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빛과 빚 -- > * 238화 *
“책은 다 썼나?”
바츠는 그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는 즉시 반응하지 않았다. 바츠를 시큰둥해 보일 정도로 무관심한 표정으로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바츠가 책상 바로 앞에 섰을 때에야 뒤늦게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대꾸했다. 한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럭저럭? 정리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군.”
“혹시 폐기물 처리장을 알아? 아르크 구석에 박혀있는 접근 금지구역이지.”
바츠는 그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하더니,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꽤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만큼, 밖으로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금방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을 뿐이었다.
“물론 알고 있네. 아르크에 있어서 인공태양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지.”
“그곳은 정말 악취로 진동해. 아르크 레벨1을 지저분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원인 중 하나지. 그게 멈추면 좀 나아질까? 당신에게 묻는 거야. 그곳이 작동하며 내뿜는 온갖 더러운 냄새가 레벨1 거주자들의 몸에 배어버리거든. 레벨1 거주자들은 어릴 때부터 그 냄새에 고통을 받으며 살지. 다른 레벨의 사람들에게는 즐거운 조롱거리고 말이야. 그런 그곳이 멈춰버리는 거야. 그럼 그들이 레벨1 거주자들을 향한 조롱을 멈추게 될까?”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한쪽 어딘가로 옮겼다가 잠시 뒤에 돌아온 후에 입을 열었다.
“글쎄,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냄새가 똑같이 날 것이라는 건 확실하게 알 것 같군. 폐기물 처리장이 작동하면 쓰레기를 연소하며 악취를 풍길 테고, 작동을 멈춘다면 각종 쓰레기들로 넘쳐나며 또 다른 악취가 진동을 하겠지. 그리고 그 악취는 어떻게 생겨났든 사람들의 몸에 배게 될 테고 말이네.”
“그렇지?”
바츠는 그의 대답에 기다리지 않고 짧게 물었고, 그 역시 고개를 연속적으로 끄덕이며 빠르게 반응했다. 툭툭 털어내듯 움직임이 그리 크지 않은 끄덕임이었다.
“내가 브루드 메어 앞에서 자네와 이야기를 나눈 이유를 알게 된 것 같군. 더 많은 이야기는 필요가 없겠어. 어디 대답을 한 번 들어볼까? 내가 자네에게 한 이야기들로 무엇을 느꼈나?”
바츠는 슬그머니 시선만 옮겨, 좌우에 선 게르하르트와 에르네스트의 안색을 한차례씩 살핀 뒤에 대답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뭘 해야 할지는 확실해졌지.”
“그래? 한 번 말해보게.”
바츠는 그의 기대가 묻어나는 채근에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크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그곳을 다 바꿔 버리겠어. 아르크는 그때 당신들이 만든 재앙이 남긴 마지막 불씨야. 그 불씨는 바람만 불면 언제든지 주변으로 다시 번져나가겠지. 그러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야. 내가 제대로 답을 얻은 건가?”
그는 또 다시 말을 아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반응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신경 쓰이도록 만들었다. 그가 머뭇거린다고 느껴질 만큼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답이라...나도 모르겠네.”
“당신 생각은 어떻지? 당신이 바란 의도가 있을 것 아니야.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거라고.”
“...난 대답할 수 없네...”
“왜? 용기가 없어서?”
바츠는 오래 전 전진기지에서 누군가가 잠결에 흘려낸 말을 그에게 주워 던졌다. 풀이 죽은 사람처럼 자신감을 잃어가는 그를 향한 도발이었다. 이제 와서 그가 달아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그를 나무라지 않을 테니, 충동적으로라도 솔직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입을 더 굳게 닫았다. 억지로 힘을 주고 있는 것처럼 귓불 아래가 꿈틀댔다. 꼭 자신이 비겁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럴 줄 알았어. 당신 같은 사람을 이미 둘이나 먼저 만나 보았거든. 하나 같이 거창하게 말만 할 줄 알았지 정작 실속은 없었지. 그나마 한 사람은 정직하기라도 했어. 자신의 비겁함을 시인했으니까 말이야. 물론 그마저도 어물쩍거리기는 했지만, 그런 기회조차 가지지 않고 사라져 버린 사람보다는 훨씬 나았지.”
바츠는 그런 그에게 실망하며 빈정거렸다. 그러자 그가 이제껏 가장 빠른 속도로 반응했다.
“그런가? 그 둘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가늠해볼 수 있을 것 같군. 그건 누구나 불만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나 될 수 없기 때문이네. 그 불만이 크고 작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네. 그 불만을 손에 쥐고 가장 앞에 서서, 상대에게 그 의사를 전하는 사람.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은 책임의 문제였으니까 말이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책임을 홀로 떠안는 사람을 아주 오래 전부터 이렇게 불러왔네. 지도자(leader)라고 말이네. 한명의 지도자는 백 명의 무력보다도 안전하게 무리를 지킬 수 있네. 책임은 그 어떤 주장보다도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네. 그것이 없다면 진실이라도 빛을 잃고 말지. 자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레이븐과 캣에게 엑소시스트에 대해서 물었었네. 그들은 하나 같이 실망스러웠다고 하더군. 둘이 원하는 건 자유와 낙원이었네. 구속이 없는 자유와 책임이 없는 낙원 말이네. 둘은 자신들이 살던 곳에 대한 혐오가 대단하더군. 그곳은 강력한 억압으로 둘러져 있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엑소시스트들에게도 크게 다름을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더군. 경중의 차이만 있다고 느꼈던 모양이네. 하지만 그건 오해네. 그 어떤 곳도 구속과 책임이 없는 곳이 없네. 아니, 반드시 있어야만 하네. 우린 그것을 질서라고 부르네.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다름은 항상 갈등과 반목을 만드네.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 질서네.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 위한 방법이지. 질서는 이곳에도 있네. 그것이 싫다면 그들은 지상을 떠도는 수밖에 없네. 가장 자유로운 곳은 바깥세상이니까 말이네. 질서가 없는 자유. 질서가 없는 자유는 혼란일 뿐이네. 난 둘에게 혼란에 던져지면 만족할 것이냐고 물었네. 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지.”
바츠는 그가 다시 활기를 찾는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전부터 알게 모르게 반복되던, 탐탁지 않은 분위기가 다시 이어지는 것 같아 매우 불만족스러웠다. 그때마다 그의 의도가 불분명해지며 복잡하게 느껴지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를 향해 묻는 목소리가 절로 퉁명스러워졌다.
“이번에도 부사령관과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가 자네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네. 우리가 아까 함께 나눈 이야기들이 아닌가? 이상은 결코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는 말이네.”
바츠는 힘 있는 목소리로 걱정스럽게 말하는 그를 향해 더욱 바짝 다가갔다. 책상에 양손을 짚었고, 그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당신...자신을 인정받고 싶었던 거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인정받고 싶은 거잖아. 자신이 훌륭한 지도자였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가? 아니면 당신의 계획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설마 아르크의 그들이 당신을 받아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죄책감을 그렇게라도 덜고 싶은 것일 뿐이잖아. 안 그래? 그렇다면 당신은 틀렸어. 오는 길에 존을 만났어. 그 신시아라는 여자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 들었지. 그 잘난 진실을 말이야. 물론 어떤 게 진실인지는 몰라.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겠지. 난 그들이 맞다고 생각해. 당신은 또 다른 크루엘라를 만들었고, 새로운 헤러티커들을 만들고 있을 뿐이야. 그래놓고 뭐라고? 당신이 한 말은 전부 당신이 새겨들어야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르겠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리가 바짝 좁혀진 바츠의 얼굴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를 향해 애원하듯 말했다.
“당신도 알고 있는 거잖아. 당신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말이야. 정말 비겁해. 죽으려고 하는 이유는 뭐지? 충분히 더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잖아. 그 이유가 뭐냐고. 더 나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그것을 찾아볼 생각은 않는 거야? 새로운 것만이 진짜 새로움을 만든다고? 그래서 그런 거야? 누구처럼 당신도 그 선택을 하기에는 용기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당신은 용기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달아나려는 꼴이잖아. 당신의 실패를 에르네스트의 등 뒤로 감추려는 거잖아. 당신은 이곳에 신 같은 존재 아니야? 이곳에 수백 명이 당신에게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 명의 지도자가 무리를 지킨다면서? 그런데 대체 왜?”
바츠는 말을 끝내자, 자신이 호흡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느꼈다. 중간 어디쯤부터 자신도 모르게 흥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바츠의 뜨겁고 거친 숨소리에 떠밀리듯,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잔뜩 굳어진 분위기가 붉고 차가운 눈빛과 어우러지며, 주위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자네 특별하군. 그녀가 자네를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군. 오랜 기다림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받게 되겠어. 하지만 잘 생각하게. 내가 자네에게 하려던 말들 말이네.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느꼈길 바라네. 자네가 자꾸만 나를 부사령관과 혼동하는 이유 말이네. 나와 부사령관 그리고 장로 로리나. 우리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 제대로 답을 얻은 것이냐고 물었었지? 아르크가 자네에게 준 상처가 아마도 매우 깊은 모양이지? 기억하게. 자네의 고민은 답을 찾을 수 있지만 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을 말이네. 무슨 의미인지 알겠는가? 그만 가게. 가서 자네의 선택을 따르게. 폐기물 처리장. 아주 좋은 이야기였네. 그곳을 잊지 말게나.”
그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그는 몸을 옆으로 돌리는 것으로 더 이상의 이야기가 없을 것이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팔짱을 끼고 시선까지도 먼 곳으로 옮겼다. 바츠는 그런 그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불안하게 바라보는 게르하르트를 한 번 돌아봐 주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에르네스트와 눈빛을 교환한 후 방을 빠져나왔을 뿐이었다. 아무런 미련도 두지 않았다. 그가 뭐라고 하든지 이제는 확실해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깨어난 아델리나를 만났을 때 결심을 했고, 닥터의 방으로 오는 길에 만난 존을 통해서 확신이 섰다.
“왜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두는 거예요!”
등 뒤로 에르네스트가 닥터와 게르하르트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가 같이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얼핏 철없는 아이의 치기처럼 느껴졌지만, 진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둘의 목소리는 부정적이었다. 에르네스트를 다독여 말려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로인해 방안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에르네스트와 닥터의 언성이 높아졌고, 게르하르트의 목소리도 간간히 들려왔다. 하지만 바츠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허리춤에 있는 방독면과 카니지를 확인하며 스톡홀름을 떠났을 뿐이었다. 이곳에 올 때보다도 훨씬 심란한 마음이 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들의 소란 때문이 아니었다. 아델리나가 패토스와 레이븐 그리고 캣과 함께 용케 밖으로 나와 배웅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패토스에게 안긴 채로 바츠의 머리를 가슴에 품어 주었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자신도 구해주고 싶다며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바츠는 그녀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전진기지로 돌아왔다. 전진기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천둥 번개가 치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먼지처럼 흩날리는 안개비도 아니었다. 부슬부슬 내리며 청승맞게 지면을 적시는 비였다. 장로는 그 비를 ‘봄비’라고 했다. 지상에 남은 유일한 달콤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상이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봄비와 함께 돌아온 것을 보면 운이 좋을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몰래 겉옷에 묻은 물기에 혀를 대보았지만, 달콤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잘한 모래가 씹히며 지글거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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