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34화 (234/268)

< --   14. 이별   -- >         * 234화 *

바츠는 통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느 틈에 통로와 이어주던 불투명 유리를 열고 다가와 있는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닥터와 같은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헤러티커의 분노에 찬 눈과 사람들의 충혈 된 눈이랑은 달랐다. 비록 진짜 사람의 눈동자를 정교하게 흉내 내고는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냥 불빛이었다. 그리고 그 눈에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전혀 어색하지 않게 움직이는 인상과 풍부한 억양을 통해 기분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방금 전 목소리 때문인지 꽤 피곤해보였다. 물론 그가 정말 지쳤을 리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를 소개하는 닥터 덕분이었다. 닥터가 조금 전 흥분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사하게, 나에게 오랜 삶을 선물한 은인이네.”

바츠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몸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것이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 아르크에서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멋대로 움직이는 눈길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깨끗하고 좋은 옷 안에 숨겨진 그의 신체가 닥터와 똑같은 기계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소매 밖으로 나와 있는 그의 손과 옷깃 너머로 보이는 목이 소리 없이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츠의 시선이 익숙해보였다. 바츠가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당신도 기계 몸을 가졌군.”

“이곳에 있는 기체 중 가장 완벽한 기체 중 하나지.”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거북하게 들렸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니 어쩔 수가 없네. 나와 완더 그리고 신시아의 기체는 더 이상 지상에서 만들어 낼 수가 없지. 나머지는 그저 흉내만 낸 것에 불과하네. 충분한 부품과 재료도 없고 기술적으로도 부족하지.”

“왜 그렇게 자신하지?”

바츠의 물음에 그가 걸음을 멈추고는 닥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바츠는 그에게서 대단한 자부심을 느껴야만 했다. 목소리에 힘이 담겨 있었기 때문인지 매우 의욕적으로 느껴졌다. 방금 전의 피곤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바츠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얼굴을 덮고 있는 인공피부가 입가에 주름을 만들만큼 정교했다. 이미 닥터를 통해 숱하게 봐왔던 터라, 바츠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새삼 놀라웠다.

“물론 나 혼자서 한 것은 아니네. 다른 한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 기술은 아무 쓸모도 없었겠지. 내가 가진 기술은 기체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체 안에 사람을 집어넣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네.”

그가 자신의 머리 한쪽을 검지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닥터가 말했다. 조금 걱정스러워하는 말투였다.

“존, 아직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았지 않는가?”

닥터는 그가 서두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를 향해 슬그머니 눈치를 주는 모습이, 호흡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그를 진정시키려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가 닥터의 얼굴을 한차례 확인한 뒤, 바츠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결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가 전혀 서두르고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그저 반가움의 표현정도로 받아드릴 수 있었다.

“존이네. 아르크에서 온 집사라지?”

“당신도 크루엘라에 관여가 된 건가? 세상이 싸늘하게 타버리도록 만든 발두인이냐고 묻는 거야.”

바츠는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어찌되었든 환영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도 닥터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혼란에 기여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감정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러자 그가 맨발로 차가운 얼음을 밟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 놀라더니, 이내 즐거워 보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으로 허탈함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닥터가 그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말이 지나치군. 존은 상관이 없네. 존은 그저 신시아와 함께, 내가 오랫동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뿐이네. 둘은 내가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란 말이네. 그러니 존에게 그런 모욕은 하지 말아주게. 모욕은 나 하나만으로도 족하네.”

바츠는 존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습들이 매우 탐탁지 않았다. 닥터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쓴웃음을 지었고, 오히려 존은 차분하게 그를 달랬다.

“괜찮네. 아마도 나와 자네가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바라는 모양이네. 책임감을 느끼라는 것이겠지.”

바츠는 닥터를 위로하는 존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났다지만, 그 참사를 이렇게 태연하게 받아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처음 그에게서 느꼈던 어두운 분위기는, 그의 슬픔이 아니라 그저 지루함이었던 것 같았다. 그가 바츠에게 다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렇게 바라보지 말게. 차갑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과거를 품고 현재에 살며 미래를 바라보네. 과거란 기억이고 미래는 기대지. 하지만 현재는 흐름이라네. 무슨 의미인지 알겠는가? 과거와 미래는 내가 존재하지 않지만 현재는 내가 살아있고 흘러가고 있다는 말이네. 과거는 후회를 남기고 그 후회는 시간이 지나면 미화되지. 그 어떤 추악했던 사실마저도 말이네. 그건 변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결코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네. 미래는 두려움을 전하고 그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면 허무하게 되네. 그 어떤 아름다운 바람마저도 말이네. 그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고, 절대 예측할 수 없는 허상이며, 뜻하지 않게 나를 덮칠지 모르기 때문이지. 둘 다 실체는 있지만 나와 함께 하지는 않네. 하지만 현재는 다르네. 현재는 혼돈이고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지. 기대는 허무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게 하고, 후회는 나의 목을 조르지만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하네. 그 모든 것이 공존하며 뒤엉켜서 혼란스럽기 때문에 냉정해야만 하지. 그걸 가장 잘하는 것이 헌터들 아니었나? 헌터들만큼 기대가 없고 후회를 하지 않는 존재는 없지. 안 그런가?”

“존, 그만하게. 자넨 지금 진정해야 할 필요가 있네.”

닥터가 그의 말이 길어지자,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려 세웠다. 흔들리는 닥터의 목소리가 그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닥터의 말에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바츠는 그런 둘을 매우 복잡하게 느껴야만 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때를 후회하지 않는 건 아니네. 물론 미안함은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건 그때를 과거로 남겨두었기 때문이 아니네. 내가 미안해하고 후회하는 건...”

“존! 그만하게!”

결국 닥터가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모습이 또 한 번 나타났다. 닥터의 감정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그런 닥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그의 붉은 시선이, 수많은 감정을 실어 나르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분위기가 무거웠다. 방안에서 지켜보던 여인 중 한 사람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문쪽을 향해 걸어왔지만, 닥터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알아차리며 손을 거칠게 놀려 자리로 돌려보냈다. 닥터가 그에게 말했다. 분위기는 변함이 없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많이 차분해져 있었다.

“자네는 휴식이 필요하네. 요 근래 힘들었지 않나. 돌아가서 쉬게. 그리고 마음을 다 추스르고 나서 나오게. 반드시 자네가 예전처럼 돌아올 것이라고 나는 믿네.”

그는 대답했다. 시선은 닥터를 향해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향한 곳은 바츠였다.

“내가 미안해하고 후회하는 건 완더에게 기체를 준 것이네. 완더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야말로 나의 커다란 실수였지. 차라리 크루엘라에 관여를 한 것이 더 나았을 것이네. 그녀의 말을 들었어야만 했어. 늦게라도 그녀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우린 또 다른 크루엘라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야.”

그는 말을 마치고는 바츠를 돌아보더니, 이내 자리를 떠났다. 미련이 남은 듯은 얼굴이었다. 바츠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닥터가 그를 자꾸만 제지하려고 한 까닭은 알 것 같았다. 그가 왠지 불안해 보였다. 닥터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시선은 그가 떠나가고 난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존은 지금 아프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지.”

“왜지?”

닥터는 잠시 말을 아꼈다가 대답했다.

“...신시아가 죽었기 때문이네. 그는 그녀를 사랑했네.”

“그녀의 죽음으로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그런데 그게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닥터가 바츠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녀가 깊은 회의감으로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했기 때문이네.”

“그가 크루엘라를 언급하던데, 관련이 있는 것인가?”

닥터는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방안으로 돌리고 말했다.

“...그녀가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었네. 그녀는 그와 함께 나를 지지해 주었네. 그리고 나의 뜻에 함께 해주었지.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뜻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네. 정확히는 의심이라고 해야겠지. 아마도 우리가 생각했던 결과와 성과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네.”

“그러니까 그녀가 브루드 메어를 반대했다는 것인가?”

“아니...브루드 메어를 통해 태어난 아이들을 기체화 시키는 것을 반대했지.”

“분명 내게 기체화는 그들이 원할 때만 해준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리고 본래 목적은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만들기 위함이었던 것 아닌가?”

“맞네. 그리고 그 아이들을 기체화 하려던 것도 맞는 말이고 말이네.”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군.”

바츠는 그에게 실망감을 담아 말했다. 그러자 그가 주먹을 꽉 쥐며 외치듯 말했다.

“시간의 흐름만큼 성과가 비례하지 않으면 조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네!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가 어떻게 덮치게 될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단 말이네!”

바츠는 그의 옆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어리석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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