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빛과 빚 -- > * 251화 *
바츠는 사막을 소외의 땅이라고 배웠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실망스러운 곳. 노력의 가치를 허무로 돌리는 가여운 세상.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비참한 좌절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죽음의 땅이라고 부르며 멀리했다. 식물은 크게 자라지 못하고 아름다움 대신 투박함을 선택했고, 동물은 낮을 피해 밤을 살았으며, 사람들은 머물기보다는 떠나는 것을 선호했다. 척박함의 방증이었다. 사막에 남길 원하는 것은 오직 모래와 죽음뿐이었다. 둘은 사막을 가장 오랫동안 변화가 없는 세상으로 고립시켰다. 모두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는 끔찍한 혹사였다. 태양의 극심한 열기가 모래 위에 모든 생명을 붉게 그을려, 죽음 앞에 마주 세우는 심술을 부렸다. 누구라도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수줍은 태양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회색 하늘 뒤로 몸을 감춘 지 오래인 태양이,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지금은 고작해야 저 먼 곳 북쪽 어디인가에서나 비굴하게 얼굴을 내미는 것이 전부였다. 회색 하늘의 흔한 싸늘함만 눈에 띄었다. 반나절만 머물러도 살이 붉게 달아오르고 물러질 정도의 혹독한 열기로 가득했다는 말이 민망할 만큼 추웠다.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두 배는 더 추운 것 같았다. 밤이 오기라도 하면 눈이 내리던 북쪽의 밤도 우스웠다. 그렇다고 과거와 달리 개방적이 된 것도 아니었다. 모래와 죽음은 이미 뜨거운 햇살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사막은 여전히 그 둘의 고집에 의해서 외면 받는 죽음의 땅이었다. 물론 삶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죽음은 항상 삶 주위를 맴돈다. 사막도 다르지 않았다. 도시였다. 키예프나 민스크 같이 화려하고 거대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구색을 갖추고 있는 문명이었다. 바츠가 사막에 접어든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물이 있다는 뜻이겠지?”
레나타가 물었다. 제법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애니밀로는 수분을 보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목구멍을 직접 타고 내려가는 물의 청량감이 간절했다. 물은 계속되는 지치고 따분한 몸과 마음에 위로가 될 것이 분명했다.
바츠는 고민하지 않고 도시로 향했다. 물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보다는 오랜만에 안락한 잠자리에 몸을 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더 기뻤다. 슈트 안까지 파고든 모래 먼지도 깨끗이 씻어내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바라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레나타의 기대대로 깨끗한 물맛을 보고, 단 하루라도 웅크리고 자지 않을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사실 그마저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막 들어서게 되는 도시가 너무나도 사막을 빼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시는 외견부터 눈길을 끌었다. 건물의 높이는 모두 어른 가슴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쓰인 자재는 과거 건물의 콘크리트나 현재 지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각종 파치나 폐물이 아닌, 흙벽이나 천막 따위가 사용되어있었다. 또한 입구가 덩달아 낮고 좁았는데, 몇몇 사람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면 건물의 낮은 높이가 실질적으로 벽이 낮은 것이 아닌, 땅을 파고 지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민들은 그런 건물들 사이로 난 길가에 무질서하게 앉아있었다. 대략 50여명쯤 되는 사람들로 다른 도시의 주민들에 비해서 훨씬 기운이 없고 힘겨운 모습이었다. 마치 일리트시의 주민 같았다. 독특한 건물의 아래로 향한 입구까지 더해지면 영락없었다. 도시 전체가 좀 더 확장된 일리트시로 보였다. 특히 주민들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생기가 그랬다. 어둡고 푸석한 표정으로 사막을 떠도는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초연했다. 물은커녕 잠자리를 구할 수 있는지조차 의문스럽게 만들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지나는 사람들이 있는지 여관(INN)이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츠는 곧장 그리로 향했다. 길가에 무기력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주민들의 놀라움과 의아함이 공존하는 눈빛이 신경 쓰였지만 돌발 상황은 없었다. 그들 중에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여관에 도착할 때까지 고작해야 서너 사람이 전부였고, 헌터들은 그런 그들의 불안에 젖은 경계심 가득한 시선에 이미 익숙했다.
“물. 가장 깨끗한 물.”
안으로 들어서자 레나타가 방독면을 벗어 제치며 문 앞에 섰던 여급에게 말했다. 다급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조금 화난 사람처럼 흥분이 묻어났다. 바츠는 그런 그녀와 헌터들을 데리고 한쪽 테이블을 차지했다. 자리에는 모두 8명이 앉아도 충분한 원형 테이블이 여섯 개나 있었지만 주인이 있는 것은 고작 한 개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절반을 채우지 못했다. 접대부로 보이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두 사람이 앉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차림새는 떠돌이들로 보였다. 간단한 짐 꾸러미와 상해를 입힐 수 있을 만한 무기가 눈에 띄었다. 그 중 하나는 관리가 잘 된 소총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이쪽을 염탐하듯 몇 번이나 다녀갔다. 결코 호의적인 시선이 아니었다. 하지만 곱지 않은 눈초리는 그들 말고도 이미 충분했다. 안쪽에 보이는 바(Bar)의 종업원을 비롯해서, 여기저기에 기대선 하릴없어 보이는 접대부들까지 다양했다. 밖으로 나가 길가에 앉아있던 주민들까지 합하면 도시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바츠는 그들이 유독 신경 쓰였다. 그들이 가진 소총 때문이었다. 탄약이 있다면 언제든지 이쪽에 치명상을 줄 수 있었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레나타와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작은 눈길로 저쪽을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단 한 사람, 바츠가 신뢰를 느꼈던 그 헌터만은 예외였다. 그가 다른 헌터들처럼 주위가 아닌 바츠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뭔가를 뒤적여 테이블 중앙으로 꺼내놓았다. 상의 한쪽 팔을 잘라낸 듯한 모양의 몰스킨(moleskin) 가죽이었다. 끄트머리에 금실로 수놓인 문장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선택받은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가 말했다.
“노인네가 입고 있던 바지로 만든 것이야. 그 있잖아, 며칠 전에 난리법석을 떨었던 마을의 정신 나간 촌장. 제법 좋은 물건이더군. 네게 필요할 것 같아서 손 좀 봤어.”
그가 턱을 까딱여 뭔가를 향해 눈치를 주었다. 바츠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허리춤에 대충 고정된 프리샤의 카니지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에게 물었다.
“이것도 당신이 새긴 건가?”
“아니, 그건 원래 있던 거야. 뭔지는 나도 몰라. 그냥 남겨두는 게 더 멋스러워서 놔뒀어. 마음에 안 들면 잘라내라고.”
바츠가 금실 자수를 가리키자, 그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내던지듯 대꾸했다. 시큰둥한 태도로 고개를 돌리고는, 시선을 목적 없이 먼 쪽으로 옮겨놓는 걸 보면 매우 성가시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그의 행동에 웃음이 절로 났지만 애써 참아내며 말했다.
“고마워.”
누군가가 관심을 주는 것으로 모자라 신경까지 써준다는 것이, 이토록 기분 좋은 것인지 새삼스럽게 느꼈다. 마치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조용히 다가와 등을 어루만져주는 것만 같았다. 느닷없이 가슴이 따뜻해지고 묘한 환희가 밀려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딘가 불편한지 얼굴에 떨떠름함이 살짝 스쳤다. 바츠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을 좀 둘러보려고. 구경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언제 또 이런 곳에 와 보겠어.”
“회포를 풀 수 있는 여자는 굳이 밖에서 찾지 않아도 돼. 여기에도 충분하니까. 비용은 내가 내도록 하지. 보답으로 말이야.”
바츠는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곧장 눈치 챘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걸며, 테이블 중앙에 놓인 그가 건넨 칼집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가 굳은 얼굴로 심각하게 말했다.
“난 여자 엉덩이라면 딱 질색이거든.”
“...좋아. 대신 밤이 되기 전에 이곳으로 돌아와. 아무런 말썽을 일으키지 말고.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거야.”
바츠는 순간 당황했지만 새롭게 안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러자 그가 섭섭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
“좀 가혹하군. 밤이 된 뒤가 진짜인데 말이야. 날 너무 압박하는 군. 하지만 그러도록 하지. 집사의 지시라면 따라야지.”
레나타가 주문한 물은 그가 자리를 떠나고 난 뒤에 나왔다. 컵 대신 각기 다른 그릇을 반쯤 채운 썩은 물이었다. 그마저도 모래가 잔뜩 떠다녀 입을 전혀 댈 수 없었다. 레나타는 물을 내온 여급이 겁을 먹고 뒤로 주저앉았을 만큼 크게 화를 냈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진정시켰고,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뒤늦게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입니다! 좋은 물은 정말 비쌉니다! 어금니 몇 개로도 힘들죠!”
사내가 여급을 끌어안아 챙기며, 레나타를 향해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레나타의 발목을 붙들고 눈물도 흘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레나타가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테이블 가장자리에 애니밀 두 개를 올렸다.
“이거면 되나? 이거면 두 사람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며칠 동안 굶주림이 무엇인지 잊을 수도 있어.”
“애니밀! 무, 물론입니다!”
사내는 레나타의 눈치를 살피다가 테이블 끄트머리에 놓인 애니밀을 도둑처럼 빠른 손놀림으로 얼른 채갔다. 그리고는 여급과 함께 내온 물을 가지고 안쪽으로 돌아갔는데, 다른 물을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둘은 함께였다. 전보다는 훨씬 투명해진 물이었지만 그 양이 두 모금도 되지 않았다. 레나타가 또 한 번 불만족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왜 이리 적어? 바가지 씌우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여기는 사막이지 않습니까. 원체 물이 귀합니다. 더군다나 몇 달 전부터 그나마 물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어려워 졌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저희도 남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 사내의 애걸하는 듯한 사정에 레나타가 관심 있게 물었다.
“무슨 말이야? 본래대로면 충분히 좋은 물을 양껏 내놓을 수 있다는 말이야? 제대로 말을 해봐.”
레나타의 채근에 그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핀 뒤에 입을 열었다. 레나타를 바라보던 시선이 바츠와 남은 다른 헌터도 한 차례씩 다녀갔다.
“...남쪽에 작은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이 도시에 생명줄이죠. 양은 적지만 아직까지 마른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어느 날부터 아이기스 놈들이 점령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사용료를 받고 있죠. 물론 사용료만 내면, 전처럼 얼마든지 마음껏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지만 그 금액이 터무니없이 비싸고, 겨우 하루라는 시간 제안까지 두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서너 번 다녀올 수 있는 것이 고작이죠. 잠도 자지 않고 온 가족이 하루 종일 노력해도 손해입니다.”
“그래? 알았어, 가 봐.”
레나타가 그의 하소연을 듣고는 시원하게 그를 물리쳤다. 특별한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고, 별다른 미련도 없어 보였다. 그저 평소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오더니, 옆에 선 둘을 향해 귀찮음이 묻어나는 손을 내둘렀을 뿐이었다. 그들의 사정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바츠가 그런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제야 방긋 웃으며 말했다.
“왜? 어쩔 수 없다고 하잖아.”
바츠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그녀가 사뭇 아르크에서 보았던 작은 토끼처럼 귀엽게 보였다.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싶은 충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그녀가 달려든다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안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욕구가 일었다. 하지만 그 욕구는 엉뚱한 사람에 의해 해소되었다. 저쪽 테이블에 소총을 가지고 앉아있던 떠돌이였다. 그가 다가오자, 가까이에 있던 묘한 버릇을 가진 헌터가 빠른 속도로 카니지를 뽑아 그의 턱밑에 가져다댔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그를 향해 경고를 전했다. 그러자 그가 급히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크게 당황했는지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지, 진정하십시오! 당신들과 문제를 일으키려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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