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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237화 (237/268)

< --   14. 이별   -- >         * 237화 *

바츠는 그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자신의 발등을 향해 시선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누가보아도 범상치 않았다. 그런 그를 피해, 마저 계단을 오를 수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계단이 높게 느껴지며 쉽게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입을 열었다.

“완더를 믿나?”

그의 목소리는 기체의 붉은 눈동자와 맞물려 매우 음산하게 느껴졌다. 특정 대답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바츠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그를 믿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지.”

“그런가? 완더가 우리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면 그럴 일도 없었겠지.”

그가 한숨을 내쉬듯 짧게 웃고는 말했다. 첫마디를 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방금 전 경직된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억지로 참고 있던 숨을 내뱉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금방 다시 굳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닥터는 처음부터 인간의 기체화를 꿈꾸었네. 우리에게 설명했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기체화가 필요한 것이라고 한 말은 거짓이었지. 그는 완전한 기체를 원했네. 우리와 같은 기체 말이네. 그가 신시아를 참을성 없는 여자라고 말하지? 전혀 그렇지 않네. 그녀는 항상 차분했고 신중했네. 그는 물론이고 우리가 기체를 갖게 되는 것에도, 수 없이 고민했을 정도였지. 아마도 그는 세균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것 같네. 그래서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겠지...”

“모든 사람을 기체화한다는 결론?”

바츠가 말을 자르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별다른 거리낌 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했다.

“...완더는 그녀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겠지만 그녀는 그의 계획에 대해 언제나 진실 되게 대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네. 그녀는 그를 믿었지. 그가 진화를 말하지? 그가 말한 그 진화는 굳이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었네. 우린 그 때까지 인류를 존속시킬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지. 그 시간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었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미 크루엘라와 만능세포의 시험적인 도전으로 깨달았으니까 말이네. 그는 그 진화가 완성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단축하고 인류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말로, 나와 신시아에게 기체를 주문했네. 또 다른 크루엘라나 헤러티커에게 고통 받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네. 우리가 그의 뜻에 선뜻 따랐던 이유였네. 하지만 그건 답이 아니었지. 그렇게 만들어진 인류는 인간이 아니니까 말이네. 그것이야말로 또 다른 크루엘라와 헤러티커가 아닌가?”

“그녀가 망상에 빠졌었다고 하더군. 당신과 그녀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가? 그의 계획을 오해한 것은 아니냐고 묻는 거야.”

바츠가 의심스런 눈으로 묻자, 그가 웃었다. 감정이 담기지 않는 그의 시선이 한심하게 바라본다고 느껴질 만큼 짙은 비웃음이었다.

“몰라서 묻는 건가? 자네가 그만큼 어리석게는 보이지 않는데, 내 착각인가? 기체의 개발은 불가능을 위한 것이었네. 보툴리눔 톡신이 미용으로 각광받은 사례와 같이, 목적과 다르게 남용되었던 것이지. 기체의 본래 목적은 인간의 신체로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에 대한 도전과 불구가 되어서 극심한 불편에 시달리는 불치병 환자를 위한 것이었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나 영구적인 수명을 위해 쓰이기 위한 용도로 변질된 것이란 말이네.”

“당신을 보면 적어도 영구적인 수명을 위한 용도로는 성공적인 것 같군.”

바츠는 그를 향해 장난스럽게 비아냥거렸다. 조금 전 그의 비웃음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하지만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조심성이 묻어났지만 길바닥에 차이는 흔한 돌을 향해 침을 뱉듯 말했다.

“...그때부터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 완더는 집착하고 있었네. 신시아가 준 기회를 통해 문명을 재건하기 위한 사명감이 아닌, 자신의 연구 성과와 위대한 업적에 대한 갈망에 말이네.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든 남보다 더 돋보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지. 그로 인한 우월감을 통해 자존감을 만드는 것이네. 보잘 것 없는 떠돌이들이라도 자신들의 세계에서는 누가 더 훤칠한 가로 은연중에 경쟁 심리가 생기는 것과 같은 이유네.”

“알량한 자존심이군...”

바츠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말을 참아내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진, 존과 신시아에게 자신의 욕구를 위해 애원하는 닥터의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존의 닥터를 향한 말투로 그때의 닥터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그가 한결 밝아진 듯한 분위기로 바라보았다. 꽤 만족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바츠는 왠지 민망해서 얼른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닥터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는 것 같더군.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해. 그는 지금 추구하는 방향이 가장 훌륭한 결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런 그가 대체 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지?”

존이 긴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자네가 크루엘라를 남극에서 나온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네. 브루드 메어를 통해서 태어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기체화를 받아드릴 테니 말이네. 이미 앞선 사람들이 다 그랬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나?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네. 이미 믿어지고 있던 대로 사람들은 믿을 테니까 말이네. 그의 엉뚱한 집착이 만들어낸 탐욕스런 야망이지.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전부 완더 엔젤이라는 이름으로 칭송받게 될 것이네. 그는 그것만이 악몽으로 얼룩진 자신의 과거를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네. 어둠을 영광으로 지우는 것이지.”

바츠는 그의 대답을 듣자, 문뜩 부사령관 나눴던 대화 일부와 잊고 있던 문장이 떠올랐다.

‘사령관께서 아르크를 세우시고, 아이기스로부터 지켜내셨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아르크를 지키고, 나와 가족 그리고 사령관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그때 부사령관은 분명 상상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텅 빈 공간을 채워 넣는 상상력. 그것은 개인에게 사실이고, 주변으로 퍼져나가면 진실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당연하게 변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물었었다.

‘최초의 의문을 가지러 가기 위해 누가 노력할 것 같나?’

바츠는 그때 자신이 그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뭔가를 했던 같은데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재채기가 코끝에 걸린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집중하면 상쾌할 만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는데, 그럴 기회는 없었다. 존이 말했다.

“우린 인류를 존속할 방법을 따로 찾아야 했네. 그의 계획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 달라졌던 것이지.”

“그래서 찾았나?”

바츠가 고민을 그만두고 묻자, 그가 잠시 망설인 뒤에 대답했다.

“...옛날 사람들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라는 걸 지냈다고 하더군.”

“기우제?”

“그래. 비가 내리길 하늘에 기도하는 것이네.”

“효과가 있었나?”

“물론이지. 기우제는 항상 비를 내리게 하네. 슬기로운 방법이었지.”

바츠는 그에게 설렘이 느껴질 만큼 기대가 묻어나는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그래서 그 기우제를 찾았나?”

“아니, 찾지 못했네. 찾았다고 하더라도 할 생각은 없네.”

바츠는 그의 단호한 대답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기우제는 비가 내릴 때까지 기도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네.”

“...재미있군...”

그가 기분 좋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즐거운 분위기가 여전히 묻어나는데도,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진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린 이곳에서 많은 사람을 기체화 했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완더가 만족할 수준이었지. 알고 있겠지만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네. 우리가 처한 환경은 열악하지 않나? 어쨌든 그의 집요한 설득 때문인지 거부감을 가지고 저항한 사람은 없었네. 단 한명을 제외하고 말이네.”

바츠는 아까 닥터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한 번 언급이 된 적이 있는 사실이라는 걸 기억해 냈다. 그도 한명이 기체화를 거부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존이 알려 주었다.

“그 아이가 그랬네. ‘난 사람이고 싶어요.’라고...세상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지 않나?”

바츠는 말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란히 서도 그가 좀 더 큰데, 계단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보니 그가 훨씬 더 크게 보였다. 괜히 그가 온 몸으로 덮쳐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 그가 마지막에 물은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체화를 거부한 아이가 어리석다는 것인지, 그 아이를 기체화하기 위해 시도한 닥터가 지나치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말 그대로 남아 있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 의미를 명확히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하나 묻겠네. 만약 자네가 아르크에 혼란을 던져 넣는다면, 아르크에 의도한 변화가 일 것 같나?”

바츠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솔직하군...내가 솔직함에 대한 보답으로 자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도 되겠나?”

바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허락했다.

“완더가 노예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것이네. 그래서 해주는 말이네. 노예가 왜 노예 인지 아나? 비겁하거나 어리석어서가 아니네. 노예가 노예인 이유는 무능력해서네. 그들에게는 주인과 맞서 싸울 힘이 없네. 하지만 영리하다고 착각하는 노예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이네. 자네는 자네가 가진 힘에 대해서 얼마나 확신하나?”

“조언치고는 참으로 짓궂은 것 같은데? 뭐, 상관없지. 덕분에 그 기우제라는 것, 한 번 해보고 싶어졌으니까 말이야.”

바츠는 모두가 기체를 받아드리는 와중에도 홀로 거부 의사를 보인 그 아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는 바보라서 다른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충분한 설명을 통해 문제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그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선택을 고집한 것이었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묻고 설득하기 위한 시도도 있었을 테지만,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바츠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조금 전 존이 말한 세상 모두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도 알 것 같았다. 그는 그 아이를 향해 말했던 것이었다. 아이의 그 엉뚱한 선택을 조롱한 것이었지만 기분 좋은 의미의 조롱이었다. 아니, 찬사였다.

바츠는 웃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한발씩 계단을 올랐고, 그는 슬그머니 옆으로 몸을 비틀어 비켜주었다. 바츠는 그를 지나쳐 바로 닥터의 방으로 갔다. 닥터는 매번 정면으로 보이는 책상에 글을 쓰며 앉아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똑같이 앉아있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좌우에 게르하르트와 에르네스트를 두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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