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57화 (257/268)

< --   16. 새로운 감염   -- >         * 257화 *

“우선 앉자. 여유롭지는 않지만 회포를 풀 수 없을 만큼 촉박한 것도 아니잖아?”

이롤로가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는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앞으로 바츠를 이끌었다. 넝쿨처럼 돌돌 말린 형태의 금속 다리에 얇은 나무판자를 상판으로 고정한 형태의 테이블이었는데, 금속은 아직까지도 광택이 흐르는 은빛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반해 상판은 곳곳에 거뭇한 손때로 가득했다. 그런 테이블로 향하는 이롤로의 모습이 제법 여유롭게 비쳐졌다. 고작 몇 걸음만 옮기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 사이 두어 번이나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바츠는 그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았지만, 왠지 모르게 엉덩이가 의자에 붙지 않은 것처럼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내심 그가 계속해서 대화를 이끌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덩달아 입을 닫으며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 느낄 수 있었던 여유가 착각이었던 것처럼, 그가 매우 조심스럽게 굴었다. 막상 기회가 마련되자 부담감에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었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만 볼 뿐,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소가 얼굴에 남아있는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먼저 입술을 뗀 것은 그였다. 그가 슬쩍 말을 붙였다.

“...늦었지만...반갑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잖아.”

바츠의 대답이 생각보다 차가웠는지, 이롤로가 어깨를 살짝 움찔했다.

“아...그랬지, 그랬어...그런데 정말 현실이 되니까...모르겠다.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모를 만큼 이상한 느낌이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아니, 괜찮은 것 같았어...”

이롤로가 말끝을 흐리자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상대를 피하지 않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었지만, 중간에 오가는 대화는 추운 겨울밤을 지새우는 것처럼 힘에 겨웠다. 머쓱한 분위기가 서먹하게 이어졌다. 바츠는 이롤로도 자신만큼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먼저 입을 연 것은 그였다.

“...사실 나, 너를 만났을 때 어떤 모습을 해야 할지 얼마나 연습했는지 몰라. 너를 보고 안아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안녕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잘 지냈냐고 해야만 하는지 무수히도 많은 고민들로 머리가 아팠다고. 정말이야. 난 지금 네가 불편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엄청 애를 쓰고 있어. 내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면 넌 훨씬 더 어려울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나한테 한 말이 고작 게으르다는 거였어?”

바츠의 장난스런 대꾸에 그가 눈치를 살피는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고백을 받은 소녀처럼 턱을 당기고 시선은 거의 치켜뜬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는지 수줍은 긴장감보다는 제법 편안한 분위기를 보였는데, 목소리도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내가 그랬나? 미안. 그러고 보니 난 네가 너무 무뚝뚝하게 굴어서 조금 서운했는데, 내가 먼저 널 섭섭하게 만들었구나. 내가 인사보다도 바보 같은 소리를 먼저 했지?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말한 건 사실이야. 정말 많이 고민했어. 내게 가장 어려운 시험이었다고. 지쳐 쓰러져 포기할 때까지 고민했어. 그런데 웃기게도 진짜 만나니까 그 고민들이 무의미하더라. 멋대로 나온 말들이었어. 그래, 알아. 네 눈에도 내가 냉정하게 보였겠지. 하지만 내 본심은 전혀 아니었어. 눈앞에서 벼락을 본 것처럼 온 몸이 짜릿하고 어지럽고 울렁거리는 그런 기분이었다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지. 그래서 인사보다도 다른 말들이 나온 걸지도 몰라.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난 가슴을 부여잡고 지금까지도 말을 더듬고 있겠지. 물론 아주 잠깐이었겠지만 말이야. 네 모습은 정말 헌터였거든. 넌 정말 헌터다웠어. 흔들림 없이 내게 걸어오는 모습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지. 네가 그 카니지를 휘둘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만큼 말이야. 마지막에 네가 멍한 눈으로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면, 난 정말 고민스러웠을지도 몰라. 어쩌면 너와의 대화를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르지.”

바츠는 이롤로의 진심어린 고백에 심장이 간지럽고 머릿속이 가려운 것을 느꼈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자극이어서 마구 긁어대고 싶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결국에는 벅찬 감동에 미소를 짓게 되는, 그런 스치는 가려움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와 좀 더 쉽게 대화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때마침 그의 옷깃 안쪽으로 보이는 누런빛이 도는 붕대만 아니었더라면, 어릴 적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었다.

바츠는 그 기대를 잠시 미뤄두고는 그의 옷깃 안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그가 바츠의 시선을 읽고는 대수롭지 않게 옷깃을 슬쩍 벌려 붕대를 보여주며 말했다.

“아, 이거? 그 미친 녀석 때문이야. 있잖아, 그 금발에 괴물 같은 녀석. 지금 도시가 이 꼴이 된 것도 다 그 녀석 때문이야. 그 놈이 벌써 아주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히고 있거든.”

“테라치를 말하는 거야? 아르크에서 우리와 어울리던 그 테라치 말이야.”

바츠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가 조금 전 안도하던 분위기를 전부 버리더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침착하다 못해 무덤덤한 모습이었다.

“그래, 그 녀석. 그 녀석 완전히 미쳤더군. 살점을 뜯어 먹지 않는 것이 신기해 보일 정도였어. 우릴 전부 죽이려 하고 있다고.”

“녀석이 지금 여기에 있어?”

바츠의 물음에 이롤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지금은 없어. 대신 수시로 드나들고 있지. 프레이처럼 보호색으로 철저하게 위장을 한 채 말이야. 그리고는 그 뾰족한 이빨로 사람들을 물어뜯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바츠가 갈피를 잡지 못하자, 이롤로가 짧지만 굵은 탄식을 내뱉고는 대답했다.

“말했잖아. 그 놈이 긴 시간동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고 말이야. 놈에게 살해당한 사람만 근래에 벌써 20명이야. 점점 더 그 수가 늘어가고 있지. 맨 처음에는 두어 명을 살해하는 것으로 시작했어. 하지만 지금은 희생된 사람들을 세려면 통곡부터 해야 할 걸? 그 녀석은 완전히 돌았어. 꼭 우리 숨통을 서서히 조여 오는 것처럼 보인다니까? 그걸 즐기는 것 같아.”

바츠는 이롤로의 확신에 찬, 원망어린 목소리에 절로 입술이 달라붙었다. 그가 전진기지를 떠날 때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라는 걸 이미 예감했었지만, 정작 눈과 귀로 확인하게 되자 그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마치 자신이 한 일처럼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아마도 이곳에 오면서 보았던 주민들의 긴박한 모습과 지친 얼굴 때문인 것 같았다. 덕분에 둘 사이에는 또 한 번의 침묵이 밀려들었다. 이번에는 돌처럼 매우 무겁고 강철만큼 단단한 침묵이었다. 이롤로가 용기 내 말을 건네지 않았다면, 영원히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고약한 침묵이었다. 이롤로가 애써 환한 표정을 지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그 녀석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고. 우리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 말고도 해야 할 말들이 많잖아. 진짜 해야 할 말들 말이야. 말해봐. 그녀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했지? 로리나 그 늙은 케찰 말이야. 그 노망난 늙은이가 날 죽이라고 했어? 그리고는? 그리고는 군대를 가져오라고 했어?”

“...그래. 네가 아이기스를 장악하고 군대를 빼앗아갔다고 했어.”

바츠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힘겹게 대답하자, 그가 불쾌한 기색보다는 한심하게 생각하는 듯한 태도로 고개를 내두르고 혀를 찼다.

“그 여자도 미쳤어. 세상은 전부 미쳤지. 난 한참 전부터 네가 이곳에 오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어. 정확히는 와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넌 반드시 훌륭한 헌터가 될 테고, 그 미친 늙은이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거든. 그 늙은 케찰의 역겨운 뻔뻔함은 착한 너를 결코 가만 둘리가 없거든.”

“그래서 그들을 보낸 거였어? 칼리에 말이야. 오래 전에 그들을 보내서 찾아오라는 말을 내게 전했잖아.”

바츠는 당시 그들의 무례함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롤로가 대답했다.

“그래. 이미 너도 알겠지만, 조금 전 너를 이곳으로 안내해준 그가 그때 너를 만났던 그이기도 해. 목소리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걸? 늘 자신감에 차있는 말투를 사용하잖아. 가끔은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말투지. 어쨌든 넌 내 생각대로 헌터가 되었어. 집사가 되었지. 그리고 그 정신 나간 늙은이는 예상대로 절호의 기회로 삼았고 말이야.”

처음에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 입가에 미소를 거는 둥, 매우 안정감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시작된 대답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한 번 호흡을 고르고 나서부터는 마치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을 했는데, 테라치를 언급할 때만큼 경직된 얼굴이었다. 한 눈에도 장로 로리나를 상당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정신 나간 늙은이라고 지칭할 때, 입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입김을 보면 분명했다. 그는 그녀를 몹시 언짢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반대로 아르크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장로 로리나가 그가 아르크에 버림받았다는 배신감에, 증오로만 가득하다고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증오가 정말 목적을 잃고 걷잡을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그가 모두를 불태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까지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 불안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꺼림칙한 기분이 들 때면 생겨나고는 하는, 그런 무거운 마음이 밀려들며 말문을 막아버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저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입술과 혀가 마비된 기분이었다. 그러자 그가 조금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물었다.

“너, 나를 믿지 못하고 있는 거지? 그녀가 나를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겠지? 그렇지? 아마도 네 마음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 로리나 그녀이기 때문이겠지? 하긴 그러니까 이제야 나를 찾아온 것이겠지. 여기 앉아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이미 이 자리에는 시체가 대신하고 있었을 테고 넌 군대를 손에 넣었을 거야. 그렇지? 로리나 그녀의 이름으로 말이야. 어차피 그것도 이미 예상한 일이야. 하나 묻자. 왜 그녀를 도우려는 거지? 그녀를 왜 믿는 거야? 그녀가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해? 어째서 그렇지? 다른 사람들 말은 믿지 못하면서 그녀의 말을 믿는 이유가 뭐야?”

바츠는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이롤로의 질문이 자신을 이곳까지 안내해주었던 그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닮았다고 느꼈다. 자신이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롤로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에 좋지 않은 기분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꼭 나무라기 위해 추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으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의 재촉에 쫓기며 당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최대한 냉정하고 신중하기 위해 노력해야할 필요를 느낀 탓이었다. 덕분에 장로 로리나 그녀가 최소한 자신에게만큼은 가장 정직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가 진심을 전하기 위해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고는 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바츠는 그 성의를 그녀의 말을 빌려 이롤로에게 전했다.

“...난 그저...이슬이 되고 싶을 뿐이야. 눈물 같은 이슬이 되어서 땅이나 촉촉하게 적신 뒤, 햇살에 불타 사라지는 그런 이슬 말이야.”

이롤로가 대답을 듣더니, 한쪽 입술과 볼을 동시에 이죽거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는 바츠가 잠시나마 오해라고 생각했던 빈정거림의 실체를 드러냈는데,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 충분한 조롱조의 말투였다.

“재미있네. 그런데 그거 알아? 지상에 빛은 있어도 햇살은 없다는 것 말이야. 지면을 적신 이슬은 땅을 부패시켜 고약한 냄새가 나도록 만들 거야. 그리고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어 시련을 더할 테고 말이지. 그런데도 땅을 충분히 적시고 싶어? 모두가 더 곤란해질 텐데? 네가 말한 건 오히려 땅을 썩게 만들 뿐이라고. 그런 땅에서 과연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

“항상 그렇더라고. 사람들은 문제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고, 분석하려고만 들지. 그건 트집일 뿐이야. 세상에는 완벽한 것이 없고, 예외가 없는 것은 없어. 트집은 그런 사소하고도 작은 부분을 파고드는 억지인 거지. 네 처지에 화가 나서 그런 거야?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억울해서 화가 난 거잖아. 그래서 모든 걸 삐딱하게 보는 거지? 너를 둘러싼 모두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의심스럽지? 하지만 그건 틀려. 부사령관이 그랬어. 네 아버지가 아르크를 배신한 거라고, 아르크의 정보를 팔아넘기는 짓을 했다고 말했지. 그래서 너희 가족이 추방된 것이라고 했어. 쫓아낸 것이 아니라, 처벌 대신 자비를 베푼 것이라고 말했다고.”

바츠는 가슴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최대한 마음을 짓누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롤로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두 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머리 위로는 불길이 솟구치는 잔상이 보였다. 그가 매우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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