이 동시에 떠오르며 공포에 사로잡혔겠지. 그 공포가 발목에 족쇄를 채우네. 스스로 포로가 되어버리는 것이지.”
바츠는 깊이가 있는 그의 시선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꼭 누군가가 머리를 붙들고 마구 흔들어댄 것만 같았다.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는 착각이 일이었다. 그러자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계속 이야기를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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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늦어지고 거르는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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