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빛과 빚 -- > * 242화 *
‘잘 있는 거지? 왜 답장이 없는 거야? 다친 건 아니지? 걱정된다...바쁜 거야? 별 일 없었으면 좋겠다. 난 잘 지내고 있어. 우리 가족들도 무사하고. 너도 건강했으면 좋겠다. 나...곧 정식 연구원으로 인정받게 될 것 같아.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우리 가족이 전부 레벨4로 가게 되었다는 거야.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정말 꿈만 같아. 너에게 처음으로 말하는 거야. 아직 부모님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제일 먼저 네가 생각났거든. 하지만 넌 이번에도 답장을 보내주지 않겠지? 그래서일까? 너무 기쁜데, 우울하기도 해. 네가 옆에 있었다면 무척이나 기뻤을 거야. 왜 답장이 없는 거니? 이제 내가 기억나지 않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 사실...나 불안해. 네가 걱정하게 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지만, 이곳 조금 이상한 것 같아.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어수선하다는 느낌이 들어. 허공에 붕 뜬 것처럼 말이야. 어제는 빅애스가 또 다시 개방될 거라는 소문도 있었어. 이미 전에도 한 번 있었잖아? 기억하지? 무서워. 군인들도 전부 긴장한 모습이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지난번 너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날 보았던 하얀 옷을 입고 검을 차고 있던 사람들도 그렇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헌터나 집사처럼 이름조차 없는 사람들이더라고. 관리자들 중에도 그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말까지 있어. 일부는 아르크로 돌아온 헌터 중, 지상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라는데 모르겠어. 난 요즘 너를 볼 수 있는 날이 다시 올 수 있는 걸까 하는 의심으로 정신이 없거든. 그러니 제발, 제발 답장 좀 줘. 네가 너무 보고 싶다...’
벨리타로부터의 메시지였다. 이번에도 역시 걱정으로 가득했다. 군데군데 묻어나는 변함없는 애정이 너무 고마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이전 메시지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번에 보내온 메시지가 지금까지 중 가장 장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야만 할 것 같을 정도로 매우 긴 글을 보내왔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한 음절마다 절절한 마음으로 적어 내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메시지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바츠는 메시지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 뒷부분이 그녀의 애절함으로 한층 깊어진 단어들이 채우고 있을 것이라는 걸, 쉽게 예측해볼 수 있었는데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팔을 치워버리고는 허리를 일으켰을 뿐이었다. 당장의 기분으로는 도저히 그녀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그녀는 아르크 안에 안전하게 머물고 있다는 생각으로 애써 마음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그녀를 만나는 건 나중에, 마지막으로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늘 당당하고 솔직하던 그녀가 약해져 있을 모습이 눈앞에 밟히니, 차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샤워장 입구를 돌아보게 되었을 정도였다.
“지상으로 돌아가는 집사시죠?”
그때 뒤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독면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겁에 질린 사람처럼 심하게 울리고 있었다.
“제가 밖으로 배웅해드릴게요.”
바츠는 그녀를 돌아보며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칼바람 앞의 옷자락처럼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진심에서 흘러나오는 호의가 담겨 있었다. 이곳에 유일한 친절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가 아까 이곳으로 돌아올 때 보았던, 그 어수룩한 모습의 군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 주위에 여전히 경직된 긴장감이 맴돌고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전에 허둥대던 모습은 거의 대부분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더 이상 누군가의 도움은 필요해보이지 않았다. 한쪽 어깨에 걸고 있는 소총만 부자연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여전히 그녀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괜히 그녀를 훑어보게 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 쓰인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의 안내로 빅애스를 통과하고 난 뒤였다. 그녀의 안내가 언덕 위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르크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도 동행했다. 꼭 전진기지까지 안내해줄 것만 같았다. 그녀의 호의가 무의미해지고 있었다. 오히려 불쾌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부사령관의 지시로 감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걸음을 멈추고, 한 발치 떨어진 곳에서 따라오던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비명을 지르고 뒤로 주저앉지 않은 것이 다행으로 보일 만큼 화들짝 놀라며 제자리에 섰다.
“뭐하는 거지?”
바츠의 물음에 그녀가 대답은 하지 못하고, 방향을 잃은 손짓을 허공에 휘두르며 앓는 소리만 냈다.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사람처럼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곧 몸을 휙 돌리더니, 반대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길을 잘못 들었어요! 저, 저쪽으로 가려고 했어요!”
바츠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어딜 가려는 거야?”
“네? 난...”
그녀가 혼자서 어깨를 들썩일 만큼, 또 한 번 놀라며 돌아보았다.
“어딜 가려는 거냐고. 새로 온 군인인가?”
바츠의 물음에 그녀가 뛰어오르듯 한걸음 크게 다가오며 반색했다.
“네! 맞아요!”
“소속이 어디야?”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방금 크게 움직이며 휘둘러진 소총을, 다시 제대로 어깨에 걸도록 손가락으로 눈치를 주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짐짝을 들어 올리듯, 총기의 벨트를 바짝 끌어올렸다. 아이처럼 해맑은 모습이었다. 방독면 렌즈로 비쳐지는 그녀의 시선이 6살 꼬마로 보였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이번에도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직 말이 서툰 모양이었다. 고작해야 머뭇거리며 의미 불명의 감탄사만 이어낼 뿐이었다.
“소, 소속이요? 아...그러니까...에...”
바츠는 그녀의 뜻 모를 감탄사를 칼로 잘라내듯 가로막으며 물었다.
“키예프 시티?”
“네! 맞아요! 이번에 그곳으로 발령받았어요!”
바츠는 또 한 번 크게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바로 기억나지는 않았다. 애써 떠올리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어렵지는 않았다.
“카르멘, 카르멘 맞죠?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바츠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약간의 의심도 없을 만큼 자신했다. 그녀는 틀림없이 부사령관의 딸인 카르멘이 분명했다. 그러자 그녀가 어리숙하다고 느껴질 만큼 정직한 태도로 반응했다. 양어깨를 동시에 움찔했고, 그 움직임에 스스로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겁에 질렸다기보다는 꽤나 당황한 듯 보였다.
“...어떻게...알았어요?”
바츠는 되묻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어야만 했다. 자신의 객쩍은 행동을 용기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한심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는 말을 제대로 할 줄 알게 된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바츠는 그녀에게 차갑게 대꾸했다.
“군인들은 발령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그건 아르크 내에서나 쓰이는 말이죠. 무엇보다도 지상에는 당신처럼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으니까요. 대부분 땀 냄새를 비롯해서, 온갖 체액이 더러운 먼지와 뒤범벅된 비린내를 풍기죠. 당신 냄새는 1km 밖에서도 맡을 수 있을 겁니다.”
바츠는 말끝에 그녀가 현재 얼마나 큰 위험에 노출되었는지에 대한 경고는 생략했다. 괜히 그녀를 겁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영리했다. 그 의미를 따로 표현하지 않았는데에도 용케 알아들었다. 그녀가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돌아가요. 아직 빅애스가 닫히지 않았을 거예요. 부사령관의 딸이 밖으로 나왔다면 닫을 수도 없겠죠.”
“아니에요...아버지는 몰라요. 내 멋대로 나온 거예요. 아무도 몰라요.”
그녀가 바츠가 아닌 바닥에 대고 대답했다.
“어쨌든요. 당신이 나와 함께 밖으로 나오는 걸, 플랫폼의 군인들이 봤잖아요.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초조해하면서 말이죠. 그들을 힘들게 만들지 마요.”
바츠는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는 플랫폼의 군인들이, 얼마나 겁에 질려 있을지 생각하며 그녀를 다독였다. 하지만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서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상점 앞을 지나는 아이 같았다. 원하는 물건을 사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는, 나름대로의 반항이었다. 바츠는 그녀를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데려가는 부모처럼 강제로 떠밀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저항이 먼저였다. 그녀는 바츠가 한발 다가오자, 고개를 번쩍 들면서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애처로웠다.
“난 아르크를 떠나려고요...거긴 너무 답답해요. 숨이 막힐 지경이죠. 내가 어디에 있든 감시 받고 있다고요. 식사를 할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말로 언제나 지켜보고 있죠. 그건 정말 끔찍해요. 하지만 그보다도 더 끔찍한 건, 정형화된 틀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제약이에요. 내가 아르크의 부사령관에 딸이라는 이유로, 반드시 어떤 것을 해야만 하는 그런 것이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난 다른 레벨로 가서 연구원이 되고, 엔지니어가 되고, 군인이 되면 안 되는 건가요? 난 그게 너무 싫어요. 왜 자꾸 억압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지상이 더 다양한 기회들이 있죠. 하지만 아르크보다 훨씬 무책임하고 잔인합니다. 당신은 몰라서 그래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자유로움이 지상에서는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명분을 지니는 횡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돌아가요.”
바츠는 그녀를 위해서 진심으로 조언했다. 그녀에게 아무런 사고가 없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조만간 자신이 아르크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때 고려하고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려던 것은 생략했다. 그녀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대답했다. 지금까지 중 가장 단호한 말투였다.
“몰라요. 난 그래도 갈 거예요.”
“어디로요?”
바츠는 그런 그녀가 레이븐과 캣을 처음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무모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비록 불분명했지만, 최소한 목적지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기본적인 현실감마저도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고집은 그저 억지였다.
“에이든이 남쪽으로 가면 카르카손이라는 도시가 있다고 했어요. 모두가 자유로운 곳이라고 했죠. 거기에 가볼 거예요. 자유도시. 이름도 마음에 들어요. 그곳에는 모든지 다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예요. 난 믿어요.”
바츠는 그녀가 긴급히 말을 내뱉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차분하게 대꾸해주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저 검술도 제법 할 줄 알고 사격도 할 줄 알아요. 놀랄 걸요? 탄약도 충분하고요. 애니밀도 챙겨 왔죠.”
그녀가 한쪽으로 턱을 치켜들며 가슴을 활짝 폈다가, 자신의 어깨에 걸고 있던 소총을 한 차례 바짝 끌어당겼고, 마지막에는 주머니에서 다량의 애니밀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녀는 그것만으로 자신을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바츠는 그녀의 생존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없어 가타부타 판단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고집을 돌리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여기서 그녀와의 실랑이가 낭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바츠는 그녀가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고 몸을 돌려야만 했다. 애써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저 그녀에게 별일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치며 다시 멈춰 서야 했다.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한 사람 데려가 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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