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빛과 빚 -- > * 239화 *
“여행이 제법 흥미로웠던 모양이죠? 생각보다 훨씬 늦어졌네요.”
그녀는 전진기지에 머물고 있었다. 떠날 때만 하더라도 방은 바츠의 분노로 어지럽혀 있었다. 케일리의 뜻밖에 죽음과 아르크의 냉대로 바츠가 행패를 부린 탓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방이 지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여전히 지저분하기는 했지만, 부서진 테이블은 어디론가 치워져 보이지 않았고 다른 물건들도 다시 깔끔하게 자리를 찾아가 있었다. 바닥에 수북한 각종 종이들만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모두 그녀 덕분인 것 같았다. 그녀는 이곳을 수시로 다녀갔던 것으로 보였다. 그녀의 어깨에 비에 젖은 얼룩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군요.”
그녀가 막 안으로 들어선 바츠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바츠가 방독면을 벗자, 자신이 항상 가지고 다니던 그 하얀 스카프로 바츠의 얼굴을 손수 닦아주었다. 마치 나쁜 꿈을 꾸며 식은땀을 흘리는 아이를 돌보는 것처럼 애정 어린 손길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얼굴 전체에 미소가 피어난 그녀의 표정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비를 맞으며 온 탓에 습기와 뒤엉킨 땀이 닦일 때에는 상쾌함마저도 들었다. 그녀가 물기를 닦아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레나타가 다녀갔어요.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이미 아주 멀리 간 모양이에요. 그를 찾는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녀가 손을 거둬가며 바츠의 왼쪽 손목을 향해 한차례 눈치를 주었다. 바츠는 그녀의 손을 눈으로 쫓아, 가지런히 모아지는 것을 지켜본 뒤에야 아르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헌터의 코드 하나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틀림없이 레나타였다. 그녀가 아직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신경 쓰이는 것은 언제 도착한 것인지 모르는 수십여 통의 메시지였다. 모두 아르크에서 온 것들이었다. 한참 전에 보내진 것들로 발신인이 전부 벨리타였다.
“그들도 더 이상 여유가 없을 거예요. 당신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알 겁니다. 아르크에 가시덩굴이 잔뜩 자라 있죠. 우린 좀 더 서둘러야만 해요.”
바츠는 장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벨리타가 보낸 메시지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전부 걱정으로 가득한 것들이었다. 대부분 응답이 없는 것에 대한 우려였다.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애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문구들로 넘쳐 났다. 바츠는 아르크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랬나요? 하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죠.”
“난 그를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바츠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실바람처럼 내두른 뒤 말했다.
“사람은 말이에요, 한 가지 모습만 가지고 있지 않아요. 아주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죠. 이해하려고 할 것 없어요.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면 인정하는 것도 방법이죠. 나와 다른 또 다른 것으로 말이에요. 옛날 지식인들은 이런 사람의 이중적이고 모순된 행동을 보고 가면을 쓰고 있다고 표현했어요. 사람은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있다고 말이죠.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른 가면을 쓰는 거예요. 어렵나요? 그것으로 진실을 외면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는 건 옳지 않아요.”
“내가 일리트시의 집사이면서 아르크의 주민인 것을 말하는 겁니까?”
바츠는 그녀가 닥터를 실제로 만났고 그를 철썩 같이 믿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똑똑하군요. 그래요, 내가 일리트시의 주민이면서 케찰의 어머니인 것과 같은 거죠.”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뭐죠?”
바츠는 한걸음 내딛어 그녀와 사이가 거의 없을 만큼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기대가 실망으로 현재가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실망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죠?”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바츠의 시선을 피해 바츠의 가슴으로 눈길을 옮겼다가, 그곳에서 잠시 생각한 뒤에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의 미소가 완전히 사라진, 굳은 얼굴이었다.
“...어렵네요.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요. 하지만 나라면 이렇게 할래요. 눈을 감고 믿겠어요. 마음을 다잡고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그 기대를 의심하지 않도록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믿는 거죠. 그리고 빛을 찾겠어요. 감은 눈으로도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진한 실루엣을 만드는 그런 빛을 말이에요.”
이번에는 바츠가 입을 닫았다. 그녀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며 안색을 살폈다. 그녀의 굳은 얼굴은 달아나지 않았다. 약간의 흔들림도 느낄 수 없는, 당당한 모습으로 마주보았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군요...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죠?”
그녀가 급격히 밝아지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빛을 찾기 위해서는 집중력이 필요해요. 물론 난 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죠. 하지만 당신이 아르크의 가시덩굴을 혼자서 전부 베어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건 사실이죠. 그들의 저항은 극심할 거예요. 그들이 당장 빅애스를 굳게 잠구고 있다면 아무런 손도 쓸 수 없고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죠?”
“이제는 눈을 떠야죠. 눈을 떠서 그 실루엣을 손에 쥐어야죠. 그 빛은 힘이에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힘! 바로 군대 말이에요.”
“군대...”
바츠는 순간적으로 닥터가 브루드 메어를 통해 태어난 아이들을 기체화 하려던 목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분명 자신의 과거를 씻기 위해 사람들이 건강한 몸으로 오랜 수명을 누르게 만들고자하는 뜻을 내비치고 있었지만, 존이 말한 보툴리눔 톡신이라는 것의 본래 목적으로부터 변질과 남용 그리고 기체의 전쟁 도구로서 쓰이기 위한 용도의 변화에 대한 말이 복잡하게 얽히며 그 의도가 순수하게 다가오지만은 않았다. 왠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이 속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게르하르트와 에르네스트를 통해 본 기체의 강력함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러티커 앞에서조차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막강했다. 만약 닥터가 그런 기체들을 이끌고 무력으로서 사용한다면 그것은 강고한 군대였다. 그리고 비록 기체는 아닐지언정, 지금 그녀가 말하는 군대 역시 똑같이 느껴졌다. 그녀가 말하는 빛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군대! 당신은 아르크가 아니라 아이기스의 서울로 먼저 가야 해요. 그곳에서 블러드 케찰을 살해하고 우리의 힘을, 우리의 빛을 되찾아요! 그는 우리가 아르크에 혼란을 던져 넣는 데에 커다란 방해에요. 뒤에서 자꾸만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거예요. 하지만 그를 제거한다면 우린 아르크에 집중할 수 있을 거예요. 동시에 든든한 지원을 얻을 수 있죠. 틀림없어요. 그만 없다면 당신은 빅애스를 보다 더 손쉽게 떼어낼 수 있게 될 거예요. 아이기스가 다시 내 이름 앞에 순응하게 될 테니까요. 그전까지는 아르크도 우리를 별다른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도 우린 아르크를 해방시킬 것이지만 그는 정복을 원하고 있죠. 그는 백신이 없다고 여기고 있어요. 아르크를 파괴하고 싶어 하는 복수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이죠. 그를 반드시 살해해야만 해요.”
바츠는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부사령관도 같은 말을 했어요. 아르크에 백신이 없다고 했죠. 백신이 있다고 말한 사람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그들을 믿나요? 닥터를 만났잖아요? 그리고 나를 믿잖아요? 그들은 거짓을 말하는 거예요. 부사령관은 사람을 속이는데 아주 능숙하죠. 당신을 현혹시키기 위해 모른 척 꾸며내고 있는 거라고요!”
바츠는 닥터조차도 백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미심쩍은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지만, 그녀가 기대로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목소리를 높이는 탓에 애써 머릿속을 환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한쪽 어깨를 거칠게 낚아채며 소리치듯 말했다.
“들어요! 부사령관이 뭐라고 했는지 몰라도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그는 거짓만 말하죠. 당신 누이를 생각해요. 그가 당신을 기만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건 백신의 효과에 안정성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죠. 곧 그들은 그 안정성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올 거예요. 그들은 스스로를 선택받았다고 생각하죠. 레벨6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봐요. 자신들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죠. 그럼 우린 수백 년 전 그날 그때와 똑같아지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백신이라는 힘이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 힘 앞에 또 다시 굴복하고 따라야 하겠죠. 그럼 그때와 달라지는 게 없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거예요.”
바츠는 잔뜩 힘이 실려 딱딱했지만 그 안에 간절함이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레벨6에서 그의 딸과 부인이 하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의 딸에 무례로 비춰졌던 당돌함에 그들의 아니 정확히는 그의 부인에 진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심은 가식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장로가 움켜쥔 바츠의 어깨를 한차례 털어내듯 흔들고는 다시 말했다.
“나를 믿어요. 나를 믿고 서울로 가요. 서울로 가서 그를 제거해요. 그를 제거하고 우리의 빛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요. 당신이 스톡홀름으로 가서 닥터를 만나고 온 것도, 모두 무의미하게 된다고요.”
바츠는 그렇게 될 수 없었다. 닥터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 다녀오며 겪은 일들마저도, 케일리를 잃은 것처럼 허무로 채워 넣을 수 없었다. 그건 더 이상 받아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거부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바츠는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죠? 그는 칼리에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요.”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은 집사잖아요? 당신이 가진 힘을 써요. 헌터들을 모아요. 그들과 함께라면 그와 칼리에에 맞서는데 어려움이 없을 거예요.”
“그런 다음은요? 헌터들의 가족은 아르크에 있다고요. 그들이 과연 순순히 따를까요? 자신들의 가족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지켜볼 리가 없잖아요.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요.”
그녀가 화가 난 사람처럼 불꽃이 튀기는 눈길로 바라보며, 반대쪽 손을 바츠의 남은 어깨에 올리고는 바츠의 몸을 바짝 잡아당기고 말했다.
“그게 집사의 진짜 힘이에요. 그들은 철저하게 집사의 명령에 따르도록 훈련되었어요. 그건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게 상식이죠.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그들이 왜 당신 같은 집사에게 의지하는지. 집사가 왜 전진기지에서 신이라고 불리겠어요?”
바츠는 코앞까지 당겨진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매우 소름끼쳤다. 그녀가 보내온 오랜 세월의 흔적이 혐오스럽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그녀가 자신에 대한 오해에 항변하던 닥터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그와 영락없이 닮아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방금 전과 전혀 다르게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고, 표정 역시 한결 밝아졌다.
“물론 헌터들에게 당신이 서울로 가게 된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일단은 칼리에를 토벌한다는 말로 해요. 그리고 그 다음은 내가 준비하도록 하죠.”
“당신이 어떻게요? 뭘 하려는 거죠?”
“나를 믿어요.”
바츠는 그녀가 못 미덥다기보다는, 그녀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지로 몹시 궁금했다. 그 궁금증이 아니었다면 마지막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가 이미 확신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대답에 되묻기도 전에, 문 밖 통로에서부터 인기척을 느끼며 신경을 그쪽으로 돌려야만 했다. 전부 둘이었다. 특별히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지만, 한쪽에서 조급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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