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 이별 -- > * 232화 *
“2072년, 대륙은 60여 년 전의 모습을 많이 잃었네. 대륙 빙하가 거의 사라졌지. 그리고 물의 기근은 계속되고 있었네. 각국에 머리너에인이 공급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그것조차 귀했지. 그들이 포로라고 부르는 보통 사람들에게 말이네. 그런데도 격동은 고작해야 폭력적인 시위 정도에서 그쳤지. 강력한 무력에 의해 탄압되고 진압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네. 물론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진짜 이유는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그들의 노련함 때문이었지. 그들은 사람을 다루는데 능숙했네. 노예들의 불만이 행동으로 표현되기 직전에 멈추는 법을 알고 있었지. 매우 영리했네. 그리고 비열했지.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얼마나 큰 감동으로 느껴지는 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네. 사람들의 순수함을 이용한 것이었지. 최소한의 식수와 음식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계속해서 공급했네. 무상으로 말이네. 그런 방법은 이전부터 쭉 있었던 것으로, 국가가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복지’라고 불렀었지. 하지만 그건 엄연히 도움이었을 뿐이었지 구제는 아니었네. 사람들은 계속 빈곤에 허덕였네. 아마도 그들은 사람들을 그 이상으로 풍족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네. 자네라면 자네의 노력을 남을 위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내놓을 수 있겠는가? 그게 비록 비겁함으로 얻어진 노력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네. 아마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네. 그래서 국가라는 의미가 아주 중요했지. 그들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그 억울함을 도덕적으로 이해하게 만들어야만 했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국가의 의미는 이미 특정 계층을 위한 의미로 편중되어 있었지.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기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스스로 지켰던 것이지. 이렇게 보니 기업이라는 의미도 벌써 많이 변해 있었군. 국가를 상대로 대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미 그랬던 것이겠지? 사실 둘이 상당한 유착관계였다고 하면 놀랄 텐가? 어쨌든 그때쯤 다논의 점유율과 가치는 매우 크게 하락해 있었네. 일단은 에비앙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었으니 말이네.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었네. 그리고 그의 아들은 UN을 상대로 한 교섭에 나오게 되네. UN이 이전까지 경고를 통해 그토록 원하던 일이었지. 조정을 하자는 말이었네. 그의 아들은 그제야 그 요구에 응한 것이었네. 하지만 늦은 만큼 그리고 상황이 변한 만큼 그의 아들에게는 매우 불리했지. 그의 아들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네. 그래서 새롭게 생산하기 시작할 생수를 각국에 헐값에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던 것이네. 고작해야 당시 티셔츠 한 벌 값이었지. 대가로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재를 풀어달라고만 했네. 그들이 거절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건 단순한 협상도 아니었고, 물에 대한 압박감을 조금 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네. 그것은 국가를 초월한 기업을 상대로 한 승리였네. 그 의미는 아주 대단했지. 그런 기업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게 된 첫 번째 사례였으니까 말이네.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지. 하지만 그건 동시에 재앙이 악몽으로 싹틀 수 있게 되는 중차대한 사건이었네.”
다논이 각국에 새로이 공급하게 된 생수의 이름은 ‘폴라 에비앙’이었다. 극지방 심해에서 퍼 올린 신선한 물이었고, 열두 공정을 거쳐 정수된 매우 순도 높은 식수였다. 말 그대로 순수(純水)였다. 단 하나의 첨가물이 있었을 뿐이었다. 바츠는 물었다.
“그게 크루엘라인가?”
“...그러네...”
닥터의 고개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궈졌다. 스스로 더 이상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볼 자격이 없다며, 자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어두운 얼굴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에이는 쓸쓸함처럼 느껴졌다.
“폴라 에비앙은 심해에서 온 암살자였네.”
폴라 에비앙에 담긴 크루엘라는 전 세계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번져나갔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불과 3일 만에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거세졌고, 사람들은 경쟁하듯 사망해 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고 확실한 학살이었다.
“‘리부트 프로젝트’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도 그때쯤일 것이네. 인류의 존속을 위한 최후의 보루였지. 아르크로의 이주 말이네. 극히 제한된 사람들만 알고 있었던 것이네. 보통 사람들은 현재의 지도층이 입주를 완료할 때까지 몰랐지. 지금 레벨6에 거주하는 사람들 말이네. 물론 그들의 입주가 끝났을 때에도 몰랐네. 그 다음 입주자인 레벨4 거주자들까지 입주가 완료된 후에야 알려졌네. 어떻게 그토록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었는지 아는가?”
“아니, 그건 알고 싶지도 않아. 내가 지금 당장 알고 싶은 것은 왜 공평한 기회를 주지 않았느냐 거든.”
바츠의 대답에 닥터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낯선 장소에서 잠을 깬 사람처럼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가 말했다.
“공평한 기회? 공평한 기회가 무엇인가? 설마 모두가 함께 같은 출발선에서 달리기라도 하게 만들 셈인가? 뭐,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되면 억울하지 않겠나? 자신들의 노력과 투자로 만들어진 대피소에, 존재조차도 모르던 사람들과 같은 자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 말이네. 다시 묻지. 만약 자네가 아르크에 최초의 거주자를 선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 선정하겠는가? 공평하게 말이네.”
바츠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만 볼 수 있었을 뿐, 입술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잘 듣게. 그런 방법은 없네. 불합리에 항의하고 싶은 건가? 그 어떤 선택에도 후회가 있고 희생이 있네. 그건 경중의 문제이지 결코 다르지 않네. 누군가를 위해 대신 후회하고 희생할 사람들이 몇이나 될 것 같나? 흥미로운 것은 후회와 희생은 항상 반대로 환희와 희망을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이네. 적어도 그때 그들에게만큼은 그랬지. 국가와 기업 간의 간극이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네. 다시 유착관계를 형성하며 힘을 모았지.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말이네. 무슨 말인지 아는가? 오랜만에 한 데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이어온 질서를 어떻게 해야 계속 유지하게 될지에 대해 고민했단 말이네. 즉, 자신들과 함께 할 노예로 누굴 선택할 것인지 고심한 것이지. 그래서 레벨6 그리고 레벨4 거주자가 결정된 뒤에 나머지 층의 거주자들이 입주할 수 있었던 것이네. 사람들에게 한참 늦게야 아르크의 존재가 알려진 이유이기도 하지. 그렇게 현재의 아르크 체제가 탄생한 것이란 말이네. 그게 비겁하다고 느껴지는가?”
바츠는 순간적으로 닥터가 꼭 부사령관처럼 느껴졌다. 정확히는 그를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들의 부당함을 애써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가 물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왜 자네에게 한다고 생각하나? 자네에게 그저 크루엘라가 무엇인지,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만 설명하면 되는데, 내가 왜 자네를 비엔나 시티로 보내려고 했던 것 같느냐 말이네. 엑소시스트 그들이 악행을 저지르고 있어서? 내가 자네에게 그런 그들을 확인시켜주고는, 나를 대신해서 혼내주길 바랐을 것 같나? 아니, 그렇게 느꼈다면 그건 자네의 착각이네. 그건 절대 아니네. 자네는 틀림없이 장로 로리나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기 위해 왔을 것이네. 세상을 이렇게 만들고,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를 분노하게 만든 그들이 정말 사악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왔겠지. 자네는 그들을 심판해야 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해 확신이 필요한 것이지 않나. 내가 틀린가? 나는 그런 자네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길 바라고 있을 뿐이네. 그래서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것이네. 그것도 브루드 메어 앞에서 말이야.”
바츠는 물었다.
“그의 아들은 어디에 있지? 그러니까 그도 그때 당시 아르크로 이주를 했느냐고 묻는 것이야.”
“물론이네. 그는 크루엘라를 피해 무사히 아르크로 들어갈 수 있었네. 그의 자손이 현재 F3 아르크에 살아가고 있지.”
“거주지는 레벨6이겠지?”
바츠가 약간 빈정거리는 말투로 묻자, 닥터가 고개만 끄덕였다. 별다른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크루엘라에 대해서 고백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바츠는 그런 닥터를 경멸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우습군. 나는 지금 당신이 내게 아르크를 내버려두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거든. 그들이 당신과 함께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을 받아드려야 한다고 말이야. 그 사건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곳에 오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신을 만나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 모든 것을 받아드리고 용서해야 하는 것처럼 구는 군. 에르네스트 앞에서 했던 말은 잊은 건가? 미래는 공정해야만 한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지금 당신은 그들의 행위가 공정했다고 말하고 있다고.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닥터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아니, 그건 진심이네. 하지만 오해를 하고 있군. 내가 그 뒤에 했던 말은 기억하나? 난 그 누구라도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네.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묻고 싶겠지? 이유는 간단하네. 사람은 이기적이니까 말이네. 생각해 보게. 만약 자네가 아르크의 부사령관이라면 어쩔 텐가? 레벨6을 개방하고 공정한 방식으로 거주자를 다시 선별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잔 말이네. 그로인해 자네 가족이 레벨1로 가야만 한다면 어쩔 것이냐 말이네. 가족과 함께 레벨1로 가겠는가? 아니면 가족들을 위해서 레벨6을 이전처럼 폐쇄해두고 있을 텐가? 난 단지 최대한 공정할 수 있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네.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네. 다논의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이기도 하네. 그는 우리 모두가 똑같아지도록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란 말이네. 이해가 되는가?”
바츠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사람들을 노예처럼 취급하던 그들의 횡포를 증언하고 비판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들 속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비겁하고 탐욕스런 선택과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들어도 분노할 수밖에 없는 추악한 짓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좀 달랐다. 굉장히 복잡하다고 느껴질 만큼 완전히 뒤바뀐 것 같았다.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을 위해서 대변하고 있는 그의 의도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바츠는 따분하다고 느끼던 기분을 어느새 잊고는, 마음을 다잡고 집중력을 발휘해 신중해져야만 했다. 그에게 말했다.
“남은 이야기나 계속 해. 아직 더 남았잖아.”
그가 묘한 의미가 담긴 실소를 터뜨린 뒤에 말을 이었다.
“크루엘라의 전염력은 상상을 초월했네. 세상 곳곳에 소나기처럼 뿌려졌지. 하지만 그들은 그 원인을 찾지 못했네. 연구할 수 있는 시간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지. 누가 그 악몽을 마주하고 싶어 하겠나? 물론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네. 단지 그들 역시 대부분 목숨을 잃었을 뿐이었네. 게다가 생수를 통해 보급되고 있다고는 의심조차 하지 못했던 것도 한몫 거들었네. 크루엘라의 확산에 큰 기여를 했지. 정말 빗물 같이 세상 곳곳으로 보내졌으니 말이네. 하지만 재앙의 절정은 이듬해 완성되었네. 당시 일본이라고 불리던 국가에서 개발한 만능세포인 STAP가 조명되었네. 치료제는 아니었지만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었지.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환자의 수명을 일시적이나마 증가시켜주었으니 말이네. 부족하던 시간과 인력 중 시간이 해결된 것이었지. 하지만 그건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네. 크루엘라가 STAP와 결합하며 괴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네.”
“헤러티커로군.”
닥터가 고개를 지그시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러네. 인간이 아닌 변종. 하지만 인간이기도 한 정말 끔찍한 일이었지. 당시 사람들은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했네. 당시 기독이라고 불리는 종교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며 힘을 얻었지. 그래서 그 괴물들의 이름이 헤러티커라고 지어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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