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빛과 빚 -- > * 253화 *
바츠는 그녀가 이들을 전부 살해하게 될 것이라는 걸 쉽게 직감할 수 있었다. 귓속을 파고드는 그녀의 흥에 겨운 목소리에 살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녀는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로 보였다.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옮기는 그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있는 카니지로 올려졌다. 며칠 전 난동을 이곳에서 또 한 번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때보다 훨씬 즐거운 난동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바츠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말려 세우지도 않았고, 이들이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도록 경고를 전하지도 않았다. 싫증이 난 것처럼 무기력하고 귀찮게만 느껴져,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관심하다는 말이 딱 옳았다. 지금 당장 방으로 돌아가 다시 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눈앞에 있는 이들에 대한 연민보다 훨씬 강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뒤에 섰던 묘한 버릇을 가진 헌터가 슬쩍 앞으로 나서는 모습이 반갑기까지 했다. 레나타와 그의 칼부림이라면, 삽시간에 10여명의 사상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럼 상황은 바로 진정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주변을 휘몰아치던 모래폭풍은 그 기대를 산산이 조각내 버렸다. 모래바람이 날카로운 폭발음을 실어 나르며, 자리에 모인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었다. 그였다. 낮에 자신을 칼맨이라고 밝혔던 사내.
그가 뒤쪽에서부터 허공에 대고 연거푸 실탄을 발사하며, 자신의 동료와 함께 바츠 쪽을 향해 다가왔다. 주민들은 놀란 마음에 좌우로 길을 비켜나주었고, 그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바츠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레나타의 카니지가 지체 없이 튀어나가, 그의 코앞에 겨눠졌다. 그가 레나타의 눈치를 살피며, 위를 향한 총구를 천천히 아래로 내리고 말했다.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곤란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요.”
바츠는 레나타의 얼굴을 지나, 자신을 향해 시선을 옮겨오는 그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뒤집어 쓴 방독면 때문에 표정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렌즈를 통해 비쳐지는 그의 두 눈으로 진심을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비록 탐욕이 묻어나고 있었지만 해코지를 하기 위한 불손한 감정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바츠는 그에게 말했다.
“용기가 가상하군.”
“총알이 이제 없어요. 이제 당신들이 우리를 도울 차례입니다. 당신들은 방금 나에게 빚을 졌으니까요.”
“그리고 영악하군. 우리에게 강제로 빚을 만들려는 수작인가? 정말 애쓰는 군.”
바츠는 절로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러자 그가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간절하게 말했다.
“설마 모른 척하지는 않겠죠? 당신들에게 분명 도움이 되었다고요.”
바츠는 그의 억지스런 주장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했지만, 그의 능글맞은 태도에 알 수 없는 흡족한 마음이 들어 불쾌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눈앞에 이들을 물리쳐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수고가 추가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와 함께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몰려든 주민들을 물리친 사람은 정작 따로 있었다.
레나타가 바츠의 눈빛을 통해 신호를 받고 막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었다. 또 다시 뒤쪽에서부터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방금 전처럼 사람들이 좌우로 비켜나며 이번에도 역시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그 사이를 통해 검은 그림자 하나가 뚜벅뚜벅 걸어왔는데, 상태가 매우 양호한 방독면과 시커먼 망토를 두르고 있는 건장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를 단 번에 알아보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헌터, 바로 그였다. 그가 이제야 바츠의 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뒤늦게 돌아오는 그의 모습이 태연하다 못해 냉정하게 보일만큼 차가웠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무뚝뚝한 모습에 공포심을 느끼고 겁을 집어먹은 것이었다. 마치 망토 위로 검푸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그의 기세가 매서웠다. 하지만 바츠가 시선을 고정한 곳은 그런 그의 이질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그의 바로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는, 곱상하게 생긴 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이제 겨우 15, 16쯤 되어보였는데,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헌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겁에 질린 이유가 헌터를 보았기 때문이 아닌 이곳에 흐르는 숨 막히는 긴장감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그 소년과 함께 돌아온 헌터가 바츠 곁에 가까이 다가와 서며 물었다.
“밤도 깊었고, 날도 사나운데 밖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바츠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움직여 몰려든 주민들을 향해 눈치를 주었고, 그는 시큰둥하게 뒤를 돌아본 뒤에 다시 바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녀석을 도와줘야 할 것 같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즐거움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거든. 아까 말했잖아. 비용을 대신 지불해주겠다고. 벌써 그 약속을 잊은 거야?”
바츠는 그를 떠나보내기 직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 대가가 골칫거리로 돌아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핑계로 거부하고 싶었지만, 그의 뒤에 숨어서 애절하게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에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년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뭔가를 강력하게 갈구하고 있었다. 그 절박함이 낯설지 않았다.
“좋아. 난 약속은 반드시 지켜. 대신 그럴 듯한 사정이 반드시 있어야 할 거야. 물론 그 전에 이곳의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하겠지.”
바츠는 또 한 번 그에게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광폭한 주민들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주민들은 광기를 한풀 누그러뜨린 상태였지만, 여전히 기회를 노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가 좀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시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돌려 주민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고, 주민들은 그가 갑자기 다가오기 시작하자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그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두 걸음씩 물러났다. 덕분에 가장 뒷줄에서 미처 앞의 상황을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과 엉겨 붙으며 작은 소란이 생겨났다. 아직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크고 작은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그들을 향해 다가간 헌터가 그 불규칙적인 소란을 일순간에 잠재워 버렸다. 그가 가까이에 있던 한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채는 데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여인을 거칠게 끌어당겨 조금 되돌아왔는데, 중간쯤에 멈춰서며 주민들을 향해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외쳤다.
“우린 지금 이곳을 떠날 것이다! 우리가 네 놈들에게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네 놈들은 그냥 조용히 각자의 잠자리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우리를 쫓는 것도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대가는 이렇게 치르게 될 거야!”
그의 주먹이 여인의 안면을 가격했다. 여인은 큰 충격을 받고 다리가 풀릴 정도로 휘청거렸지만,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다. 그의 손에 움켜진 머리채가 여인의 몸뚱이를 노련하게 제어했다. 여인은 코가 부러지며 안면이 피로 물들었지만, 고통에 신음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그런 여인의 얼굴에 연거푸 주먹을 날렸다. 여인이 본능적으로 양손을 이용해 얼굴을 감싸 쥐는 행위마저도 무용지물이었다. 그의 냉정한 주먹은 여인의 손등 위도 사정없이 가격했고, 여인은 처참하게 부서져 가는 자신의 얼굴을 지키지 못한 채, 발 앞으로 붉은 핏덩이와 치아를 한 움큼씩 수차례 쏟아내야만 했다. 심지어 최소한의 저항이던,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는 행위마저도 금방 포기해야만 했다. 그가 머리채를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여인은 이미 모래바닥 위로 초라하게 버려진 썩은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그녀의 몸은 힘없이 축 늘어지며 바닥에 무릎을 대고 서는 것이 고작이었고, 주체를 잃고 일자로 세워진 목과 탈골된 것처럼 쳐진 양 어깨 그리고 꼿꼿하게 펴진 척추가 그런 그녀의 암담한 상태를 대신해서 표현할 뿐이었다.
그가 여인을 무심하게 놓아주며 주민들을 향해 물었다. 굵직한 힘이 실려 있었지만, 모래폭풍을 뚫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한 목소리였다.
“다음은 누구야?”
주민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거센 바람 때문에 그의 마지막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작았다. 주민들은 멍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고민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주민들의 반응을 굳이 기다리지 않았다. 차갑게 몸을 돌려 다시 바츠에게로 돌아와 말했다.
“이제 됐지? 설마 이곳에 계속 머물 생각은 아니었잖아? 우린 이 꼬맹이의 집으로 갈 거라고.”
바츠는 이번만큼은 헛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뭔가 가슴이 후련할 만큼 흐뭇하면서도, 너무 황당해서 어이가 없기도 한 묘한 감정에 휘말리며 허탈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허전함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실없는 웃음을 흘려내게 만들었다. 그가 곧이어 못마땅한 시선으로 한쪽을 바라보며 다시 묻지 않았다면, 그 감정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 한참을 고심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가 한편에 섰던 칼맨들을 향해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저것들은 뭐야?”
“또 다른 빚쟁이.”
바츠의 대답에 그가 콧방귀로 대응하고는 언제나처럼 냉정하게 관심을 끊어버렸다. 더 이상 칼맨들을 향한 궁금증은 전혀 없었다. 칼맨들의 존재는 단지 잠깐 신경 쓰이는 낯설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바츠에게 고개를 갸웃하는 것으로 방향을 가리키고는 소년과 함께 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바츠는 조용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던 레나타와 남은 다른 헌터 그리고 칼맨들과 함께 그의 뒤를 쫓았다. 주민들은 바츠와 일행이 앞을 지날 때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놀람을 표하며 뒤로 물러나기만 할 뿐, 공격적인 모습은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경고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비록 강한 미련이 남은 눈빛을 보내오기는 했지만, 도시를 떠나는 데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조금 전 광적으로 달려들려고 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었다. 뒤늦게 행선지를 묻는 바츠의 물음에 소년과 함께 앞서 걷던 그가 소년의 집으로 갈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한밤중의 사막은 그야말로 어둠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방향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곳과 다르게 사방이 전부 똑같이 보였다. 눈에 띄는 어스름한 실루엣조차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가끔 옷깃을 파고들면 따끔할 정도로 불어 닥치는 강한 모래폭풍까지 말썽이었다. 그런데도 소년과 그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헌터들의 아르크 눈이 조그마한 위안이 되어주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발끝을 확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둘은 망설임이 없었다. 정확히는 소년의 자신감이라고 해야 했다. 그는 그저 소년을 믿고 옆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바츠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어둠 속의 프레이처럼 번뜩이는 두 눈으로 돌아보며 대답했다.
“헌터들은 어둠 속에서 눈이 아닌 감각으로 앞을 본다고 하죠? 사막에 사는 사람들도 어둠 속에서 앞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태피스트러라고 부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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