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56화 (256/268)

< --   16. 새로운 감염   -- >         * 256화 *

도시는 지금까지 지나온 곳들 중 가장 특별했다. 스톡홀름 시티의 거대한 방벽과 키예프 시티의 높은 빌딩 그리고 아르크 레벨1 거주지까지 곳곳의 특색들이 한 데 모여 공존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조금씩 떼어다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도 컵에 담긴 물처럼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넓은 수면 위에 자리한 도시의 위치가 눈길을 끌었는데, 뭍에서부터 이어진 수백 미터에 이르는 낡고 좁은 철교가 아니었더라면, 외부로부터 접근이 완전히 차단된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츠는 그 다리를 통해서 도시로 안내를 받았다. 긴 시간동안 끊임없이 유지보수를 해온 흔적을 통해, 꽤 오랫동안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넓적하거나 길고 두껍거나 중간 중간 구멍이 뚫리기도 한, 크기나 길이는 물론이고 모양새까지 전부 제각각인, 수천 개의 이름 모를 철조물들을 굵은 철사로 얼기설기 고정해 만들어진 불안정한 다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속적인 유지보수에도 불구하고 눈에 띌 만큼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된 부식과 길이에 비해 턱 없이 좁은 폭은 파도처럼 일렁이는 수면 위의 물결을 고스란히 전하고는 했는데, 그것들을 느낄 때마다 무사히 건널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나고는 했다. 반쯤 건넜을 때에는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하고 어지러움을 동반한 약간의 두통을 느껴야할 정도였다. 비록 보잘 것 없었지만 가는 철사를 엮어 만든 난간이 없었더라면 물에 빠지는 사람이 숱하게 기록되었을 것만 같았다. 꼭 세상 전체가 끊임없이 꿈틀대는 기분이었다.

“이곳이 아르크 같았다면 고생을 조금은 덜 수 있었을 겁니다.”

가장 앞에서 걷던 그가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바츠를 살폈다. 낡고 부실해 매우 불편한 다리를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앞쪽으로 보이는 도시의 거대한 방벽 위를 빠르게 다녀오는 것으로, 그 위에서 어슬렁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서너 명의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소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쪽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주시하고 있었다. 틈틈이 시선을 교환하며 경계심을 내비치는 모습에 또 다른 불안감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만 진정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때처럼 말이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안심시키기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말끝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웃음이 따라왔다. 즐거움이라기보다는 뭔가 우스꽝스러운 일에 대한 빈정거림이었다. 아마도 오래 전 키예프 시티에서 처음 만났던 그 날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곳에서 이들과 일전을 벌였던 기억이 있었다. 사상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코 우스운 일도 아니었다. 그날 많은 사람들이 헤러티커에게 살해당했고, 자신 역시도 목숨을 잃을 뻔 했었다. 그리고 그 역시도 안전한 위치는 아니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때의 과거가 재미난 모양이었다. 고개만 돌려 흘깃 훔쳐보는 그의 눈매가 방독면 렌즈를 장난스럽게 넘어오고 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별다른 해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가 방벽을 잇는 거대한 문을 지나기 위해서, 그 앞에 무장을 하고 섰던 또 다른 사람들에게 수신호를 보내는 데 더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바츠를 발견하고는 당황한 듯 자신의 무기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의 귀찮은 듯 싱겁게 내둘러진 간단한 손짓이 아니었더라면 이미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방벽을 통과하자마자 능글맞은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꽤 정신이 없죠? 골치 아플 만큼 복잡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건 블러드 케찰에게 직접 들으시죠.”

바츠는 그를 따라 방벽을 지났다. 그러자 개활지 같은 널찍한 공간에 들어설 수 있었고, 정면으로 방벽 넘어서부터 볼 수 있었던 높게 치솟은 빌딩의 전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키예프 시티에서 보았던 빌딩들을 나란히 세워 이어 붙여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조금 특이하게도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기틀을 잡아 만든 것이 아닌 아르크 레벨1 거주지에서 볼 수 있는 녹슨 양철 건물을 블록처럼 쌓아올린 모습이었는데, 창도 거의 없어 중간 중간 안쪽으로 이어진 통로가 없었다면 지상에 버려진 바위산에 양철을 둘러놓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불에 타 검게 그을리거나 여기저기 무너져 내린 흔적들이었다. 마치 약탈자들의 습격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건물은 물론이고 도시 곳곳에 폭발로 인한 흔적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 오래된 상흔들이 아닌지 주민들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바쁘게 오가며 부산을 떨고 있었는데, 방금 전 그가 말한 골치 아플 만큼 복잡한 일들로 기인한 것 같았다. 주민들이 하나같이 지치고 겁에 질린 얼굴로 잔해를 치우거나 어른 키만 한 불길을 잡기 위해 두꺼운 가죽을 후려치듯 내두르는 등 이곳저곳에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도시 밖에서 보았던 검은 연기의 원인이었다.

“이곳입니다.”

바츠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부산스러운 모습을 지나, 바위산 같은 건물을 관통하는 통로 중 하나를 따라 안쪽으로 제법 들어왔을 때였다. 넒은 광장이 나타났고 50여개의 폭이 10m에 달하는 계단 앞에 서게 되었는데, 그 끝에 붉은 케찰이 크게 그려진 청동문을 볼 수 있었다. 그의 걸음이 계단을 오르기 직전에 멈췄다. 바츠가 이곳까지 이어져 있는 골치 아플 만큼 복잡한 일로 인한 흔적과 광장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정체불명의 물체 위에 덮인 가죽천에게서 쉽게 눈길을 돌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했다. 지금까지 봐온 웃음이 많고 나부대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쓸쓸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죠.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그 누구라도 말이죠.”

바츠는 그가 마지막에 잔뜩 힘을 줘 말한 부분을 되뇌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지만, 시선만큼은 여전히 계단 아래에 두었는데, 도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어수선함에 차마 눈길을 거두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변함없이 다급해 보이는 주민들과 곳곳에 새겨진 크고 작은 탄흔과 그을음 그리고 지워내려고 애를 썼지만 미처 숨길 수 없었던 때 지난 혈흔까지 눈에 들어오며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었다. 특히 광장 구석에 나란히 놓인 가죽천에서부터 날아오는, 코끝을 쏘는 자극적이면서도 텁텁한 물비린내와 같은 냄새에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그가 불현 듯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분명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청동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과의 어색한 조우가 없었더라면, 그 우울한 기분에 오랫동안 젖어있었을지도 몰랐다. 경호원들이 도시 입구에서 마주쳤던 그들과 똑같이, 쉽게 행동을 결정짓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가 안심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동시에 손바닥을 내보이는 한쪽 손을 까닥이는 모습에 겨우 진정하는 것까지도 같았다. 다른 것이라면 그들처럼 소총 같은 화기로 무장한 것이 아닌, 비록 정교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날카로움을 가진 검을 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츠는 그들의 신체에서 붉은색 케찰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곳은 칼리에가 편성된 이후에 줄곧 붉은 케찰을 사사받은 자들만 써온 건물입니다. 저쪽으로는 자체적인 훈련장이 있고, 저쪽에는 병영이 있습니다. 블러드 케찰은 보다 위층에 있죠. 이제 다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새 기분을 전환한 그가 바쁘게 입을 놀렸다. 자부심과 자신감이 동시에 묻어나고 있는 목소리였다. 방독면을 벗으며 맞은편 복도 끄트머리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 또 다시 웃음꽃이 활짝 핀 것을 볼 수 있었다. 꽤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의 뒤를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묵묵히 따랐다. 이제는 정말 이롤로와의 만남이 가까웠다는 생각에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가 복도 끝에 있는 계단을 올라 어느 방 앞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건물을 소개하고 칼리에의 위용을 자랑하는 등 계속 말을 걸어왔지만 전부 건성으로 들으며 흘려버려야만 했다. 오직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감추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기대와 두려움이 자꾸만 몸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이롤로는 정말 가까운 곳에 있었다. 스톡홀름 시티에서 보았던 닥터의 방보다 세 배는 넓은 방이었다. 이롤로는 그곳에서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게으른 녀석.”

그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는 방 한쪽에 마련된 작은 사무공간의 책상 앞에 앉아있었는데,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키도 훨씬 자라있었고, 얼굴도 많이 변해있었다. 하지만 어릴 적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알아보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한 눈에 이롤로 그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특유의 붉은 머리칼이 확답을 주고 있었다. 바츠는 그를 위해 방독면을 벗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넌 항상 그랬지. 늘 늦었어. 생각이 많기 때문이야. 그것 때문에 재능을 전부 발휘하지 못하고는 했지.”

바츠가 다가가자 이롤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가볍게 턱을 위로 끄덕여 바츠를 제외한 나머지를 밖으로 내보냈고, 둘 사이의 거리가 1미터 쯤 되었을 때 걸음을 멈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얼굴에는 흐릿한 미소와 함께 즐거운 기색이 묻어났다.

“이제야 날 만나러 왔다는 건, 내 부탁이 아니라 장로의 지시로 온 것이라는 의미겠지?”

바츠는 그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가우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고, 기쁨에 벅차오르면서도 왠지 모를 낯설음에 특별한 경계심이 만들어진 탓이었다. 아마도 그의 짧게 자른 머리칼과 한쪽 뺨에 큰 상처 그리고 얼굴 곳곳에 모래 알갱이가 빠진 것 같은 작은 흉터들 때문인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바츠는 순간적으로 끌어 오르는 감정에 신음소리를 내뱉을 뻔 했지만, 미리 느꼈던 그 특별한 경계심이 침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기대감에 부풀었던 가슴도 어느덧 사라진지 오래였다. 너무도 편안해서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자 그가 헛웃음을 기분 좋게 내뱉고는 말했다.

“놀라지마. 그런 눈으로 바라볼 것 없어. 너도 이제는 잘 알잖아. 지상은 치열하지. 너무 치열해.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모든 지 해야만 했어. 모든 지 말이야. 그게 비록 부도덕하거나 비양심적인 일이라도 말이야. 사실 지상에서 그런 건 생존 기술이라고 불리는 일상일 뿐이지만 말이야. 난 그냥 삶을 살았을 뿐이야. 그러니까 그런 눈은 저리 치우고 대답해봐. 왜? 내가 반갑지 않은 거야? 아무리 헌터라지만 너무 담담한 거 아니야? 서운한데?”

바츠는 그의 말 속에 장난기가 담긴 것을 느끼면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반응을 해야만 좋을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상으로 나온 뒤 처음으로 벨리타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보다도 흥분됐고, 테라치나 아델리나를 다시 만났을 때보다도 놀라웠다. 하지만 혀와 몸은 이상하게도 말을 듣지 않았다. 달리 노력을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존의 딱딱한 태도를 많이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감정을 뜻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델리나와 나눴던 애정이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다. 어렵게 입을 열고도 내뱉은 말은 고작 한 마디가 전부였다.

“어떻게...”

이롤로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눈의 깜빡임은 사라졌고, 눈동자의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내 양쪽 볼에서부터 시작되는 미세한 경련이 얼굴 전체로 퍼져나가더니 결국 함박웃음을 만들어냈다. 이롤로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즐거워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바츠를 더욱더 당혹스럽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그는 새어나온 눈물을 훔치며,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바츠는 그런 그를 한동안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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