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빛과 빚 -- > * 252화 *
“그럼 뭐야?”
바츠는 자리를 대표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자신에게 칼끝을 겨눈 헌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전 칼맨입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어디로 가는지 물어도 될까요?”
“알아서 뭐하려고?”
레나타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되물었다. 방금 전 미소를 일순간에 감춘 정색한 얼굴이었다. 자신을 칼맨이라고 밝힌 사내의 낯빛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도 모든 걸 물리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턱밑에 닿은 칼끝이 그를 꼭 붙들고 있었고,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안절부절 해야만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도 두 다리로 꼿꼿하게 서있었고, 용케 평정심을 되찾으며 입술을 뗐다.
“저, 저희는 서울로 가는 길입니다. 그 근처까지 함께 가주신다고 약속해주시면 좋은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바츠는 당돌한 제안에 흥미를 느끼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빼냈다. 그리고는 조금 전 그가 떠나온 테이블을 살폈는데, 그곳에서 그의 일행으로 보이는 또 다른 사내가 미동도 없이 이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역시도 테이블 앞에 선 칼맨처럼 완전히 긴장한 얼굴이었다. 눈을 뜨고 기절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양옆에 앉아있는 접대부들의 잔뜩 굳은 표정은 그를 더욱더 불안정하게 보이도록 도왔다. 바츠는 시선을 거두고, 앞에 선 칼맨에게 물었다.
“우리가 왜 그래야만 하지?”
그가 바츠의 시선을 쫓아 자신이 앉아있던 테이블을 곁눈질로 조심스럽게 다녀온 뒤에 대답했다. 여전히 불안감이 묻어나고 있었지만, 가까스로 찾은 평정심을 통해서 차분하게 대답했다. 방금 전 크게 놀랐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될 만큼 침착했다.
“칼맨은 지상을 떠돌죠. 헌터도 지상을 떠돕니다. 칼맨은 지리에 밝고 헌터는 위험에 밝죠. 시간을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칼맨에게는 보다 안전한 시간을, 헌터에게는 보다 효율적인 시간이 주어지게 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재미있군.”
바츠는 그의 제안을 듣고 나자 이전에 만났던 강일이 떠올랐다. 그가 지금도 무사한지 그리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갔는지 문득 궁금했다. 고작 같은 칼맨이라는 이유만으로 눈앞에 선 사내에게 강일의 행적을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가 강일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리에 있는 모두에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약속...약속해주시겠습니까?”
“좀 더 이야기해봐.”
바츠는 눈치를 통해 칼맨의 턱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니지를 치우도록 지시했다. 헌터는 순순히 지시에 따랐고, 칼맨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금방 신이 난 모습으로 자신감을 되찾더니 테이블로 밀착하다시피 다가왔는데, 마치 어딘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상체를 안쪽 중앙으로 쭉 집어넣는 자세를 취했다. 그가 만족감이 드러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이 도시의 이름이 토르소인 이유를 아십니까?”
레나타와 다른 헌터의 고개가 동시에 바츠를 향했다. 뭔가를 기대하기보다는 대답을 궁금해 하는 얼굴이었다. 바츠는 그런 둘을 번갈아 살폈다. 둘 다 칼맨이 한 질문에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칼맨은 그 짧은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기민한 눈동자가 갈퀴처럼 주위를 오가며, 재빨리 그 소리 없는 대답들을 낚아채갔다. 그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들을까 신중한 모습이었다. 중간에 아무런 상관없이 두어 번이나 주변을 살폈다.
“전 여러분이 이곳을 처음 방문하신 것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우리가 서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느꼈죠. 분명 이쪽 지리가 낯설 겁니다. 이곳을 아는 헌터라면 차분하게 지날 리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 여럿이 오신 것 자체만으로도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하죠...어쨌든! 전 이곳이 토르소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려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저희와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이 먼저겠지만 말입니다.”
그의 태도는 마치 강일과 함께 하던 사미르를 연상케 만들었다. 특유의 자신만만한 행동으로 과장을 좋아하고 허풍도 서슴지 않던 그였다. 특별히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부 본인의 이득을 취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행동들이었기 때문에 딱히 신뢰를 하지 않았었다. 바츠는 그때 사미르와의 모종에 거래는 순전히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눈앞의 칼맨의 의도는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말을 마치고 살며시 반응을 살피는 눈초리에, 기회를 엿보는 얄팍한 술수가 담긴 것 같았다. 굳이 무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크게 달랐다. 누군가의 도움에 마땅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당장이라면 사미르와의 동행도 거절할 수 있었다. 물론 칼맨과의 동행은 여러모로 득이 되는 것이 많았다. 적어도 길을 잃고 헤맬 일이 없었고, 그만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건 곧 고생을 덜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지금의 칼맨은 운이 좋게도 목적지까지 같았다. 기회만 된다면 서울에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결과가 예상됐다. 다만 고작 약간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 미심쩍은 거래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를 믿기 어려웠다.
“잠깐이었지만 흥미로웠어. 정말이야. 내 관심을 끄는데 제법 성공적이었어. 하지만 거기까지야. 그만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해. 안타깝게도 매력적일만큼의 실속이 전혀 없군. 정작 보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 우리의 관계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당신은 우리와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야. 그것부터 배우고 오라고.”
바츠의 냉정한 대답에 그의 얼굴 한쪽이 일그러졌다. 콧등에 주름이 생길만큼 강한 인상이었지만,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서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다시 그의 인상을 볼 수는 없었지만, 또 한 번 인상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는 말투였다.
“곤란에 처하게 되어서, 후회하게 될 겁니다.”
“말조심해.”
바츠가 불쾌함이 담긴 목소리를 내뱉자, 옆에 있던 레나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츠의 손이 그녀의 궁둥이에 닿지 않았다면, 칼맨의 목은 벌써 테이블 위로 떨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노기 담긴 시선이 칼맨의 낯짝으로 총알처럼 날아가 꽂혔다. 묘한 버릇을 가지고 있던 헌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레나타의 시선에 놀라 뒷걸음질 치는 칼맨를 싸늘한 눈으로 쫓았다. 반쯤 감긴 듯 눈꺼풀이 내려온 작은 틈으로, 그의 멍한 듯 생기 없는 눈빛이 칼맨의 목을 졸랐다. 거뒀던 카니지를 다시 휘두른 것이나 다름이 없을 만큼 날이 단단히 서 있었다.
칼맨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도 못하고, 부리나케 달아나야만 했다. 자리로 돌아가 허겁지겁 짐을 챙기고는 일행과 함께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 앞에서 흔들리는 눈동자로 돌아보는 그들의 시선에 후회와 아쉬움이 동시에 묻어났다.
바츠는 그 모습을 무신경하게 지켜보았다. 지상에서 숱하게 봐온 모습이었다. 위험을 직접 확인해야만 깨닫는 사람들. 그들의 한심한 무모함이 이제는 더 이상 답답하지 않았다. 온몸에 묻은 모래 먼지와 같았다. 그냥 씻어내기만 하면 되는, 약간의 찝찝함 일뿐이었다.
바츠는 그 찝찝함을 편안 수면으로 풀어냈다. 씻을 수 있는 물은 구할 수 없었다. 이곳은 지금까지 다녀본 곳 중에 가장 메마른 곳이었다. 마실 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대신 완전히 긴장감을 내려놓은 단잠을 취했다. 여관의 방은 모래 바람의 칼칼함을 막는데 부족함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헌터가 둘이나 함께 하고 있었다. 둘의 감각을 믿고 정말 오랜만에 마음을 내려놓았다. 근심 없는 잠자리였다.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은, 도시를 둘러보겠다며 자리를 떠난 그 헌터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특별히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도시는 길을 잃을 만큼 크고 복잡하지 않았고, 그는 충분히 믿음직했기 때문이었다. 그라면 내일 아침 출발하기 전까지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자정을 지날 무렵인지, 깊은 새벽이 드리웠을 때인지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숙면 중에도 느낄 수 있을 만한 어수선한 분위기가 몸을 흔들어 깨웠다. 눈이 절로 떠지며 위험을 감지했다.
“아무래도 우리 재수 없는 곳에 온 것 같아.”
몸을 일으키자 어느새 먼저 일어나 있던 레나타가 문 앞에 달라붙어 귀를 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굳은 얼굴이 구석에 놓인 촛불로 검붉게 젖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가 작게 내뱉은 목소리가 매우 어둡게 느껴졌다. 묘한 버릇을 가진 헌터도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반대쪽 구석, 자신의 자리에서 진중한 얼굴로 밖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얼굴로 바깥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넣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바츠는 레나타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무슨 말이야?”
“토르소. 이제야 기억났어. 아마도 여기가 그곳이었나 봐.”
“계속 혼자만 알고 있을 거야?”
바츠는 여전히 문에 귀를 댄 채 혼잣말을 하듯 읊조리는 그녀에게 답답함 대신 서운함을 담아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빙그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예전에 헌터들의 시신을 가지면 행운이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어. 정확히는 팔이나 다리지. 아마도 그곳이 이곳인가 봐.”
“재미있는 이야기네. 그러니까 지금 이곳 주민들이 우리의 팔과 다리를 잘라가기 위해, 밖에 몰려들었다는 거야?”
“응! 특히 이걸 가지고 싶어 할 거야. 통째로 말이야.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그래.”
레나타가 대답과 함께 자신의 왼쪽 팔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손목에 채워진 아르크 눈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아르크 눈이 전원이 꺼진 채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아르크 눈보다, 그녀의 얼굴에 더욱더 관심이 갔다. 팔을 들어 올린 그녀의 얼굴이 곤경에 처했다기보다는 흥미로운 일을 앞둔 어린 아이처럼 기대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상황이 꽤나 즐거운지 눈동자까지 반짝이고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며 심각함을 느꼈던 것이 민망할 지경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 그럼 확인해보자고.”
레나타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을 열고 얼른 복도로 나갔다.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든지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내딛는 걸음이 설렘으로 가득했다. 바츠는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묘한 버릇을 가진 그도 조용히 따랐다. 복도는 어두웠지만 앞을 확인하는데 무리가 없었고, 물을 마셨던 홀은 텅 빈 채 적막만 흘렀다.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사막의 거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면, 이 주변에 남은 것은 낯선 고요뿐이었다.
“자, 그럼 나간다.”
레나타가 입구 앞에서 방독면을 뒤집어쓰며 돌아보았다. 얼굴을 보지 못해도 잔뜩 흥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통해, 그녀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화려한 몸놀림으로 카니지를 휘두르고 있었다.
“나왔다! 놈들이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적어도 30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몰려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상대를 해칠 수 있을 만한 무기를 하나씩 든 채 바츠와 일행을 반겨주었는데, 제대로 연마가 되지 않아 무딘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정확히는 무기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의 고철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옳았다. 녹슬고 구부러진 철근, 부러진 나무막대, 깨진 유리조각, 오늘 저녁에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냄비(pot) 그리고 채찍을 흉내 낸 가죽 벨트까지 전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중간 중간 작은 총기류가 눈에 띄기는 했지만 탄약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다들 방아쇠 쪽 손잡이가 아닌, 총구를 쥔 채 거꾸로 들고 있었다. 위협이 되려면 적어도 지금보다 세 배는 많은 인원이 있어야만 했다.
레나타가 그들을 향해 나무라듯 외쳤다. 분노나 짜증보다는 즐거움에 흠뻑 젖은 목소리였다.
“우리를 불에 태워 죽이기라도 할 셈이야?”
“팔과 다리를 내놔! 그럼 얌전히 보내줄 테니 말이야!”
레나타의 외침에 그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높이는데다가 심한 모래 바람까지 불고 있기 때문인지, 그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는 소음처럼 들려 뜻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로 들렸다. 어둠 속에서 움직임을 쫓는 것처럼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레나타의 대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대신 말했다. 그녀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제정신이야? 팔과 다리를 주고가면 우리 그 자리에서 죽고 말거라고! 미친 소리는 그만 하고, 다들 돌아가서 잠이나 자! 당신들은 지금 이 모래 폭풍이 보이지 않아? 폐에 먼지가 쌓이면 기침을 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이곳에서 모래 폭풍에 파묻혀 죽는 것보다, 목이 말라 죽는 것이 더 빠르다는 걸 네 놈들은 모르겠지! 당장 그 팔! 그 팔을 내놔! 그것만 있으면 오아시스를 점령한 놈들에게 이 거대한 모래 폭풍이 전부 몰려가, 놈들을 파묻어 버릴 테니까!”
그들의 이어지는 반발에 레나타가 고개만 돌려 바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런 상황이 정말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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