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 이별 -- > * 233화 *
헤러티커. 급진적인 신체 변형으로 인한 기형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 그들은 오직 하나, 식욕을 쫓는 짐승이었다. 굶주림을 해갈하기 위한 집착만이 그들을 이끌었다. 그 외에 파괴적인 행동은 없었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저 지상을 떠돌며 사냥감을 찾을 뿐이었다.
“당시 선진 10개국은 범세계적 정부인 탄티움을 출범시켰네. 헤러티커로 인한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함이라고 표방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눈과 귀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수단이었네. 흘러나간 ‘리부트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지. 그들은 군대를 앞세워 헤러티커 소탕에 앞장섰네. 사람들은 그 군대가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을 미디어를 통해 지켜보았지. 그들이 성공하길 염원하면서 말이네. 그리고 그 사이 아르크로의 이주는 완료가 되었네.”
“보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군. 하지만 그걸 로는 부족해. 누군가는 틀림없이 의문을 품고 있었을 거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을 테고 말이야. 사람들이 진짜 모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뭐지?”
닥터가 만족스런 시선을 보내며 대답했다.
“예리하군. 맞네. 그렇게 했어도 전부 지워낼 수는 없었지. 최소한 그들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그들 외에 고용된 사람들이 있었으니 말이네. 대부분 일컬어지지만 않을 뿐인, 그 노예들이었지. 그들 모두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네. 자네 말대로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진실을 주변으로 퍼 날랐네.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말했고, 그 가족들은 이웃에게 떠벌렸지. 군대가 통제를 잃어가며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했었기 때문이었네. 헤러티커는 알다시피 매우 강하네. 그리고 그때는 그 수가 어마어마했지. 100억에 달하는 세계 인구가 STAP와 결합한 크루엘라에 노출되었을 때, 헤러티커로 변모한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였을 것 같나? 헤아릴 수나 있겠는가? 각종 중화기로 무장한 군대가 토벌한 수보다, 더 많은 수가 빠르게 다시 생성되고 있었지. 그에 반해 군대는 눈에 띄게 줄어갔네. 놈들과의 교전 중에 사망하기도 하고, 겁을 먹고 달아나기도 했지. 군대가 통제를 잃게 된 이유네. 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또 정부와 기업 같은 사회지도층을 향하게 되었지.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숱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때마다 그들에게 의지하고는 했으니 말이네. 하지만 그들은 그 마지막 기대마저도 저버렸네. 그들은 전 세계의 군 8할이 부서지고 해체된 후에야, 리부트 프로젝트의 실체를 세상 밖으로 공표하였네. 사람들에게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아르크로 향하라고 했지. 그리고는 각 아르크에 수용 가능한 자리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실시간으로 알렸네.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어땠을 것 같나? 그들의 비겁함에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얄팍한 부당함에 맞서 싸웠을까? 천만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호했네. 당장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들 떴지. 그리고는 이내 간절함을 품에 안고 서로 달리기 시작했네. 턱 없이 부족하지만 남은 그 몇 자리를 얻기 위해서 그들끼리 경쟁하기 시작했단 말이네. 살인? 그것은 지금 지상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만큼 그때도 쉬웠지. 불합리에 맞서고 평등을 외치던 문명인들이 그때까지 쌓아온 온갖 고상을 단 한순간에 버렸단 말이네. 정말 모순되는 모습이지 않나? 문명이라는 이름이 순식간에 하찮게 변해버렸네. 그들은 필사적이었지. 아르크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했을 것이네. 그것이 영혼을 파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네. 하지만 그 치열한 경쟁의 끝에 기다리고 있던 합당한 대가는 승리한다고 해서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네. 매우 제한적이었지. 항상 그랬듯이 말이네. 극히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승리감보다는 상실감을 느껴야만 했지. 그리고 그것은 곧 분노가 되었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분노였지. 안 그런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합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 차버린 것이지 않나? 물론 남은 1할의 노예들 덕도 있었지. 그 노예들은...”
“간단하고 작은 위로에 감동했기 때문이겠지.”
바츠가 말을 자르며 대답하자 닥터가 눈 깜빡할 사이에 스치고 지날 만큼, 옅고 작은 미소를 내비친 뒤에 말을 이었다.
“그러네. 그들은 사람의 심리에 능통하지 않나? 그 노예들에게 아르크로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는 약속을 했네. 가족을 포함해서 말이네. 노예들은 비록 레벨1이나 레벨2에 거주하게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네. 그 노예들이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역시 어리석은 것이네. 우린 이미 대화를 나누었지 않나? 노예들이 계속 노예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네. 노예들은 그들에게 감동받고 헌신했네. 이기적이었지. 끝까지 그들 곁을 지키며 그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에게 주어질 권리를 보장받았네. 대신 자신과 똑같은 다른 노예들은 배척해야만 했지. 자, 이쯤에서 다시 물어볼까? 그 노예들도 비겁하다고 느껴지나?”
바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묻는 그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음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내키지 않았다. 다만 아르크에게 소외된, 당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만큼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가 바츠의 심산을 읽었는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바로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네. 그들로서는 나름대로 슬기롭게 판단하고 선택한 것일 테니 말이네. 그렇다고 외면당한 사람들을 향해 너무 슬퍼하지도 말게. 그들의 처지는 분명 비관적이었지만 희망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유연하고,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하지. 아르크가 봉쇄될 쯤, 각지에서는 자경단이 결속되기 시작했네. 규모도 제각각이었고, 무게도 달랐네. 하지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만큼은 모두가 같았지. 이미 정부와 기업 같은 사회지도층으로부터 버림받으며, 그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으니 말이네.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겨두지 않았지. 이제 그들은 적이었을 뿐이네. 내 기억으로 그때 당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종교의 변화였네.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절대적인 신뢰로 유지되던 신앙이 헤러티커의 출몰과 더불어 성황을 이뤘으나, 탄티움의 실패와 아르크 사건을 통해 급격히 믿음을 잃어갔네. 두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그들이 믿던 신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없었기 때문이었네. 그저 실용학적인 학문으로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지. 그마저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제한적이었네. 그때가 2074년이었네. 모든 국가는 전복되었고, 지상에는 배신감으로 극도의 분노에 찬 사람들로 가득했지. 그들의 분노는 세상을 불태울 정도였네. 크루엘라, 헤러티커 그리고 그들의 분노. 재앙이었네. 하지만 재앙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네.”
“굶주림...음식이 없었을 거야. 크루엘라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앗아갔지.”
바츠가 또 한 번 말을 자르며 끼어들자, 그가 급격히 어두워지는 얼굴로 대답했다.
“영리하군. 사실상 크루엘라나 헤러티커 그리고 분노를 토해내는 각종 악당으로 돌변한 사람들에 의한 희생보다도 몇 배는 더 큰 비극이었지. 사람들은 굶주림과 두려움에 떨며 죽어갔네. 그건 어린 아이도 예외가 아니었지. 참혹한 현실이었네. 2075년, 무려 30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네. 지상 곳곳에 시체가 나뒹굴었고, 건물들은 버려졌으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동했네. 기점을 가지고 머무는 건 큰 무리를 지었을 때에나 가능했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아이기스는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했지.”
“그러니까 결국 그들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서 세상이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군. 그렇지? 그리고 당신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고 말이야. 아르크에 알려진 대로 운이 나쁜 실수가 아니었어. 그건 당신들의 실수였고, 그들의 무책임이었지.”
닥터가 고개를 돌려 바츠를 외면하고는 방안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인하지 않겠네. 난 아직도 가끔 그때의 악몽으로 괴로워하네.”
“꿈을 꾸기는 하나?”
바츠는 그에게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는 겸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이네. 자네처럼 잠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눈을 감으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네. 그때 나에 대한 후회가 말이네. 그래도 우린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네. 그들이 군대를 통해 헤러티커를 토벌하는 동안, 세상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노력을 했단 말이네. 사람들의 분노가 생존을 위해 서로를 해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 아닌, 그들에 대한 원망과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네. 덕분에 우린 그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 우린 멀리 그리고 은밀히 달아나야만 했네.”
“그래서? 그래서 이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지금까지 싸우고 있다는 말인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미 사람들은 죽었고 세상은 멸망했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닥터가 천천히 바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잠시 입을 닫고 바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방안으로 시선을 다시 옮겨 넣고는 말했다.
“자네 스톡홀름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줄 아나? 이곳은 진짜 스톡홀름이 아니네. 그곳에서부터 훨씬 남쪽에 위치한 곳이지. 우리가 왜 이곳을 스톡홀름이라고 명명했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이네.”
“그게 지금 중요한 가?”
“중요하지. 중요하고말고. 그때에는 매년 세상과 인류에 공헌한 사람들을 치하하기 위한 자리가 있었네. 그걸 ‘노벨상’이라고 불렀지. 그 자리가 열리던 곳이 스톡홀름이었네.”
“당신들이 지금 세상과 인류에 공헌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바츠는 그가 뻔뻔하게 느껴져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애써 참아냈다. 그가 말했다.
“부끄럽지만 그러하네. 우린 그때부터 우월한 유전자를 찾기 시작했고, 사람들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니 말이네. 크루엘라 같은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을 만들어야 할 책임을 느꼈단 말이네.”
“브루드 메어를 만들어낸 것도 그 때문인가?”
“그러네. 그 어떤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류.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우린 그런 인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대한 어머니였고, 강력한 씨앗이라는 원초적인 결론을 찾아냈지. 위대한 어머니를 통해 태어난 강력한 씨앗의 자손들은 틀림없이 세상에 또 한 번 문명을 피워낼 것이네.”
바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코웃음 쳤다. 마치 그가 그때의 참사를 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긴 시간을 살아오며 무감각해진 것 같았다. 바츠는 그 감정을 담아 말했다.
“정말 변명치고는 구차하군. 그래서 태어난 아이 중에 헌터나 엑소시스트만큼 강한 아이가 있었나?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 중 기체를 선택한 녀석들 말고, 순수하게 생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말이야. 설마 기체를 선택한 아이들을 통해, 그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그 강한 생명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겨우 그것으로 수억 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과거를 용서받고 싶은 건가?”
그가 바츠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쳤다.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부릅뜬 눈에는 격렬한 반발심이 담겨져 있었다.
“틀리네! 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네! 난!...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왔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뿐이네! 우리의 신념이지! 우리의 신념을 무시하지 말게! 내 후회와 죄책감 안에는 우리의 신념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으니까 말이네! 우리의 신념이 부정당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네!”
바츠는 그에게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린 미소를 보여주며, 방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방금 그가 크게 외친 탓인지,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들 크게 놀란 얼굴로 의아한 표정이었다. 조금 전 소란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평화는 결코 깨지지 않았을 것 같았다. 바츠는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물었다. 모래를 씹은 것처럼 입안이 칼칼하고 씁쓸했지만, 빈정거림으로 감춰냈다.
“멋대로 하라고. 대신 이것에 대해서나 답해 봐. 아까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것이었어. 당신은 자신을 자꾸만 우리라고 표현하더군. 그 이유를 듣고 싶어. 왜 자꾸 우리라고 하는 거지? 닥터가 당신 말고 더 존재하는 것인가?”
바츠의 물음에 그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조금 조심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대답은 하지 않고, 바츠의 옆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때, 뒤에서 그를 대신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감이 묻어났지만 왠지 지친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바로 나 때문이네. 정확히는 나를 포함한 두 명 때문에 그렇게 말해야 했다고 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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