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빛과 빚 -- > * 249화 *
바츠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자 주위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한 걸 느낄 수 있었다. 숨을 거둔 것처럼 싸늘하던 공기가 경직된 긴장감을 토해냈고, 그녀의 머리칼을 헤집던 세찬 바람은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무게감을 더했다. 심지어 중앙 건물 꼭대기에 둥근 불빛은 느닷없이 혼자서 요동치며 불안감을 조성했는데, 입구로 새어나오던 조명 빛이 어느 틈에 모습을 감추자, 울타리 너머 어둠이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불빛이 그 위로 그림자를 일렁이며 청각이 정전된 것 같은 침묵을 남겼다.
“돌아가자.”
바츠는 레나타와 함께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전부 위태로운 경고가 되어 날아들고 있었다. 목을 조르는 듯한 압박감이 일었다.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쳐온 어둠을 따라 그것들이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뭔가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헌터들은 그때까지도 작은 마을을 버릇처럼 헤매는 데 바빴다.
“둘은 건너편 건물로 갔어.”
바츠가 텅 빈 방안을 허탈하게 들여다보자, 뒤에서 레나타가 말했다. 그녀는 적어도 둘의 행적은 알고 있는 듯 했다. 밖을 향해 앞서 걸음을 옮겼다. 바츠는 그 뒤를 바짝 쫓았다. 그리고는 안마당으로 빠져나왔을 때, 그녀를 기다리게 하고 혼자서 맞은편 건물로 다가갔다. 그들을 데려오는 데 두 사람이 갈 필요는 없었다. 건물 안이 복잡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맞은편 건물에서 막 빠져나오는 검은 실루엣이 먼저였다. 그 실루엣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바츠를 발견하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편안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바츠가 순간적으로 놀라며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가 그런 바츠를 향해 해찰하듯 내두르는 걸음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젠장,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이 지랄 같은 기운, 우리를 찾아온 것 맞지?”
바츠는 그의 험한 입정에 놀란 가슴이 단숨에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그의 말투가 거칠고 투박할수록 더욱더 반가웠다. 아까 환영파티에서 보였던 맥이 풀린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방독면까지 막 뒤집어쓰며 복장을 빈틈없이 갖추고 있었다.
“무엇인 것 같아? 염병할 헤러티커는 아니고, 꽤 수가 많아 보이는데.”
“몰라. 하지만 우릴 노리고 있는 것에는 틀림없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나머지는 어디에 있지?”
바츠는 그를 마주보고 서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레나타를 바츠의 어깨너머로 정말 빠르게 훔쳐본 뒤에 대답했다.
“빌어먹을...내가 어떻게 알아.”
그때였다.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 어딘가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말을 마친 것이 마치 비명소리 때문이라고 헷갈릴 만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충격과 공포에 물든 여인의 목소리였다. 바츠는 그 비명소리가 방금 그가 빠져나온 건물 안쪽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의 고개가 느릿하게 뒤를 향해 돌아가고, 레나타의 시선도 그쪽을 향해 움직였다. 바츠는 그와 레나타를 그대로 세워두고 혼자서 건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그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비명을 쫓아 걸음을 서둘렀다. 비명은 바로 보이는 복도를 따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중간에 눈치껏 달렸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머지않아 복도 끝에 위치한 작은 방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반쯤 열린 문틈으로 붉은 빛이 빠져나오고 있는 방이었다. 바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문을 열어야만 했다.
“그래, 그래...그래...”
방안은 검은 그림자와 붉은 얼룩으로 가득했다. 군데군데 세워둔 크고 작은 촛불 때문이었다. 술렁이고 있는 방안의 분위기를 따라, 촛불의 불길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일부 벽과 바닥에 그대로 옮겨 붙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이로 반복되고 있는 정체 모를 속삭임이 있었다.
바츠는 이 모든 것이 착각이라고 느껴질 만큼 눈앞이 아찔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착각이 결코 오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알몸으로 한쪽 구석에 움츠린 채 비명을 지르고 있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불길에 놀란 듯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고, 반대쪽을 응시하고 있는 시선은 동공이 활짝 열려 있었다. 주변에 울려 퍼지고 있는 비명은 그녀의 것이었다.
바츠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검은 짐승이 먹이를 먹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짐승은 이미 숨통이 끊어졌는지 바닥에 너부러진 사냥감을 양손으로 마구 뜯어먹으며 계속해서 뭔가를 입으로 웅얼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들은, 그 정체 모를 속삭임이었다. 그 속삭임 대신 거친 숨소리가 있었다면 방안은 헤러티커의 둥지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코끝이 아릴 정도로 풍기는 쇳가루 냄새가 그랬다. 바츠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코로 가져갔을 만큼 진했다. 틀림없는 피비린내였다. 구석에 몸을 숨긴 여인의 비명과 함께 방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벽과 바닥에 묻은 붉은 불길들은 전부 새빨간 혈흔이었다. 바츠는 그 난장을 피해 짐승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먹이를 먹는데 정신이 팔린 줄 알았던 짐승이 바츠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번뜩이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바츠가 순간적으로 카니지를 뽑아들려고 했을 만큼 위협적인 시선이었다. 짐승이 정말 헤러티커로 보였다. 하지만 바츠는 놀란 가슴을 노련하게 짓누르며 말했다.
“말을 더듬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묘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어.”
바츠의 목소리를 들은 그가 한동안 사나운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뒤늦게 적의를 지워내며 몸을 일으켰다. 턱과 양손을 물들인 붉은 피가 눈에 띄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턱과 양손을 차례로 소매로 훔치고 바지춤에 문질러 닦아내며 물었다.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왜? 우리를 찾아온 손님인가?”
바츠는 대답하기 전에 그의 발음에 먼저 주목했다. 전에 보았던 말을 더듬는 버릇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연기를 했었던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완벽한 발음이었다. 그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움찔거리는 버릇이 너무도 쉽게 그를 증명했다. 그는 바츠가 잠시 들여다보는 그 짧은 찰나를 참지 못하고 세 번이나 고개를 뒤틀며 갸우뚱거렸다.
“과식을 한 것이 아니라면,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해.”
“귀찮게 구는 군.”
바츠의 대답에 그는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몸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비명을 지르고 있던, 구석에 여인에게는 잠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비명소리가 그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바닥에 흥건한 혈흔도 볼 수 없는 사람 같았다. 붉은 혈흔에 자신의 발자국을 아로새기며 자리를 떠났다. 바츠는 그런 그의 뒷모습에서 캄캄한 밤이 묻어나는 것을 보아야 했고, 구석에 여인에게서는 그 밤을 헤매는 절망을 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환영파티에서 그와 함께 자리를 떠났던 또 다른 여인은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어두운 밤을 이기지 못하고 길을 잃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인기척이야. 모두 입구 쪽으로 모여들고 있어. 느껴져?”
안마당으로 돌아오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레나타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말했다. 주위에서 몰려들던 긴장감이 정말 그녀의 말대로 앞쪽에 응집되고 있었다. 들이닥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 사이 입정 사나운 헌터는 두어 발치 떨어진 곳에서 혼자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거친 욕설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의 목소리가 무딘 칼날 두 개를 교차하는 듯 했다. 바츠는 그런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본 뒤에, 남은 헌터의 행방을 레나타에게 물었다.
“그는 어디에 있지?”
“날 찾는 건가?”
대답은 레나타가 아닌 저 뒤쪽에서 들려왔다. 중앙 건물 입구였다. 그가 한쪽 손으로 바지를 추스르고, 남은 다른 손에는 구타를 당한 흔적이 역력한 촌장의 뒷덜미를 잡아끌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뒤로 10여명의 마을 여인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머뭇거리며 따라오는 것도 보였다. 바츠의 시선은 강제로 끌려나오는 촌장의 모습에 고정되었다. 촌장은 구타를 당했기 때문인지 두 다리가 힘없이 비틀거리고 있었는데, 하반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촌장은 어딘가에 바지를 벗어던진 채, 자신의 작고 가느다랗고 볼품없는 다리 셋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그런 촌장을 바츠 앞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를 어디까지 믿나? 우리를 곤란하게 만든 장본인이 이 늙은이라고 내가 말한다면 믿겠나?”
바츠는 그가 양손으로 바지를 제대로 추스르는 것을 지켜본 뒤에 촌장을 내려다보았다. 촌장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가득한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초라한 하반신이 보여 지는 것보다도, 헌터에게 모욕을 당하고 이곳에 던져진 것이 더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초라한 하반신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바츠는 그 이유를 바로 묻지 않고 촌장을 조용히 바라본 뒤에, 중앙 건물 입구에 몰려 있는 여인들과 다른 건물 창문 여기저기에 두 눈만 빠끔 내밀고 있는 다른 여인들까지 전부 살펴본 뒤에 입을 열었다. 어린 아이부터 헌터들을 상대한 나이쯤의 젊은 여인 그리고 그보다 훨씬 나이든 여인까지 전부 다양했다. 몇몇은 눈에 띌 만큼 배가 부른 임산부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긴 내 집이다. 내 집을 빼앗으려는 것이냐? 헌터 네 놈들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놈들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지. 항상 네 놈들은 내 집에서 내 여자들을 탐내지. 내 집을 방문하는 모든 사내들이 그렇지. 이 더러운 놈들. 네 놈들의 악랄한 행패는 잔인하게 돌려받게 되어야 마땅하지.”
촌장은 중간에 부러진 이와 함께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면서까지 항변했다. 이미 수차례 불의를 당한 사람처럼 한이 맺힌 목소리였다. 바츠는 시선을 옮겨 촌장을 끌고 온 헌터를 바라보았다. 그는 방독면을 뒤집어쓰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바츠는 다시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멍청한 소리하지 마. 당신은 그전부터 뭔가 알고 있었잖아.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들, 당신 짓인가? 당신이 저들을 부른 것이냐고 묻는 거야. 대체 저들은 누구지? 왜 우리를 위협하는 거야. 당신의 여자를 우리가 탐냈기 때문인가? 그런 거짓말이라면 하지 마. 여자들을 허락한 건 당신이 먼저였으니까 말이야. 그게 아니라면 설마 우리가 정말로 당신 집을 빼앗으려고 했다고 생각한 거야? 당신이 그 정도로 바보처럼 보이지는 않아. 사실을 말해.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정말 집을 잃게 될지도 몰라. 어쩌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겠지.”
바츠는 촌장에게 최대한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그와 감정적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현재로서 그것은 무의미했다. 대신 촌장이 힘을 실어 말한 것처럼 자신 역시 목소리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촌장이 감정을 격하게 토해내며 주장을 고수한다면 정말 그를 살해하고 마을에 부를 지를 생각이었다. 그러자 촌장이 생각하는지 입을 닫더니, 바츠의 얼굴을 잠시 살핀 뒤에 대답했다.
“...그래, 당신들이 지나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그들에게서 메시지를 받았지.”
“그렇군. 그게 누구지?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낸 게 누구야? 그 메시지는 무슨 내용이 담겨 있었지? 우리가 이곳을 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전부였나?”
“그건 곧 알겠지!”
촌장이 입가에 진한 미소를 걸며 소리쳤다. 그리고 바츠는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헌터들에게 외쳤다.
“흩어져!”
헌터들은 바츠의 목소리를 신호로 지면에 닿은 높은 곳에서 떨어진 물방울처럼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건물의 작은 틈, 가까운 기둥 옆 그리고 빛의 발길이 없는 짙은 어둠으로 몸을 감췄다. 바츠 역시도 방금 나온 건물 입구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울타리 입구를 그대로 관통한 총알들이 안쪽으로 소나기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적어도 수십 수백 발에 이르는 엄청난 양이었다. 아르크에서도 쉽게 소비를 결정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수천 명을 몰살시킬 수도 있었다. 탄약 소리가 밤하늘을 빼곡이 채웠다.
바츠는 그 광경을 한참동안 지켜봐야만 했다. 쉼 없이 날아드는 작은 불꽃들과 어둠 저 멀리 빨려 들어가는 폭발음까지 마을이 통째로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겁이 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그 끝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수 초 길어야 수 분이었다. 어둠은 이 모든 것을 집어 삼켜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윽고 작은 불꽃들이 하나둘 모습을 감췄고, 밤하늘을 수놓던 탄약 소리도 어둠 저편으로 메아리가 되어 사라져 갔다. 바츠는 침착하게 그것들이 떠나가는 것을 끝까지 기다리며, 마당 한가운데에 놓인 가여운 노인이 함께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수백 발의 총알은 실패 없이 언제 어디서든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이곳에서 숨진 목숨은 고작 촌장 그 혼자 만이었다. 촌장은 작은 불꽃에 찢기고 그을린 채 숨을 거뒀다. 총알의 실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츠는 여전히 서두르지 않았다. 자만하지 않고 죽은 촌장처럼 숨을 죽이고 그들이 안으로 들어와 결과를 확인하길 기다렸다. 그들이 부족한 결과물에 당황할 때, 그때를 노려 놀라게 해줄 작정이었다. 그들이 지금쯤 쓰레기더미로 변했을 울타리를 넘어,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침을 삼키는 것보다 두 배는 느린 신중한 걸음이었다. 바츠는 그들의 경계가 당혹스러움으로 바뀌면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약간의 인내심과 그 뒤에 조금의 수고가 필요할 뿐이었다.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약간의 인내심이 모두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였다. 입정이 사나운 헌터. 그가 몸에 두른 어둠을 떨쳐내며, 이제 막 안으로 들어서는 그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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