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빛과 빚 -- > * 246화 *
그녀는 한 발 늦게 바츠를 발견했다. 바츠의 보행이 워낙 조심스러웠던 탓도 있었지만, 그녀가 학교 건물을 에워싼 호숫가에 앉아, 시선을 먼 곳에 고정하고 있었던 탓이 컸다. 특별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방독면 때문에 그녀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그 사실을 대변하는 그녀의 멍한 듯한 옆모습을 통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직은 싸늘한 날씨와 영원히 흐릿할 하늘 그리고 뒤로 보이는 낡은 학교 건물과 주변을 집어 삼킨 검은 호수 물의 스산함이 그녀의 심경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꼴이 그게 뭐야? 칼집은 어쩌고 그렇게 왔어? 너 완전 웃긴다!”
레나타가 바츠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크게 반가워했다. 흥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달려오는 모습이 마치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멀리서 비쳐졌던 그녀의 침울한 모습이 착각이었다고 느껴질 만큼 요란했다. 바츠는 한숨처럼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쾌활한 모습이 입가에 절로 미소를 그리게 만들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는 것처럼 매우 빠르게 흘러갔다. 그녀를 발견했을 때의 여운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그녀의 모습은 낯설 만큼 매우 어두웠다. 바츠는 비록 짧았지만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나한테 실망했지? 미안해.”
그녀가 코앞에 바짝 다가서더니, 급격히 우울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힘없이 추락하는 목소리가 슬픈 시선과 함께 바츠의 눈치를 살폈다. 바츠의 무덤덤할 만큼 차분한 반응에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테라치를 찾아달라고 했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불편해진 마음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향해 얼른 고개를 가로젓고 한쪽 어깨를 살며시 두드려주었다. 괜히 힘들게 만든 것 같아 오히려 미안했다. 지상에서 누군가의 흔적을 찾는 일은 누가 하더라도 매우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실망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의 실패는 처음부터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
“대신 내가 다른 걸로 기쁘게 해줄게, 응? 알겠지?”
레나타는 이전의 분위기를 금세 되찾았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바츠의 한쪽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방금 전 풀이 죽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두운 분위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시름 놓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복잡한 걱정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녀를 만진다는 것은 틀림없이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죄책감과 더불어 꺼림칙하기도 한 일이기도 했다. 아델리나를 스톡홀름에 남겨두고 온 이상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잠깐의 기우에 불과했다. 그녀는 바츠를 학교 안으로 잡아끌어, 한쪽에 미리 준비해둔 간이 화덕 앞에 마주보고 앉는 것으로 그쳤다. 건물의 크고 작은 잔해들로 만든 작은 화덕이었다. 그녀는 그곳에 서둘러 불을 지피고,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프레이를 올렸다. 그리고는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정신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매우 즐거워 보였다.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바츠는 그저 편안한 미소로, 호들갑스럽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를 지켜보기만 하면 됐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말을 이어갔다.
“웃기지? 정말이야. 헤러티커 엄지를 먹으면 강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내 앞에서 억척스럽게 씹어 먹고는 덤벼들었었다니까? 헤러티커의 엄지에 놈의 기운이 농축되어 있다나 뭐라나. 웃기지 않아? 지상의 사람들은 가끔 보면 이상해. 엉뚱한 것을 진실인 것처럼 믿거든. 그냥 딱 한 번만 의심을 해도,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을 텐데, 그 의심을 절대로 하지 않아. 참 신기해. 전에는 서쪽의 낙원으로 가겠다는 사람도 보았어. 그곳에 가면 모두 풍족하게 먹고, 편안한 잠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모두가 행복한 도시라고 했어. 그래서 이름도 자유도시래. 한심하지? 서쪽으로 가면 엑소시스트들의 도시 뿐이잖아. 안 그래?”
바츠는 그녀의 물음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전처럼 가만히 귀를 기울인 채, 약간의 즐거움이 묻어나는 짧은 코웃음을 친 것이 고작이었다. 서쪽에 자유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 우는, 칼맨들의 도시가 있다는 말은 그냥 삼켰다. 그녀의 흥을 굳이 깨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늘어놓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건물에서 3일을 머물렀다. 다른 헌터들이 그 사이에 하나둘 도착했다.
건물은 가끔 프레이가 추적거리듯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소리와 건물 뒤편에 호수물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 외에는 귀를 막은 것처럼 고요했다. 누군가를 기다리기에는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마치 전진기지의 벽난로 앞에 앉은 것 같았다. 아무도 없었다. 바츠와 레나타 그리고 차례로 도착한 헌터 셋이 전부였다.
그들은 모두 사내였다. 하나같이 낯설음보다는 묘한 긴장감을 온 몸에 두르고 나타났다. 머릿수가 늘어날수록 그 긴장감은 더욱더 진해졌다. 한결 같이 똑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제각각 다른 기묘한 모습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였다.
이들은 전부 말이 없었다. 말을 할 줄은 아는지 의심이 들만큼 말수가 적었다. 심지어 내내 유난스럽게 떠들던 레나타마저도 이곳에 도착하며 보았던 그때의 낯선 모습으로 돌아가며 침묵을 지켰다. 정확히 다른 헌터가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부터 변했다. 차갑게 느껴질 만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들에게 생기가 도는 것은 딱 한 순간뿐이었다. 바로 바츠를 상대하게 되었을 때였다.
이들은 항상 개별적으로만 바츠를 상대했다. 누가 직접 말을 꺼내 정한 것은 아니었다. 눈치껏 자신의 차례를 지키며 한명씩 바츠의 곁으로 다가왔다. 순서가 겹치며 어색해지는 순간은 단 한 번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 사람이 바츠 가까이로 다가와 자리를 잡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최대한 먼 곳으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레나타도 예외가 아니었다. 각자가 마치 자신 스스로와 바츠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서로를 애써 외면하고, 억지로 거리를 두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긴장감에 바츠는 가슴이 막힌 것처럼 답답함을 느껴야만 했다. 심지어 이들은 서로 간에 시선을 교환하는 일조차 없었다. 어쩌다 실수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달아나듯 얼른 피하고는 했다. 오가는 대화가 드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들의 대화는 정말 필요로 하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대부분 재빠른 눈치로 해결이 되고 있었다. 바츠는 그 이유를 학교를 떠나고 이틀째 되는 밤에 물을 수 있었다. 레나타였다. 그녀와 함께 불침번을 서게 되며 기회가 찾아왔다. 다른 헌터들은 잠이 들었다. 바츠는 검은 세상과 모닥불이 만들어낸 느슨한 분위기를 이용해 입을 열었다.
“왜 서로를 어려워하는 거야? 내가 잘못 느낀 것 아니지?”
레나타는 옆에 쪼그리고 나란히 앉아, 모닥불 안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불쏘시개로 모닥불 안쪽을 장난스럽게 헤집고 있었는데, 생각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눈을 뜨고 자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멍한 눈치였다. 일전에 보았던 그 모습이었다. 늘 소란스럽게 굴던 그녀의 모습이 상상조차 되지 않을 만큼 무거웠다. 그녀가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녀와 지상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그녀에 대해서 너무 많은 걸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 모습 그대로, 조금 늦게 반응했다.
“...그랬어? 글쎄...모르겠는데?”
“다들 경계하고 있잖아. 아니야? 대체 왜 그런 거야?”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 아델리나와 테라치를 떠올리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모두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 서로를 대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친구라는 관계를 유지하고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분명 저들 중에도 미사를 함께 다닌 동기가 있을 테고, 아르크 거주자인 만큼 지상으로 나오기 전부터 여러 차례 마주친 적도 있을 것이다. 아니, 레벨1에 거주한다면 한 번쯤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어야 할 텐데, 이들은 전혀 아닌 것 같았다. 철저하게 선을 긋고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혼잣말을 하듯 모닥불 안쪽으로 말을 던져 넣었다.
“음...아마도 수줍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나도 함께 졸업한 녀석이 하나 있는데, 사실 만날 일은 없어. 나머지는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진짜 낯선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야. 어쨌든 그래. 다른 헌터를 만나는 일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 동기 녀석은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당연한 일이잖아? 헌터들은 각자 전진기지에 배정을 받으면 그곳에 해당되는 구역만 돌아다니니까. 다른 헌터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적어지는 거지. 전진기지마다 배정된 헌터의 수도 엄청 적은데, 그마저도 다른 전진기지의 헌터들은 제외하게 되니까 말이야...음...어쩌면 귀찮은 걸지도 모르겠다...아! 생각났다! 아주 오래 전에 그러니까 내가 헌터가 되어서 지상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야.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겠네. 그때 우연히 헌터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에게 말을 거니까 그가 그랬어. 말 걸지 말라고. 그건 실례라고 하더라고. 재밌지? 난 처음이라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말을 걸지 말래. 지금 생각하니까 어이가 없네.”
그녀는 상념에 잠긴 사람처럼 읊조리다가, 중간에 어깨를 한 번 크게 들썩였고, 마지막에는 불에 구워지던 고기의 기름이 튀기듯 난데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숨소리를 죽이고 낄낄거리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웃음을 진정시키고는 바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밤에 내리는 비처럼 우울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야. 우리가 하는 일들, 우리가 했던 일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들. 그걸 아는 사람은 집사 한 사람이면 충분하니까 말이야. 안 그래? 굳이 다른 누군가에게 말할 필요가 없잖아. 그 상대가 같은 헌터라면 더더욱 말이야.”
그녀가 다시 웃었다. 아니, 웃는 것 같았다. 방독면 렌즈를 통과하는 그녀의 시선이 스파크처럼 반짝였다. 모닥불의 불길이 렌즈에 그려진 탓일지도 모른다. 모닥불의 불꽃이 그녀의 렌즈 위에서 현란하게 춤을 추며 고여 있었다. 마치 눈물이 차오른 눈동자처럼 렌즈의 광택이 일렁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바츠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이들의 행동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겠다는 다짐도 함께였다. 이들의 양식을 존중하고 싶었다. 이들이 짧은 메시지 하나를 받고 서둘러 달려와 따라 주는 것처럼, 자신 역시 이들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다였다. 그러자 레나타가 고개를 한쪽으로 슬며시 기울이며 물었다.
“왜? 이런 우리가 이상해?”
바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당겨 자신의 어깨에 기대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저항은 없었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그 자세를 고수했고, 밤은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둘 사이에 대화도 없었다. 아침 일찍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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