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빛과 빚 -- > * 241화 *
바츠는 그의 대답을 듣고 생각에 잠겨야 했다. 아르크와 각 레벨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아뜩하게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한다. 자신들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드린다. 누구하나 주어진 일과 자리가 왜 자신의 것이어야만 하는지, 원초적인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다. 고작해야 고단함에 대한 불평이 전부다. 그것은 마치 혈연 같다. 강제적이지만 당연하고, 원치 않아도 부정할 수 없는 관계. 그들에게 그것은 생활이고 삶이다.
삶이란 대체 무엇일까? 지나는 흔적? 흐르는 시간?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흔적. 시간은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차가운 기계다. 오직 맨 처음 누군가가 정해준 그대로 흘러가기만 한다. 아무런 의심도 없고 조금의 융통성도 없다. 그래서 때로는 잔인하다.
바츠는 그것을 정신없이 이뤄지던 이전의 집사인 칼과의 작별에서 처음 느꼈다. 정확히는 친구를 쓸쓸하게 버리고 말았다는 죄책감이 피어나면서였다. 당시 왜 그 죄책감에 사로잡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애써 떠올리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무감각해졌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품으며 비롯되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었다. 마치 지금의 케일리처럼 말이다.
케일리의 죽음은 슬펐다.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분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여전히 유효했다. 또 한 번 이곳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난동을 부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굳이 자극을 받거나 감정을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하루하루를 지루한 일상으로 보낼 수 있었다. 닥터를 만나러 다녀왔던 지난날 동안, 케일리를 떠올렸던 순간이 몇 차례였는지 꼽아보면 더욱 분명했다. 마땅히 특별했던 적은 없었다. 언젠가 부터였는지는 모른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의무감이 되어 흔적으로나 남아있었다. 그 흔적이 기억 속에 기록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 기록을 쫓아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기록은 역사다. 기억은 시간이고 사람은 시간을 산다. 즉,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흔적이 역사가 되고 기억 속에 남으며, 기억은 시간을 따라 흐른다. 결국 현재는 자신이 만든 것이고, 변명 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당위성을 스스로가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삶이다. 아르크의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아무런 의문도 제시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들의 삶은 당연했던 것이다.
바츠는 그 삶이 공평한 가에 대한 의문으로 생각을 이었다. 그들의 삶이 달라질 수는 없는 것일까? 그들에게도 다른 삶의 자격이 주어지면 안 되는 것일까? 그들의 기록이 실수로 점철되어 있을 수도 있지 않는가? 그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단 한 번도 받지 못한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물론 아르크에는 그 기회가 분명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원론적인 위치에서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우선 역사를 바꿔야 할 것이다. 그 전에 기록을 바꿔야 하고, 기록이 바뀌면 시간의 흔적이 바뀐다. 역사가 변하는 것이다. 시간의 흔적이 바뀌면 삶이 변하게 되는 것이다. 닥터가 스톡홀름에서 그토록 열심히 책을 쓴 이유일까? 그는 그곳에서 무슨 책을 쓰고 있었던 것일까? 내용에 상관없이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곳에 담긴 내용을 믿게 되겠지? 닥터는 정직했던가?
바츠는 고개를 내둘러 털어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을 계속해서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굳이 그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정작 당사자들조차 관심이 없는 일이었다. 그저 장로가 말한 혼란이 그것일 거라고 멋대로 결론지을 뿐이었다. 닥터가 책을 쓰는 그런 일 말이다. 하지만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르며,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훈.’
그는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늘 의심했으며 무엇 하나 쉽게 받아드리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곧 도전이었다.
‘신이 가진 경외로부터 자유로운 자.’
닥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어쩌면 지훈이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을 믿지 않는 자. 지훈은 닥터의 말에 가장 근접한 사람 같았다. 그의 크고 작은 의심들이 분란을 만들고는 했지만, 지금 이렇게 보면 꽤 흥미로운 것들도 있었다.
‘모두가 똑같은 세상.’
장로가 말하는 자유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자유를 위해 혼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 혼란! 지훈이 만들었던 그 분란! 하지만 재미난 사실은 그를 마지막으로 다시 보았을 때, 그에게서 더 이상 아무런 불만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완전히 잊은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처럼 말이다.
“...이보게, 괜찮나?”
바츠는 부사령관의 걱정스런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의 근심어린 표정이 이쪽을 신중하게 살피고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음식을 접한 것처럼 사뭇 경계심이 묻어났다. 하지만 바츠는 그에게 대꾸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지나쳤다. 그 뒤로 몇 발치 떨어진 곳에, 굳은 얼굴로 기다리는 사람들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온몸으로 긴장감을 토해내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몹시 불안한 모양이었다. 애써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지금이 빨리 지났으면 하는 기색으로 역력했다. 부사령관이 바츠의 안색을 살피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다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 상상력은 늘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남에게만큼은 인색하네. 자신의 처지는 가혹하고 부족하며 불합리하다는 불만에 싸여있고, 남의 처지는 한가롭고 분에 넘치며 혜택을 받고 있다는 질투로 뜯어내지. 그런 사람들을 오래전에는 서민(person)이라고 불렀다고 했던 것 생각나나? 그 포로(prisoner)들 말이네.”
바츠는 대답을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겨 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한결 여유가 생겨난 목소리였다.
“그래, 현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 과거부터 그랬지. 그들은 항상 불평만 늘어놓았네. 자신이 뭔가를 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네. 그저 자신만 편해보겠다는 이기로 가득하지. 그 이기를 모두가 편해야 한다는 가식으로 포장하고는 했네. 그들 중에 자신의 요구가 받아지면 혼자서 떠나버리고는 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은 없단 말이네. 우리가 그걸 모를 것 같나? 우리가 그런 얄팍한 속셈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줄 아나? 당장 일리트시의 주민들을 보게. 이미 전에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나. 그들이 무엇을 하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지. 노력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시도가 아니라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도전이네. 그들은 항상 도전이 아닌 시도를 해보고 노력을 했다고 말하지. 그건 틀리네. 그건 착각이네. 그들은 그래놓고 상실감을 느끼고 분노를 만드네. 자신의 실패를 남의 것을 빼앗는 것으로 위로 받으려고 하지. 그 과정마저도 정말 추하다면 믿겠나?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온갖 가식으로 자신을 덧칠하네. 이전의 사람들이 세워둔 질서를, 그들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질서로 깨뜨리려고 한단 말이네. 그리고는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그건 결코 혁명이 아니네. 언제부터 혁명이라는 단어가 침탈을 상징했나? 그들은 그저 혼란을 만들고, 그 혼란을 틈타 질서를 기만하려는 것일 뿐이네. 아주 저급한 행위지. 이전의 질서는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니네.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보완되고 수정되어온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쉽게 깨지지도 않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사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네. 그저 자신들의 새로운 질서가 기존의 질서를 대체하기만을 원하지.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지상의 무뢰배들과 뭐가 다른 것인가? 무고한 떠돌이들을 상대로 살인을 저지르고 강도짓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말이네. 과거에는 이런 관계를 보수와 진보라는 말로 부르기도 했네. 보수는 질서의 중심이고, 진보는 그 중심에 대한 의심이지. 기존의 질서가 보완 수정될 수 있도록 만드는 관계네. 아주 바람직한 관계지.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진보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한 적이 없다면 믿겠나? 진보가 보수를 완전히 몰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들이 항상 부르짖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올 것 같나? 천만에! 그 중심에 서게 되는 사람들만 그렇게 될 뿐이네.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그건 곧 새로운 진보와 질서 앞에서 또 다른 보수가 되고 만다는 소리네. 웃기지 않나?”
그는 자신이 말하고도 기가 차는 지, 연신 혀를 차며 헛웃음을 토해냈다. 그 사실들이 이야기 되는 것만으로도 매우 불쾌해 보였다. 화가 난 사람처럼 호흡이 거칠었다.
바츠는 그런 그를 지켜보며 닥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선택에는 후회가 있고 희생이 있다고 말했었다. 공평한 기회를 말할 때 나왔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때 그를 지켜보며 부사령관이 겹쳐 보였던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둘은 같은 의미를 다른 말로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그럼 그때 닥터가 말했던, 그 후회와 희생이 항상 가져오는 환희와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바츠는 그게 혹시 장로가 말하는 혼란 뒤에 따라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봐야만 했다.
부사령관이 말했다. 홀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공에 대고 몇 번이나 씰룩거리며 누군가를 비웃고 난 뒤였다. 목소리는 제법 진정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일을 쉽게 이야기하고는 하네. 뭐든지 간단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그 포로들, 그 진보주의자들일수록 심하단 말이네. 막연하게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면 모두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그저 이상에 빠져 사는 것이네. 오로지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환상에만 젖어있지. 내가 지난번에도 말했지 않는가? 그건 무책임일 뿐이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얼마나 들어보았나? 그들은 바보가 아니네. 그들도 이해타산을 따질 줄 알지. 어떤 것이 옳은지 알고 있다는 말이네. 그래서 문제를 지적하고, 이상적인 견해를 제시하네. 그것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지. 그들이 정말 모두를 위한다고 생각하나? 그 안에는 올바른 인간성도 포함되네. 그 올바른 인간성에는 희생이 딸려 있지. 그들은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네. 자신들의 실패를 우리가 책임져주길 원하는 것이지. 하지만 정작 자신들조차도 그런 선택을 하지는 못하네. 왜 그런 것 같나? 빤하지 않나? 그렇게 되면 자신이 손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네. 그들은 정말 영악하네. 희생은 배려로 이루어지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지. 대가를 바라는 희생은 배려가 아니라 투자가 되네. 어느 쪽이 더 쉬울 것 같나? 희생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네.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네.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지.”
그가 한 차례 숨을 고르고 말했다.
“자네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가 어떻게 보이나? 그저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 같나? 아마도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네. 그건 순전히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네. 하지만 당장 300년만 보아도 우리의 삶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네. 크루엘라가 창궐했고, 헤러티커가 탄생했네. 더 길게 생각해볼까? 한 때는 지구가 지금보다 수십 배 더 추웠고, 또 다른 때에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의 유독가스들이 가득하기도 했네. 우린 단 한 번도 안전한 삶을 살았던 적이 없단 말이네. 그 수많은 위협 속에서 사람들을 지키고 이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가?...!”
바츠는 그에게 한쪽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을 가로 막았다. 느닷없는 상황에 그가 조금 놀란 듯 보였지만, 따로 미안한 감정이 생기지는 않았다. 바츠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과거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게 된 것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케일리가 이곳에서 죽었던 것처럼?”
“오, 자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설마 자네 누이를 내가 살해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건 이미 아니라고 말했지 않는가? 조금의 의심이라도 생겨났다면 그건 전부 그녀 탓이겠지. 장로 로리나 말이네. 그녀가 옆에서 자네와 우리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부추겼을 것이네. 난 절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네. 난 자네를 사랑하네. 그리고 자네 누이도 사랑하지. 난 아르크의 모두를 사랑하네. 내가, 내가 차분하게 설명해주겠네. 내게 그때처럼 자네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할애해주게.”
그가 급격히 슬픈 얼굴을 하며 애원하듯 말했다. 중간에 몇 번이나 바츠의 팔을 붙들고 싶은 움직임이 있었지만, 조심스럽게 망설이는 데에서 그쳤다. 바츠는 그런 그를 향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듣지 않겠습니다. 대화는 이 정도로도 충분한 것 같습니다. 환영받지 못한다면 머물러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죠. 그것도 질서가 아닙니까?”
바츠는 다시 한 번 그를 지나,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관리자들과 군인들을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오래 전 나르의 방으로 향할 때가 절로 떠오르는 분위기였다. 그때 가는 도중 보았던 사람들의 시선이 꼭 지금의 저들과 닮아있었다.
‘불청객.’
탐탁지 않은 관계를 마주한, 경계심 가득한 시선. 바츠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부사령관의 진심을 그들이 말하고 있었다. 전진기지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이나 하라고 눈으로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쓸데없이 불안을 만들지 말라는 경고도 함께였다. 꼭 지훈이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했을 때, 친구들의 시선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소란은 불편일 뿐이었다.
바츠는 부사령관이 다급하게 부르며 쫓아왔지만 돌아서지 않았다. 곧바로 샤워장으로 몸을 감췄다. 아직 마르지 않은 소독액 위로, 또 한 번 흠뻑 적셔 오는 또 다른 소독액을 느낄 뿐이었다. 어깨에 강철을 짊어진 것처럼 매우 아리고 무겁게 느껴졌다. 플랫폼으로 빠져나왔을 때에는 대체 무슨 기대를 하고 이곳에 온 것인지 후회가 밀려들기까지 했다.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버니에투와를 부추겨 곤경에 빠뜨린 것에 대해서 사과라도 할 것이라는 생각했던 것일까? 헛구역질이 절로 일었다. 분명 소독액 때문이다. 방독면의 흡기구로 스며드는, 소독액의 역겨운 냄새가 속을 괴롭게 만들었다. 걸음을 떼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르크의 눈에 작은 진동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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