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빛과 빚 -- > * 247화 *
동쪽으로 가는 길은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가끔 따분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지루함이 이어지고, 약간의 허전함이 전해질 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드문 지상의 인적이 무리 진 헌터들로 인해서 더욱더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헌터들의 실루엣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부리나케 달아나버렸다. 노상강도들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고, 떠돌이들은 멀리서부터 몸을 숨기고 내빼기 바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씁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바츠를 오히려 편안하게 해주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다른 때에 비해서 좀 더 과해 떨떠름하기는 했지만 이미 익숙한 부분이었고, 평소라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위를 경계하며 피로를 쌓던 그 수고를 한결 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료하다고 생각될 만큼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오직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크고 빠른 암살자, 헤러티커의 위협만이 걱정이었다. 물론 이마저도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무리는 바츠를 포함해서 무려 다섯이나 되는 헌터들이었다. 아무리 날랜 헤러티커라도 이들의 감각을 모두 뚫고 습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바츠가 여유가 생길정도로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렇다고 마냥 부주의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다른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평소의 기믹을 계속해서 유지했다. 신속하면서도 조용한 보행, 크고 작은 주변 사물들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와 의심이 그것이었다. 그저 마음을 좀 더 편하게 먹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음이 편해질수록, 주변을 탐색하는 감각은 더욱더 탁월해졌다. 오히려 집중력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잔뜩 긴장하고 주위를 살필 때보다도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을 타고 지나는 작은 먼지까지도 감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유로움이 만들어내는 쾌감이 기분을 환기시키며 시야를 넓혀주고 있었다. 왠지 즐거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기분을 한가롭게 만끽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헌터들이 각자 본분에 충실 하는 동안, 바츠 역시도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차례대로 돌아오는, 헌터들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가장 키가 작은 헌터였다.
“빌어먹을! 아이기스 녀석들은 전부 찢어 죽여야 해. 그것들은 모두 쓰레기야. 정말 역겨운 놈들이지.”
그는 다른 헌터들이 앞과 뒤에서 일렬로 늘어서 자리를 지키며 이동하는 동안, 바츠 곁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이동 중에는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욕설은 달랐다. 그것은 그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일이었다.
“짜증나는군! 그 미치광이 놈들 때문에 얼마나 더 수고를 해야 하는 거지? 네미! 이 기회에 완전히 말려 죽여 버리자고!”
그는 레나타보다도 작았다. 키는 물론이고 체격 자체도 조그마했다. 레나타 뒤로 가서 숨는다면 완전히 감춰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뱉는 말들은 패토스 정도의 거구라도 된 것처럼 거칠기 이를 데 없었다. 말 한마디에 욕설이 몇 번씩 흘러나왔다. 정도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자신의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서 그 수위가 결정될 뿐이었다. 때때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의 거친 욕설도 있었다. 대부분 불평불만과 함께였다.
“진즉에 했어야 하는 일이었어. 아니야? 시발, 내 말이 맞잖아? 그딴 놈들을 왜 지금까지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던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젠장! 그건 정말 염병할 짓이었다고! 지상에 있는 놈들도 마찬가지야. 왜 그 놈들의 거짓말에 자꾸 속아 넘어가는 거지? 놈들은 온통 거짓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어. 아르크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는 하지. 그런 멍청한 소리에 넘어가는 놈들은 모조리 쓸어버려야 해!”
바츠는 그를 상대할 때면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마치 상한 음식을 삼키는 기분이었다. 그의 비관적인 언행들은 자꾸만 속을 메스껍게 만들며 탈이 나도록 자극하는 것 같았다. 물론 바츠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다른 헌터들은 이쪽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 역시 다른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바츠 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바츠는 불편한 마음을 애써 짓누르며 견뎌야만 했다. 그는 마치 질병 같았다. 거친 욕설로 자신을 포장하면, 거대하게 보이도록 만들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질병. 바츠의 눈에는 그저 키가 작은 헌터일 뿐이었다.
“이, 이쪽은 매우, 매우 나, 낯선...낯선 곳이다. 나, 난 부, 북쪽을...북쪽을 다닌 것이 저, 전부다.”
또 다른 헌터는 약간의 불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감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시때때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했다. 뭉친 근육을 푸는 것처럼 느리고 부드러운 움직임이 아닌,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목을 비틀어 꺾어버리는 것만큼 강도가 셌다. 나중에는 그가 정말 목이 부러져 죽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을 정도였다. 고약한 버릇이었다. 그가 말을 더듬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패토스만큼 말하는 것이 서툴러 보였다. 입을 여는 첫마디에 꼭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했는데, 그 때문인지 발음이 몹시 부정확했다.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히도 의사소통에는 무리가 없었다.
“여태까지 집사가 직접 헌터들을 이끌고 전면에 나선 것이 몇 번이나 되지? 정말 흔치 않은 경우 같은데, 아르크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꽤 오래전부터 아이기스에 대한 방침은 조심스럽게 유지되어 왔잖아. 놈들이 1월1일을 노리고 약탈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대응보다는 소극적으로 대처하고는 했던 것처럼 말이야. 아무리 놈들이 산개해 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번처럼 특정 거점을 공격하기 위해 나섰던 적은 없었지. 혹시 방침에 변화라도 있는 건가?”
마지막 남은 헌터는 평범했다. 일반적인 헌터들처럼 목소리는 무거웠고 늘 진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대신 호기심이 매우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다른 헌터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것과는 다르게, 의문으로서 뭔가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날카로운 질문으로 바츠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은 동시에 그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요인이기도 했다. 바츠는 그가 곤혹스러우면서도 편안한, 묘한 감정을 느꼈다. 레나타만큼이나 편했다. 오히려 자신이 먼저 말을 붙이며 대화를 나눠도 될 것 같을 정도로 믿음이 갔다. 레나타에게 대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적극적으로 대답을 할 수 있는 이유였다. 꼭 이전에 강일을 보는 것만 같았다. 옆에서 보이는 행동만으로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한 요구를 하고는 했다. 다른 헌터들도 이미 한차례씩 말을 꺼낸 이야기였지만, 그는 조금 다르게 그 요구를 집요하게 생각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가능한가?”
바츠는 그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해야만 했다.
“미안하지만 내 대답은 변함이 없어. 당신의 성욕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해. 또 다시 말하지만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야. 그건 당신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지.”
“실망스럽군. 이전 집사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지.”
바츠는 고개를 내두르며 그를 외면해 버렸다. 자신은 오브러시의 집사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따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 둘 모두 어색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그가 소속을 물어온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 고민도 되었다. 하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애매한 상황을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레나타를 본 것만으로도, 바츠의 입지를 몇 번이나 의심했을 터였다. 그는 그저 기회가 날 때마다 똑같은 요구를 반복해서 확인할 뿐이었다. 나중에 더 이상 그 문제를 꺼내지 않았을 때에는, 그와 약간의 거리감을 느껴야만 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의 대화가 많이 줄었다. 덕분에 바츠는 조금의 불안을 안고 이동해야만 했다. 작은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였다.
바츠는 며칠을 쉬지 않고 강행하며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연속된 숙영 대신 근처 마을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학교를 떠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헌터들에게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마을이 카를로프카라는 곳이었다. 낡은 합판들과 녹슨 철조망으로 1미터 높이의 울타리를 세워 경계를 표시한 곳이었는데, 20여명의 주민들이 건물 3채에 모여살고 있는 매우 작은 마을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바츠와 일행을 긴장된 얼굴로 경계했지만, 바츠가 홀로 다가가 정중하게 부탁을 하고나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촌장으로 보이는 노인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겁에 질린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가 크게 기뻐하며 요란을 떨어 분위기를 바꿨다. 마치 대단한 행운이라도 마주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룻밤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값까지 넉넉하게 쳐주신다고 하니 황송할 따름이군요. 그저 머물다 가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입니다!”
그는 얼굴 가득 검버섯이 피고 머리카락 전체가 얇고 하얗게 변했지만, 풍채만큼은 젊은 사람이라고 느껴질 만큼 단단했다. 어깨도 넓었고, 등도 전혀 굽지 않았다. 장로 로리나보다도 나이가 많아보였지만 굉장히 건강해 보였다. 무척이나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눈길을 끈 것은 따로 있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면서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주민 모두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바츠를 환대해주는 노인이 유일한 남성이었다.
“워낙 척박하지 않습니까? 남자들의 피가 평화를 만들죠.”
노인이 바츠의 시선을 읽더니 흐뭇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매우 만족스러움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바츠는 뒤로 한걸음씩 물러나 자신과 일행들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인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의 미소가 무척이나 음흉하게 보였다. 여인들의 불안한 시선이 자신들의 등장 때문인지 아니면 노인의 미소 때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노인이 발 빠르게 한마디 더 거들지 않았다면, 걷던 걸음을 멈춰야 했을지도 몰랐다. 노인이 서운함이 담긴 실소를 짧게 내뱉고는 말했다.
“여자들은 항상 두려워하죠. 새로운 것에 대해서 무서워하고 경계합니다. 바보 같은 것들이죠. 하지만 그것이 특유의 인자함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 인자함을 모성애라고 부르죠. 여자들은 그 모성애가 발동되면, 누구보다도 사납게 변하지만 누구보다도 어리석게 되기도 한답니다.”
바츠는 여인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더 이상 그녀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노인의 안내만 따랐다. 그의 말을 이해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말을 끝내며 내비친 시선에 번뜩이는 경계심이 주의를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틀림없었다. 그는 눈으로 여인들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 경고가 섬뜩하면서도 불쾌했다. 하지만 이곳은 그와 이들의 마을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굳이 소란을 만들지 않았다. 자신과 일행은 정당한 값을 치르고 하룻밤을 편히 쉰 뒤, 다음날 조용히 떠나면 그만이었다. 지나친 관심으로 이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바츠와 일행이 이곳에 머물게 된 것 자체였다. 바츠는 그것을 깨닫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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