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55화 (255/268)

< --   15. 빛과 빚   -- >         * 255화 *

도시의 오아시스는 소년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모래폭풍을 타고 조금 걷자, 천천히 날이 밝아오던 어스름한 분위기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동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한겻정도 걸은 것 같았다. 무심한 먼동의 소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건물 몇 채를 모래폭풍 속에 스산한 실루엣으로 그려냈다. 흙으로 벽을 세우고 양철지붕을 올린 간이 건물들이었다. 규모도 한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는데, 온전한 것 없이 반쯤 훼손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사막의 모진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으로 보였다.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불어 닥치는 비바람을 잠시 피하는 용도로나 적합했다. 흐릿한 불빛과 주변에 엄폐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1미터 높이의 바리케이드가 군데군데 눈에 띄지 않았다면 도무지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근처의 폐기물과 모래를 담은 마대로 쌓아올린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바리케이드였다. 그곳을 200여 미터 앞두고 바츠와 일행들을 이곳까지 끌고 온 헌터가 자신 있게 말했다. 꽤 흥미를 느끼고 있는 눈치였다.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접근해서, 놈들의 꿈속에 죽음을 던져주자고.”

바츠는 그의 말에 심히 공감하면서도 한편에서 밀려드는 우려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저곳에 놈들이 얼마나 있는지 알지 못 하는데다가, 그들의 무장 정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소년이 10여명 쯤 되는 무리이고 소총 몇 자루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정보였다. 하지만 그를 포함한 헌터들은 별달리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헌터들은 오로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횟수의 살인을 하게 될지에 대한 기대만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전에 마을에서 한명을 잃었던 기억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바츠는 그때의 결과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그곳까지 100여 미터가 남았을 때였다.

“여기서 다들 기다려. 내가 먼저 둘러보고 오겠어. 난 당신들을 믿지만, 확실한 것을 좋아하니까 말이야.”

“...우리를 여전히 믿지 못한다는 말이군.”

바츠와 무리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헌터인 그가 무덤덤한 말투로 대꾸했다. 특별한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바츠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 정도의 꺼림칙함을 전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가장 뒤에서 따라오던 칼맨들이 급히 동조하지 않았다면, 순간적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칼맨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상을 누빈다고들 하지만, 무턱대고 목숨을 건 모험을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누군가가 저쪽 사정을 정확히 확인할 수만 있다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아쉬움 없는 결과를 말이죠.”

그들은 동시에 쏟아지는 헌터들의 차가운 시선에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바츠에게는 분명 힘이 되는 일이었다. 바츠는 밀려들던 어색한 분위기를 그들 덕분에 생긴 균열로 밀어 넣었다. 조금 더 강단 있는 목소리로 그를 향해 힘 있게 말했다.

“난 당신에게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야. 그렇게 하겠다고 알린 것뿐이라고.”

그가 뒤쪽에 선 칼맨에게서 시선을 거둬 다시 바츠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집사, 네 마음대로 하라고.”

바츠는 한발 물러난 그를 뒤로하고 홀로 오아시스를 향해 나아갔다. 유난히 발목을 잡아끄는 모래 덫이 힘에 부치게 만들었지만, 서서히 잦아드는 모래폭풍으로 위안을 얻었다. 모래폭풍이 서서히 다가오는 여명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바츠가 오아시스에 도착했을 때에는 끝나가는 진눈깨비의 향연처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안쪽 상황을 둘러보는 데 불편함을 덜 수 있었다. 안에는 12명의 남녀가 각각의 간이 건물에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몸을 뉘고 있었다. 대부분 꼭 엉겨 붙어 아직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두어 명이 중앙에 위치한 우물 근처에서 불을 지피고 둘러 앉아있었다. 간밤에 지난 모래폭풍을 견디느라 매우 지친 모습이었다. 미동도 없이 앉은 자세 위로 가득 쌓인 모래가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무기는 이들이 가진 총기 서너 자루를 제외하고는 크게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바츠는 기다리는 일행들에게로 돌아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그들의 꿈속에 죽음을 던져주자고 말했던 그의 계획을 실행했다.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근접한 후, 일거에 제압할 작정이었다. 총기를 든 그들만 무리 없이 제압된다면 나머지를 처리하는 건 너무도 손쉬운 일로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바츠가 무리와 함께 오아시스에 다시 접근했을 때였다. 모래폭풍이 사라진 새벽녘의 사막은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의 호숫가보다도 조용했고, 조용히 피어나는 적막은 바츠와 일행들의 숨소리를 주변으로 실어 나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였다. 묘한 버릇을 가진 헌터. 그의 고개를 갸웃거리는 행동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만들며, 불가에 앉아있던 그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양쪽의 시선이 중간에서 부딪치며, 시간이 정지한 듯한 당황스러움이 흘렀다. 놀란 그들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제대로 소리를 지르지 못했을 정도였다. 헌터들이 급히 몸을 놀려, 튀어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입에서 위험을 알리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헌터다!”

오아시스에 내린 적막이 일순간에 긴박함으로 피어났다. 그들의 소총이 부리나케 불꽃을 뿜어대기 시작했고, 헌터들의 날랜 움직임이 폭약소리에 맞춰 현란한 춤을 추었다. 바닥을 빠르게 기고 장애물을 민첩하게 뛰어넘는 모습이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헤러티커와 다름없었다. 막 잠에서 깨어나는 놈들의 남은 일행들이 화들짝 놀라며 허둥대는 소란은 덤이었다.

바츠는 헌터들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놈들을 제압하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놈들을 찾아 카니지를 휘둘렀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머릿속을 울리는 심장박동 소리에 호흡이 가뿐 것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잠들어 있던 놈들 중에 단 한명이라도 총기를 더 가지고 있었더라면, 지난 번 마을에서의 결과를 또 한 번 재현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리 둘러본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바츠가 그 안도감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아시스 안쪽으로 뛰어들지 않고 바깥쪽에서 기다리던 칼맨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바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소년이었다. 놈들이 황망한 난사에 소년이 피탄 되었던 것이다. 소년의 가슴 정중앙에는 이미 커다란 붉은 얼룩이 자리했고, 입에서는 검붉은 혈흔이 쉴 새 없이 토해지고 있었다. 칼맨의 부축이 없었다면 차가운 모래 늪에 초라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소년이 바츠를 알아보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부탁드려요...누나를...누나를 자유도시로 데려다 주세요...그곳에서 살 수 있도록...”

바츠는 소년의 부탁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소년의 숨결이 아침 햇살에 증발하는 것이 훨씬 빨랐기 때문이었다. 연기처럼 희뿌옇게 허공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차마 잡을 틈도 없었다. 소년의 목이 칼맨의 품안에서 한쪽으로 푹 가라앉았다. 몸을 움찔하게 만드는 뭔가 뜨끔한 것이 심장을 스치고 지나는 것이 느껴졌다. 뜨겁고 무거운 콧김이 절로 나왔다. 방독면을 빠져나가며 입을 대신한 탄식을 만들었다. 그런 바츠에게 어느새 뒤로 다가온 레나타가 물었다.

“어떻게 하지? 이 녀석 누나가 기다리고 있을 것 아냐.”

“들어줄 수 없어. 자유도시는 우리가 가야하는 방향과 너무 달라. 녀석의 누나에게 물이나 가져다주고 가자.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그 이상은 안 돼. 물은 어때?”

바츠는 밀려드는 씁쓸함을 애써 삼키며 냉정하게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우물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 섰던 헌터 둘이 막 우물에서 물을 길어 냄새를 맡고, 손등, 팔뚝, 입술 순으로 신선도를 확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 오게 만든 그 헌터가 대답했다.

“깨끗해. 충분히 마실 수 있겠어.”

바츠는 그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에게서는 그 어떤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그에게는 소년의 죽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헌터들의 이런 모습에 속이 울렁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는 것이 힘에 겹다고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바츠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 더 있었다. 레나타가 뒤늦게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자유도시라는 곳이 있어?”

바츠는 그녀의 한쪽 어깨에 손을 올려 다독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모른 척 외면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얼른 물을 담아 소년의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을 뿐이었다. 헌터들에게 동정심을 바라는 것은 무리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씁쓸함이 오아시스에서부터 소년의 집까지 따라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오히려 바츠를 추월해서 먼저 도착한 씁쓸함이 소년의 누나가 있는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레나타가 가장 먼저 발견했다.

“에, 우리가 오아시스에 다녀온 시간이 5년 정도가 걸린 것은 아니지?”

레나타가 방안을 확인하고는 바츠에게 물었다. 바츠는 문턱에서 돌아보는 그녀에 이어 안쪽을 살폈다. 그러자 방안 중앙에 목재로 만들어진 흔들의자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 위에 작은 담요로 가려진 헐벗은 여인이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레나타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부패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목을 뒤로 넘긴 채 굳어진 모습이 아주 오랫동안 방치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여인의 벌어진 입안에 썩은 음식물이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레나타가 오아시스에서 가져온 물을 들어 보이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지?”

바츠는 그 물을 받아 이미 숨을 거둔 여인의 입안에 전부 쏟아주었다. 그리고는 방문을 잘 닫아주었고, 소년의 당부를 떠올리며 밖으로 향하는 걸음을 신중하게 옮겨 조용히 집을 떠났다. 밖은 다시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모래가 방독면에 와서 부딪히면 원망어린 질책을 받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마치 미사에서 마티프가 코앞에다 대고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았다. 사막을 완전히 벗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그 기분을 떨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밤을 다섯 번이나 더 보내고 난 뒤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서울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칼맨이 지친 목소리를 쥐어짜듯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막을 벗어난 뒤에도 크고 작은 피로가 계속 되었기 때문이었다. 헌터가 아닌 그들로서는 충분히 힘겨워 할만 했다. 노상강도들이 떠돌이를 살해하거나 그들의 거처를 습격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그들은 떠돌이들의 손가락이나 손톱을 산채로 자르고 뽑아가고는 했다. 간혹 바츠와 일행을 발견하고는 지레 겁을 집어먹고 하던 일을 멈춘 채 달아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자신들의 일을 마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중간에 지난 두 개의 도시에서는 그 어떤 곳보다도 치아가 부족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도 있었고, 예전 작은 머리처럼 조직적으로 사람들을 사냥하는 약탈자들의 마을을 만나볼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바츠를 포함한 넷이나 되는 헌터 무리였기 때문에 봉변을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때마다 칼맨들은 매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츠와 헌터들이 자신들을 위해 싸워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토르소 마을의 주민들처럼 헌터들의 신체를 노리고 달려드는 광신도들을 다시 만난 적이 있었는데, 바츠와 헌터들이 그들을 학살하는 동안 엉뚱하게 타깃이 되어 헌터들을 대신해서 신체를 잃을 뻔한 일도 있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긴장감을 내려놓지 못하는 듯 했다.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굳이 바츠와 헌터들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그들은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고, 칼맨들은 그들을 일행이라고 소개했다. 서로 다른 길을 통해 이곳에서 만나 서울로 가기로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츠는 칼맨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 떠돌이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총기 대신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고 낡은 헝겊 망토로 몸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 어디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차림새였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중 리더로 보이는 한 명에게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몹시 신경 쓰였다. 그는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지상에 사는 사람치고 너무나도 허술하게 보였다. 게다가 그가 처음 마주할 때 내뱉은 목소리는 왠지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반겼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정말 굼뜨군요. 기다린다는 건 너무 힘든 일입니다.”

바츠에게는 낯설지 않은 말투였다. 숱한 야인들이 내뱉던 무례한 말투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항상 비아냥거리길 좋아했다. 하지만 눈앞에 선 그와는 조금 달랐다. 그는 야인들과 다르게 바츠는 물론이고 헌터들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물론 모두가 헌터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칼맨이나 엑소시스트 같은 경우는 오히려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계하고 조심하는 시선을 보내는 것만큼은 늘 공통된 반응이었다. 그에게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경계심 대신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괜히 찜찜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찜찜한 기분의 정체는 서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에야 알 수 있었다. 칼맨이 멀리 보이는 도시를 서울이라고 말했을 때였다. 레나타가 도시 위로 피어오르는 십여 개가 넘는 검은 연기를 보며 말했다.

“밥을 짓는 연기가 아니야. 너무 검어.”

그녀가 걸음을 멈춰 서며 카니지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다른 두 헌터도 차례로 검을 뽑았다. 바츠는 헌터들의 갑작스런 반응에 놀랐지만, 칼맨과 그들의 일행은 그보다 훨씬 크게 놀라며 경직되었다. 레나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분 나빠. 이대로 놈들을 보내면 우리의 존재를 놈들에게 알릴 거야.”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 연기들은 우리와 상관이 없어요! 우린 당신들과 함께 왔잖아요!”

칼맨 중 하나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얼마나 억울한지 순간적으로 레나타의 바짓가랑이를 향해 달려들 것 같은 자세를 취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레나타와 헌터들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 칼맨과 그들의 일행을 살해하기로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런 레나타와 헌터들 앞을 가로 막았다.

“기다려. 이 녀석들은 그냥 칼맨일 뿐이야. 난 이들이 도시에 우리의 등장을 알리지 않는다는 맹세만 한다면 무사히 보내줄 거야.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말이야.”

“집사, 이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를 헛고생 시키는 일이라고. 칼맨들을 모르는 것이냐? 놈들은 돈이 된다면 모든지 한다. 우리를 팔아넘기는 조건으로 두둑하게 챙길 수 있다면 아이기스가 아니라 헤러티커하고도 거래를 할 녀석들이라고. 게다가 놈들은 칼맨이라고 했지만 가진 짐이 형편없어. 칼맨 중에 이렇게 짐이 없는 녀석들은 처음 본다고. 차라리 세상을 기웃거리기 좋아하는 칼리에라고 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오아시스에서 소년을 데리고 왔던 헌터가 레나타를 대신해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확신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확신을 고개를 가로저어 물리쳤다.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야. 모두 여기서 기다려. 이들을 보낸 뒤에 내가 직접 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오도록 할 테니까 말이야.”

바츠가 근처에 작은 굴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가 싱거운 눈빛으로 그곳을 살핀 뒤에 말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위해서 말인가?”

“그래. 우린 목적을 달성하고 모두 안전하게 돌아가게 될 거야. 모두 다 말이야.”

레나타와 헌터들은 더 이상 반발하지 않았다. 바츠의 단호한 목소리에 결국 검을 거뒀다. 그리고 칼맨들을 서울로 보냈고, 지시대로 굴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기껏해야 3미터 길이의 굴이었는데, 반대쪽으로 작은 출구가 하나 더 있는 굴이었다. 바츠는 헌터들이 그곳에서 대기하는 동안, 홀로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칼맨들이 먼저 도시로 간지 두어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절반쯤 다가갔을 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리 떠났던 칼맨들을 만났다. 그들 중 리더로 보였던, 내내 바츠의 신경에 거슬리던 그가 반겨주었다.

“역시 오셨군요. 이미 우리의 정체를 눈치 채셨던 것이죠?”

“물론이지. 우리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지?”

바츠의 물음에 그가 장난기가 묻어나는 손길로 망토 한켠을 걷어내며 말했다.

“키예프 시티. 그곳에서 극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죠. 아르크의 집사 바츠. 당신이 야인들에게 쩔쩔매고 있을 때 말입니다.”

바츠는 들춰진 망토 안으로 그의 허벅지에 그려진 붉은 새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그러자 그가 조롱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까 놀랐습니다. 역시 헌터들은 무섭더군요. 그들의 직관력은 정말 대답합니다. 난 솔직히 그 자리에서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말이죠.”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오아시스에서 우리가 아이기스 당신들 패거리를 살해하는 동안 가만히 있었던 이유나 말하라고.”

바츠는 뒤쪽에 서 있는, 자신을 칼맨이라고 소개했던 사내를 한차례 노려보았다. 그러자 앞에 선 사내가 함께 그를 돌아보고는 다시 바츠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우리도 아이기스 전체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워낙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서로를 못 알아보기도 하죠. 무엇보다도 칼리에와 그들은 엄연히 달라요. 우린 그들의 폭력적인 행위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을 당신들이나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그들의 범죄에까지 관대하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통제가 되지 않는 그들로 인해서 골치를 썩고 있죠. 너무 모순적인가요?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우리와 이렇게 있는 것과 같은 이유니까요. 우리에게 바라는 게 있죠?”

바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또 한 번 조롱 섞인 콧방귀를 터뜨리며 말했다.

“가시죠. 블러드 케찰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려. 난 동의한 적이 없어.”

바츠가 딱딱하게 말하자, 그가 참기 힘든 웃음을 가까스로 삼켜내며 말했다. 검지만 편 손을 까딱이며 가리키는 모습이 몹시 불쾌하게 만들면 성질을 자극했다.

“블러드 케찰이 예상한대로군요. 그는 당신이 망설이게 될 것이라고 했죠. 그리고 그 이유가 당신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증오하고, 우리를 살해하러 왔는데,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자신에게서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죠. 내가 그런 당신에게 합당한 명분을 주도록 하지요.”

그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자리에 서며 말했다.

“블러드 케찰이 전하라고 했습니다. 옛 우정을 생각해 달라고 말이죠.”

바츠는 그래도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저들을 만나고 싶었다. 블러드 케찰, 오랜 친구, 붉은 머리 이롤로 그를 너무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그의 방독면을 헤집고 나오는 실실거리는 비웃음에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나 블러드 케찰의 예상대로군요. 당신이 계속해서 망설이면 이 말도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결코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죠.”

바츠는 방독면 렌즈로 빛나는 그의 시선을 보자 절로 마른 침이 삼켜졌다. 목덜미에 칼날이 스친 것처럼 아찔한 기분이었다. 그가 말했다.

“‘내게 진 빚이 있잖아. 그것을 갚아라.’ 라고 말이죠.”

바츠는 불현 듯 머릿속이 깨끗하게 환기가 되며 오직 딱 한 단어만 떠올랐다. 눈앞에 그보다 훨씬 짙은 웃음을 절로 터뜨릴 수밖에 없는 기가 막힌 단어였다. 사과 쥬스. 이롤로가 그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기쁘면서도 놀라웠다. 바츠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와 했던 약속.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걸음을 옮겨야 했다. 검은 연기가 치솟는 서울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화부터 마지막 챕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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