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 이별 -- > * 231화 *
바츠는 급히 고개를 내둘러 털어내고는 그에게 물었다.
“그 전에 듣고 싶은 것이 있어. 그 주인이 노예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그가 미소 지은 얼굴로 바츠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세기로 지그시 눌렀다.
“아무 말도 안 했네. 그저 눈을 맞추고 어깨를 두드려준 것이지. 그것이 곧 특별한 언어이자 말이었던 것이네.”
그의 기계 손은 딱딱하고 차가웠지만, 알 수 없는 안정감을 전해주었다. 마치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벽 같았다. 그가 말했다.
“그들이 사람들을 다루는 아주 영악한 방법이었던 것이지. 사람들을 모두 속인 것이네. 아무리 그들이 강력한 주도권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포로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난 것보다 강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네. 그들은 그 노예들처럼 자신들의 포로들이 이어온 자리를 지키게 만들어야만 했지. 그래야만 본인들의 편의와 더불어 오랜 시간동안 만들어온 자신들만의 질서가 무너지지 않을 테니 말이네. 다논의 회장이 계속해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해 나가야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지. 사람들은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말이네. 조금 전 그 노예들처럼 주인의 지능적인 술수로 인해, 부당함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 있었기 때문이네. 착각하고 있었다고 해야 하는 게 옳겠군. 어쨌든 그의 계획은 나름 순조롭게 흘러갔네. 티난트마저 결국 인수 합병시키며 생수 산업을 완전 독점하게 된 것이지. 세상에는 더 이상 그들이 파는 생수 ‘에비앙’ 말고 다른 생수는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네. 에비앙이 가정에 필연적인 식재료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네. 냉장고에 고기나 채소처럼 자리하게 된 것이지. 그리고 그때쯤 각국의 미래 기술은 꽤나 진일보한 성과를 내놓고 있었지. 마이크로칩으로 전신마비 환자를 걷게 하고, 지금 내 모습과 같은 정교한 기체를 탄생시켰네. 뿐만 아니라 손실된 신체를 대체하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지. 특히 장기를 대체하는 것은 꽤 보편화가 되었을 정도였네. 피부이식까지도 완벽해져갔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110살에 육박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로 기억하네. 혼란스러웠던 만큼 매우 빠르게 변해가던 시기였지. 산업화와 정보화보다도 훨씬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간수화(protectivization)였네. 다논의 회장은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지. 준비도 이제 완벽한 상태였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충분한 무력도 있었네. 물 공급을 빌미로 교섭을 통해 각국의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수가 있었지. 국가들이 사람들의 권익을 위한 노력을 다시금 하게 만든 것이었네. 각국의 정부들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지. 처음에는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이네. 그가 그것도 기업에서 왜 자신들을 압박하는 것인지 어리둥절했겠지. 그저 탐욕스럽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네. 하지만 외면할 수 없었겠지. 당시의 다논은 애플과 구글이 독립 국가를 건설할 때보다도 훨씬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었네. 덕분에 국가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지. 그것이 비록 반강제적이었던 것이지만 말이네. 그들이 언젠가부터 줄곧 외면하던 사람들을 위해, 정책을 발의하기 시작한 것이네. 하지만 이미 예상했겠지만, 그 끝은 그리 좋지 않네. 그의 계획이 이루어졌다면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았을 것이네. 그해 마지막을 얼마 남겨두고 그가 사망하였기 때문이네. 일각에서는 그가 살해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그의 나이가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었네.”
다논의 후계는 그의 아들이 물려받았다. 갑작스런 비보에도 승계는 커다란 혼란 없이 이루어졌다. 그의 아들에게도 그를 닮은 추진력 있는 강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일어날 재앙에 시작이었네. 우린 아니 그 누구도 그때는 그것을 몰랐네. 그의 아들이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이네. 그가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던 것이 바로 그의 아들이었던 것이네. 그의 아들은 아마도 세상 전체를 증오했던 모양이었네. 다논이 조금씩 변해가고, 그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계기였네. 가지고 있던 무력이 누군가를 위한 정의가 아닌 복수를 위한 횡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네. 삶이 길어진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지. 빈부격차는 아직까지도 크게 벌어진 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으니 말이네. 그리고 인간의 수명은 더욱더 늘어났지. 행복한 사람은 보다 더 긴 행복을, 불행한 사람은 보다 더 긴 불행을 느끼게 된 것이네.”
2051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개발한 만능세포 GCP가 양산화에 들어갔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당시 생수 다섯 병이라는 적지 않은 비용이었지만, 그렇다고 오래 살고 싶다는 욕구를 포기할 만큼 부담감이 있는 가격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며칠 목마름이나 굶주림에 시달릴 정도였다. 게다가 나중에는 40년 전 기타 예방 접종 가격 수준의 체감으로까지 비용이 낮아짐으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인간의 기대 수명은 150살까지 늘어났고, 실질적인 평균 수명은 120년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필사적으로 선택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아주 무겁게 지어야만 했다.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자신들이 무엇을 착각하고 있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네. 사람들은 고작해야 부에 대한 차등에만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 가진 자가 계속 가지는 악순환이 되고 있다고만 생각했네. 그리고 그 차등은 기회만 제대로 주어지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지. 스스로를 영리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네. 하지만 이미 앞서 말했듯이 진짜 속임수는 따로 있었네. 보이지 않는 계급. 수백 년 아니 그보다도 전부터 있었던 주종 관계가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단 말이네. 지금 자네에게는 노예가 그리 낯설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1, 2백년 전후의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지 그리고 그 관계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네. 그리고 그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을 해왔고, 자신들이 승리해나가고 있었다고 생각했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말이네. 하지만 그건 그저 모습과 형태만 달라졌을 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네. 그것은 결코 바꿀 수 없었던 것이었지. 사람들은 빈부격차가 극에 달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느꼈을 것이네. 자신들이 얼마나 무지했었는지 말이네. 그들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사람들을 지배해 왔네.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강한만큼 그 고통에 노출되는 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었지. 가끔 그들이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을 위로 삼으면서 말이네. 하지만 그들은 더욱더 고통 받게 되네. 그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지.”
에비앙의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이 독점으로 인한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2053년이 되었을 때에는 무려 2년 전보다 가격이 두 배로 솟구쳤을 정도였다. 국가들에게 매우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미 단단하게 자리 잡은 다논을 제재할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기껏 국가적으로 생수 사업을 지원해주며 성장시키려던 새로운 기업들이 다논을 상대로 얼마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수질에 대한 경각심이 극에 달해있었고, 그로인해 오랫동안 그들의 신뢰를 받아오던 다논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건 단순히 가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경쟁할 수 있던 몇몇의 기업들은 다논이 타격을 입게 되면 언젠가 자신들 차례도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선뜻 나서지 않았다. 지금처럼 자신들의 자리만 지켜도 충분한데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다논의 횡포는 그런 기업들에게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UN을 통해 경고 정도는 가능할 수 있었다.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 뒤, 계속해서 가격이 오른 에비앙으로 인해 영국을 비롯 일부 선진 국가에서는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다. 물을 더 수입해야 한다며 심각한 갈증을 하소연한 것이었다. 더불어 가격에 대한 불만도 제기되었다.
국가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정부와 기득권을 향한 사람들의 불만이 최고조였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리고 이는 UN을 통한 또 한 번의 경고로 이어졌고, 그것은 매우 엄중한 조치였다. 각국의 정부들이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려는 듯한 다논의 횡포에 괘씸함을 느꼈다. 하지만 다논은 당시 선진 10개국과 나란히 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애플과 구글 공화국 및 일부 국가에 생수를 넉넉하게 공급해주는 대가로지지 세력을 얻으며 유연하게 대처했다. UN의 2차 경고마저도 무색하게 만든 것이다.
“그의 아들이 왜 그런 거지? 아버지에 대한 복수치고는 너무 옹졸하군.”
바츠의 물음에 닥터가 바츠의 어깨에서 손을 거두고는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꽤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단순히 아버지를 위한 복수심 때문이었을 것이네. 그는 아버지를 제법 사랑했지. 하지만 나중에 그는 애플과 구글처럼 독립 국가를 세우고 싶어 했네. 왕좌에 오르고 싶었던 것이지. 강력한 무력이 가진 매혹적인 유혹이네. 그들이 사람들을 포로로 만들고 놓아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지.”
바츠는 위대한 투쟁을 비열한 행패로 변질시킨 그가 한심하게 느껴져, 자리에 있지도 않은 그를 향해 이제라도 한바탕 욕지거리를 하고 싶었지만, 닥터의 말이 아직 한참 남아있는 것 같아서 말을 아꼈다. 그러자 그가 피곤한 얼굴을 다시 방 안을 향해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 때문일 것이네. 2062년, 다논의 횡포는 절정에 달하네. 많은 국가들이 더 이상 생수 값을 감당하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지. 각국이 해수 담수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네.”
2065년 많은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인구는 계속 증가해 전 세계 인구가 90억에 육박했다. 대부분 북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국가에게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선진 국가들은 그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기 시작하고, 개발도상국을 비롯 해당 국가들은 빠른 산업화로 크게 발전하지만 대기 오염을 포함한 환경오염 역시 덩달아 급속히 증가했다.
“그때가 아마 50년 전에 비해 일조량이 반으로 줄어들었을 때일 것이네. 물 부족은 당연해지고 있었지. 물이 있더라도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각국이 그런 사람들을 위해 해수 담수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이네. 그의 마지막 헌신이 빛을 발한 셈이지. 그리고 그때가 대륙의 30퍼센트가 물에 잠겼을 때였네. 무분별한 산업화로 인한 환경오염이 해수면 상승을 부추겼지.”
2068년 UN은 드디어 다논의 에비앙에 대해 수출입 금지를 내렸다. 모든 국가가 에비앙을 구입하지 않기로 결의한 것이었다. 더불어 3차 경고 역시 내렸다. 다논을 향한 마지막 배려였다. 다논을 지지하던 기업들도 외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각국이 협업해서 UN을 통해 생산하게 된 해수로 만든 생수인 ‘머리너에인(marinerain)’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다논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의존도가 낮아지는 계기였다.
“2070년 여름이었네. 그의 아들은 매우 큰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지. 그는 더 상황이 나빠지기 전에 뭐든 해야만 했네. 다논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으니 말이네. 사업 자체에도 적색불이 켜졌지. 내가 그를 만나게 된 것도 바로 그때였네. 우린 다논의 지원금으로 연구하고 있었고, 그는 처음으로 우리를 찾아왔지. 우리에게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네. 우린 전혀 모르고 있었지. 우린 그의 아버지를 매우 존경하고 있었고, 그의 아들도 그와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네. 우린 그들의 노예였으니 말이네. 우린 그를 위해 우리가 만든 재앙의 씨를 건넬 수밖에 없었지. 그가 어떻게 사용하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았네. 그저 우리가 만든 그 재앙의 씨가 얼마나 완벽한지 궁금했을 뿐이었네.”
“그러니까 당신들이 크루엘라를 그에게 준 것이로군.”
닥터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여전히 방안을 향해 있었고, 그의 옆모습은 큰 슬픔에 젖어있었다.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야기를 쉬지 않았다. 그의 사명감이 다시 한 번 내비쳐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