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54화 (254/268)

< --   15. 빛과 빚   -- >         * 254화 *

아르크 눈의 조명에 비쳐진 소년의 얼굴이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모래폭풍이 민낯을 할퀴고 가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지 이를 드러내고 웃었을 정도였다. 금방 침을 뱉고 옷깃을 여미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부심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바츠에게서 쉽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소년의 눈가에 행복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 분명했다. 뒤를 바라보다가 모래 더미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바츠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소년을 데려온 헌터가 옆에서 머리를 가볍게 툭 치며 주의를 주기 않았다면, 소년의 고개는 다시 앞으로 향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의 핀잔어린 손찌검이 소년의 눈썹 끝을 끌어내리며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바츠는 소년을 달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크게 호기심을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궁금한 것처럼 일부로 이것저것 따져 물으며 소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자 소년이 금방 낯빛을 회복하며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앞보다는 뒤를 보며 걷는 빈도가 잦아지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술술 털어놓았다. 칼칼한 모래폭풍 속에서도 소년의 감격스런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소년은 도시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작은 집에 살고 있다고 했다. 본래는 떠돌이였는데, 우연히 도시를 발견하고 정착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상을 떠도는 것보다 물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도시의 출입이나 편의 시설을 이용하는 것과는 별개로, 주민들이 주거를 허락하지 않아 도시 안에는 머물 수가 없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했다. 도시를 드나들 수 있게 된 것도 처음에는 주민들의 반발로 어려웠지만, 누이가 주민들을 설득하면서 가능해진 일이라고 했다.

“네게 누이가 있다고?”

“네! 정말 예뻐요! 토르소 주민들 모두가 누나에게 반했을 정도라고요! 인기가 엄청 많았어요!”

“그래? 인기가 많은 것이 아니라, 많았었다고?”

바츠는 소년의 목소리에서 의아함을 느끼고 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생기 넘치던 이전의 모습과 전혀 다른, 슬픈 눈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네...지금은 아파서 많이 변했어요...그래도 정말 예쁘고 착한 누나에요!”

소년이 고개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 나란히 걷던 헌터가 다시 한 번 손으로 가볍게 머리를 치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신경질적으로 노려보고는 더욱더 자신의 누이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헌터의 차가운 시선과 검은 망토가 전혀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헌터의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무덤덤한 목소리가 소년의 화난 얼굴로 쏟아졌다.

“크루엘라에 감염된 것 아니야?”

“아니에요! 크루엘라는 절대 아니에요! 그럼 저도 이미 헤러티커가 되었겠죠! 하지만 멀쩡하잖아요! 전 아프지 않다고요!”

“그럼 뭐야? 어떤 병에 걸렸으니 변한 것 아니야.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바츠는 소년이 자신의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헌터를 향해 달려들기 전에 얼른 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시선은 바츠나 정면이 아닌, 자신과 나란히 걷던 그 헌터의 무릎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어느 날부터 먹어도 살이 빠지기 시작했어요. 물론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그래도 굶주리지는 않았는데, 어느 날부터 이상했죠. 맞아요! 어느 날부터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고, 자주 씻기 시작하면서 그랬어요. 자꾸만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나중에는 모래로 온 몸을 문질러서 피가 날 정도였다고요.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 그때부터 마구 신경질을 부리고, 때리고...바로 사과하고 쓰다듬어주고...전혀 모르겠어요...”

“먹을 건 어디서 구했지? 이런 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도시에서요. 누나가 도시에서 청소를 해주고 먹을 걸 얻어오고는 했어요. 누나는 항상 그랬죠. 날 위해서 늘 힘들게 일했어요. 그래도 여기는 좋은 곳이에요. 다른 곳에서는 열심히 일해도 아무것도 못 얻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적어도 이곳에서는 조금이라도 뭔가를 얻을 수 있었죠. 지상은 먹을 것도, 물도 부족하잖아요. 여기에서는 최소한  먹을 것이 부족해도 물은 부족하지 않았어요. 아이기스 놈들이 오아시스를 점령하기 전까지요. 맞아요! 틀림없어요! 누나가 변한 건 그들 때문이에요! 그들 때문에 물을 먹기 힘들어지면서 변했던 것 같아요! 분명해요! 도시의 주민들이 어려워지니까 누나가 얻을 수 있는 물도 적어졌을 테고, 그래서 누나는 화가 나기 시작한 거예요! 분명해요!”

소년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소년의 독특한 눈동자가 아르크 눈의 조명을 그대로 반사하며 마치 불꽃처럼 빛났다. 바츠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소년이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을 그냥 가만히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몰랐다. 괜히 어색함만 초대했다. 물론 소년의 보챔은 없었다. 잠깐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기는 했지만, 이내 고개를 앞쪽으로 돌리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모래폭풍에 날려 보냈다. 바츠는 그런 소년의 모습에서 짙은 상실감을 느껴야만 했다. 미안함을 느껴야 할 정도로 무거운 실망감이었다. 그 때문인지 소년은 더 이상 떠들지 않았다.

“여기에요. 이곳이 저희 집이에요.”

소년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울타리가 있는 작은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푸르스름하게 날이 밝아올 쯤에 도착한 소년의 집이 모래폭풍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에서 본 독특한 모양이 아닌, 지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널빤지를 사용해 지은 집이었다. 너무 오래 되어서 군데군데 균열로 틈이 벌어지고 부러진 곳도 있었지만, 모래폭풍이나 비바람을 견디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약간의 불편이 있을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누나가 아프니까 최대한 조용해주세요.”

소년이 문 앞에서 바츠와 일행들에게 당부했다. 자칫 아까의 소심한 복수처럼 비쳐지는 약간 퉁명스런 말투였지만, 분명 누이를 향한 걱정으로 비롯된 행동이었다. 칼맨은 몰라도 바츠와 헌터들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집 안은 밖에서 볼 수 있었던 것만큼 초라했다. 몇몇 쓸 만한 가구와 집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텅 비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협소하고 지저분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 한가운데에 소년과 함께 돌아왔던 헌터가 우뚝 서며 말했다.

“자, 그럼 바로 가자고. 아직 놈들은 자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난 사정을 들어보기로 했지, 돕기로 한 기억은 없는데?”

바츠는 그에게 최대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빤히 바라보며 무신경한 시선을 보내왔고, 그 사이 다른 헌터들은 태연한 모습으로 근처에 엉덩이를 대고 자리에 앉았다. 칼맨 둘만 묘한 분위기에 바츠 등과 문 사이에 멀뚱히 선 채 곤혹스러워 했다.

“약속했잖아요.”

소년이 안쪽으로 보이는 낡은 방문 앞에 서서, 그의 뒤통수에 대고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가 고개만 돌려 소년을 한차례 돌아보았고, 이내 다시 바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했다는데?”

바츠는 웃음이 절로 났다. 그의 행동이 마땅한 핑계를 찾지 못해 그저 떼를 쓰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뻔뻔한 꼬마 아이를 보는 듯 했다. 바츠에게 그 어떤 설득력도 느끼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좀 더 그럴 듯한 명분을 찾아야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답을 찾은 것은 소년이었다. 소년이 그를 대신해서 말했다.

“누나를 구해주세요. 물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지 오래에요. 물을 마시게 되면 분명 낫게 될 거예요. 엉덩이를 보여주면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거라고 했잖아요. 제가 원하는 건 그거에요. 도시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누나가 다시 예전처럼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이랑 누나가 그 물을 마시고 병이 낫길 바라는 것이요.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제발 누나라도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미 엉덩이는 보셨잖아요. 도시 사람들이 다시 우리를 받아줄 수 있게 만들어주세요.”

바츠는 간절하게 말하는 소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소년의 눈이 이제는 아르크의 조명 대신 눈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큰 골칫거리를 만들어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현재 상황을 조금도 골칫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그저 정당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하는 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를 허탈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러자 그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고, 소년은 기쁨에 겨운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허둥대기 시작했다. 한눈에도 외출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넌 여기서 기다려. 놈들을 처리하는 건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바츠의 지적에 소년이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제자리에서 굳어졌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지,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뒤늦게 돌아보는 소년의 얼굴에 억울함이 묻어났다.

“하지만...하지만! 저도 뭔가를 하고 싶어요!”

“이미 충분히 했어.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은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는 거야.”

바츠가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말하자, 그가 옆에서 거들었다. 바츠가 아닌 소년의 편에 선 목소리였다.

“누나를 위해 뭔가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냥 데려가는 건 어때? 녀석이 이곳에서 살아가는데 좋은 경험과 동기가 될 것 같은데. 이 녀석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거라고.”

바츠는 그의 참견이 기분 나쁘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이 성급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고마움으로 느꼈다. 불현듯 케일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마 자신이었더라도 소년과 같은 선택을 하고, 같은 고집을 부리게 될 것 같았다. 만약 거부당한다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매우 섭섭하고 서운한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고, 누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자기 스스로를 원망하게 될지도 몰랐다. 소년에게 자신이 느꼈던 그때의 좌절감을 건넬 수 없었다.

“좋아. 대신 네 누이에게 허락을 구해.”

소년이 외마디 환호성과 함께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얼마나 기뻐하는 지 알 수 있었다. 소년은 급히 낡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자리에 앉았던 헌터들은 레나타부터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바츠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며 괜히 뿌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출입문 앞에 서 있던 칼맨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각각 들어 보이면 말했다.

“우리도 돕겠습니다. 옳은 일이라면 함께 해야죠.”

바츠는 여전히 그들의 도움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서 소년을 보살필 사람은 필요할 것 같아서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년의 불안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나, 난 또 다시 밖으로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이해하지? 누나가 날 지켜줬던 것처럼 이제 내가 누나를 지켜줄 거야. 하지만 너무 무서워. 밖은 너무도 캄캄하거든.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아. 새카만 어둠뿐이야.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내가 헌터들을 데려고 왔다고. 사람들이 절대 가까이 하지 말라던 그리고 무조건 피해 달아나라고 말하던 그 헌터들 말이야. 무려 넷이나 된다고. 내가 말했지? 사람들이 틀려. 헌터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그들이 우리를 도와주겠대. 게다가 난 밤을 볼 수 있잖아. 누나, 기도해줘. 내가 저들과 함께 물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줘. 그리고 다시 누나가 건강해지면 불쌍한 사람들을 돕자고 했던 그 약속,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길 기도해줘. 기억하지? 자유도시로 가게 되면 그곳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로 했잖아. 우리가 꼭 그 맹세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어.”

레나타가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저 녀석이 뭐라고 하는 거지? 내가 잘못 들은 거야? 저 녀석이 지금 말한 게 누나(didi)인거야 아니면 엑소시스트의 자매(sister)인 거야?”

대답은 바츠가 아닌, 소년을 데리고 왔던 헌터가 대신했다.

“엉덩이는 엉덩이일 뿐이야. 어차피 다 똑같더라고.”

바츠는 뒤늦게 몸을 돌려 레나타를 찾아보았다. 헌터들 사이에 늘 이어져 온 데면데면함에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그녀가 방독면을 뒤집어쓰기 전에 입술을 삐죽하기는 했지만, 어렵지 않게 그의 말을 수긍하며 아무런 불행도 불러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에는 그 어떤 신경전도 보이지 않았다. 바츠는 안도감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며, 아무 일 없이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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