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 새로운 감염 -- > * 258화 *
“아버지가 아르크를 배신했다고? 부사령관이 그랬다고? 웃기는 소리! 그딴 소리를 믿는 거야? 그래! 나는 아르크에 대한 증오로 가득해!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아르크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미치지 않았어!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고! 뭐? 우리 아버지가 아르크를 배신해? 놈들이 자비를 베풀어서 살려준 거라고? 그럼 지금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 있지? 우리 아버지는 정말로 죽었어! 진짜로 살해당했다고! 정말 우습다! 로리나를 믿는다는 건 부사령관을 믿지 않는다는 것 아니야? 그런데 부사령관의 그 말은 믿는다는 거야? 로리나는 뭐라고 했지? 그녀도 부사령관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던가? 그렇지는 않을 걸? 너야 말로 억지 부리지마. 넌 진실을 몰라! 아마 우리들 중 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은 너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너 정말 내가 알고 있는 바츠가 맞아? 그런 멍청한 소리를 듣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아! 놈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지 알아? 우릴 내쫓았어! 충격으로 힘이 없는 엄마와 어린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나가라고 소리쳤다고! 아버지를 잃은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버리듯 내쫓았단 말이야! 덕분에 우리 엄마는 굶주림 속에서 죽어갔지! 이 더럽고 냄새나고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고! 네가 그 참담함을 알아? 주위는 온통 회색빛으로 가득한데, 엄마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고! 네가 뭘 알아! 검은 보랏빛 숨결을 본 적 있어? 바닥에 낮게 깔려 있다가, 발목부터 타고 올라와 숨통을 조르지! 그 기분을 네가 아느냐고! 그딴 빌어먹을 소리를 감히 내 앞에서 해? 헌터가 되더니 너도 미쳐 버린 거야?”
바츠는 흥분한 이롤로를 보자, 문득 장로 로리나가 이롤로가 추방된 이유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녀가 어떤 말을 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화가 오간 적이 있었는지 조차 의문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바로 과거 민스크 시티에서 보았던 작은 얼굴이라고 불리던 야인이 떠오르며 대신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자신도 아르크에서 쫓겨났다고 말했었다. 틀림없었다. 그를 만나고 나오며 버니에투와와 마주치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던 터라 기억이 또렷했다. 바츠는 끓기 시작한 주전자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이롤로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부사령관의 말은 역시 믿을 게 못 되는 거로군. 그렇지? 좋아, 어차피 그를 믿지 않았어. 내가 그녀의 부탁으로 여기 와 있다는 것을 보면 알잖아. 하지만 의아한 것들이 너무 많아. 내가 너의 부름에 응답한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야. 네 말대로 너의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 맞다면, 그 범인은 아이기스뿐이잖아. 아이기스의 군인들이나 칼리에가 되겠지. 안 그래? 지금 네가 머물고, 이끌고 있는 곳의 사람들 말이야. 그런데 넌 지금 그들과 함께 있잖아. 비록 부침을 겪었을 테지만, 그들의 일부가 된 것에는 변함이 없어. 어쩌면 네가 진짜 원망해야 할지도 모르는 자들과 함께 있는 거라고. 왜? 대체 왜야? 그녀가 널 거둬서 돌봐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어? 아니면 그 고마움은 느끼지만 아버지의 복수도 하고 싶다고 말할 거야? 말해봐. 난 정말 궁금해. 그저 오랜 친구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잖아. 옛정을 생각해서 내게 도망가라고 귀띔이라도 해주고 싶었어? 말해보라고.”
바츠는 자신이 실컷 말을 늘어놓고도 돌아올 대답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었다. 이미 충분히 이롤로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사령관이 이롤로를 비롯해서 사망한 엔지니어들의 가족을 추방시키고는 했던 것을, 거짓으로 포장해왔다는 것에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장로 로리나가 이롤로를 거둬 돌봤다고 말했던 것을 더 이상의 의심 없이 받아드릴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이롤로는 아르크에 대한 증오와 아이기스나 장로 로리나에 대한 원망을 함께 키운 것으로 같다고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었다. 방금 전 그를 향해 던진 의혹 대부분이 이미 사실이었다. 당시 어렸던 그로써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그저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주어진 상황을 이용했던 것뿐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가 너무 불쌍했다. 자신 역시 케일리를 잃고 나서 그들의 진심을 목격한 뒤, 많은 변화를 경험했었다. 장로 로리나를 믿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그도 분명 무엇인가를 본 것이 틀림없었다. 바츠는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카니지를 뽑아들지 않아도 되길 바랐다. 그를 만나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자신의 판단이 실망이 아니었으면 했다.
이롤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물을 단 번에 들이켜듯 흥분을 급격히 가라앉히며 호흡을 고르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격앙된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전부 사라지고, 두 눈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한심함을 가득 채운 뒤였다. 그가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정말 바보구나...왜 우리 아버지가 아이기스나 칼리에에게만 살해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지상에는 무법자들 천지고 헤러티커도 있는데 말이야. 뭐, 아무래도 좋아. 너와 말장난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맞아, 난 네 말대로 그 늙은 여자를 반드시 살해하게 될 거야. 내 계획에는 변함이 없어. 그녀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모양인데, 그 정신 나간 여자가 날 거둔 것은 엄연히 사실이지. 하지만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라는 것도 사실이야. 날 돌봐준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어쩌면 아르크나 너와 같은 친구들을 위한 내 마지막 애정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너를 부르고 그녀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거라고. 아르크는 변해야 하는 것이지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런데도 난 아마 그녀를 대신해서 아르크를 공격하게 될 거야. 그리고 결국에는 아르크의 그 거대한 철문을 부수게 되겠지. 난 그녀가 아니야. 그녀가 너에게 뭐라고 했지? 아르크를 해방시킬 거라고 말하지? 그리고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 거라고 말할 거야. 그녀에게서 그 방법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 나와 그녀는 결국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방법과 의도는 매우 다르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아버지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된 것이 아니란 말이야. 노상강도도 아니었고, 헤러티커도 아니었어. 아이기스나 칼리에도 아니었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은 ‘놈들’의 짓이라고. 부사령관과 그 미친 여자! 그 둘 모두에 의해 희생당한 거란 말이야! 내가 고작 아르크에서 쫓겨난 걸로 아르크를 증오하는 줄 알아? 그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섭섭해! 그건 엄마를 죽게 만든 것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야! 적어도 내가 진실을 모를 때에는 그건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말이야. 아르크의 규칙이었지. 하지만 난 보았어. 그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말이야.”
“음모...라고?”
바츠는 다시 점점 흥분해가는 이롤로를 보자, 이전에 불편함을 느꼈던 자리가 또 한 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앉은 자리가 갑자기 밑으로 추락할 것 같아 불길했다. 헤러티커에게 쫓겨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그의 모질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헤러티커의 손톱을 대신해서 날아들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을 뿐,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코로 크게 숨을 들이켜며 안정을 찾는 모습이 능숙하고 신속했다. 자리에 앉는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바츠는 그런 그가 애써 흥분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자신도 냉정함을 금방 되찾을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 타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이기스가 오래 전부터 아르크를 약탈해온 것은 이미 알고 있을 거야. 매년 1월1일에 시작하는 암흑기에 이루어지는 교역을 훼방 놓는 것이지. 그럼 아르크에는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힐 수 있고, 그만큼 아이기스는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지. 아르크를 습격하는 아이기스의 주된 목적이라고. 지상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니까 말이야. 아르크 주민들의 목숨에는 관심도 없었지. 그때까지 외부에서 엔지니어들이 사망하는 건 대부분 사고나 헤러티커에 의한 것들이었어. 가끔은 약탈자나 노상강도들 짓이기도 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우린 어떻게 알고 있었지? 우리가 아르크에 있을 때 뭐라고 배웠냐고? 아이기스라는 약탈자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터전을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배웠지. 안 그래? 그게 전부 거짓말이었다면 믿겠어? 아르크는 아이기스를 증오하게 만들기 위한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고 있었던 거라고. 시간이 지나고 헤러티커가 줄어들고 약탈자나 노상강도들이 뜸해지고 났을 때에는, 미리 정해둔 엔지니어들을 직접 살해하기 시작했어. 아르크로부터 지시를 받은 군인들이 엔지니어들 중 일부를 골라 살해하기 시작했단 말이야. 전진기지에 배치된 군인들의 목적은 전진기지의 마을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런 아르크로부터의 지령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고.”
바츠는 이롤로의 말을 듣고 나자 문득 전진기지의 샤오밍이 떠올랐다. 그는 빼어난 저격 솜씨를 가지고 있었고, 그 놀라운 실력으로 프리샤를 살해했다. 나중에 장로 로리나와 셀레나에 의해서 부사령관의 지시였다고 밝혀진 일이었다. 바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롤로에게 더 자세히 말해보라고 재촉해야만 했다. 스스로가 느낄 수 있을 만큼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롤로는 그런 바츠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입술을 뗐다. 바츠가 충분히 진정한 뒤였다.
“...정확히는 아이기스가 아르크를 습격하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어. 아이기스는 아르크를 습격할 때마다 무장된 군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헌터를 마주해야 하는 모험을 해야만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거든.”
“부사령관과 장로 로리나의 협정...”
바츠는 저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뇌리를 스치는 강렬한 자극에 혀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롤로는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이고는 바츠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제법 많은 것을 들은 모양이구나.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관계라면 당연한 건가? 어쨌든 그 둘의 거래로 양쪽이 충돌해야할 이유는 현격히 줄어들었어. 적어도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셈이니까 말이야. 아르크에서 지원해주기 시작한 음식들과 기타 생필품들은 지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밤중에 지핀 모닥불 같은 거였지. 작지만 간절한 위로였어. 더러운 밀약이 만들어낸 농락이라는 점만 뺀다면 말이야. 순진하고 절박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우롱이었지. 아르크는 약간의 선심으로 내부 결속을 도모하고 지상에 남은 사람들의 적개심을 감소시킬 수 있게 되는 등 일부 골칫거리를 덜 수 있었고, 아이기스 역시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보다 더 공고히 할 수 있었어.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하지만! 하지만 계속해서 사망자는 나왔잖아. 내가 아르크에 있을 때만 해도 매년 아르크에서 추방되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리고 그만큼 이주해오기도 했지. 네 말대로라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 아니야? 적어도 추방되는 사람들의 빈도가 크게 줄어들었어야 했잖아.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 가끔은 오히려 더 많을 때도 있었지. 매년 플랫폼에서 자신의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바츠가 이롤로의 말을 거의 가로막다시피 끼어들었다. 그러자 이롤로가 혀를 살짝 찬 뒤 대답했다.
“그들을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싶은 거야? 그러면 영원히 답을 찾을 수 없어. 이건 매우 복잡한 문제라고. 부사령관을 만나본 적 없어? 그가 말해주지 않았어? 그가 노리는 게 뭐였지? 그것까지는 듣지 못한 거야?”
바츠는 물음을 위장한 이롤로의 연속적인 질책어린 대답에, 오래 전 부사령관과 나눴던 이야기가 불현 듯 스쳤다. 그가 대단한 자부심으로 표현했던 말이었다.
“유전 문제와 면역력...”
이롤로가 심각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만족감에 뿌듯함이 실려 있는 말투로 맞장구쳤다. 바츠의 힘없이 흘러나온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분명 그것 말고도 무수히 많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겠지만 그 문제만큼 분명한 것도 없지.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유입이 필수잖아? 그런데 외부인들이 아르크에 대한 적대심이 강하다면 그 수급은 결코 원활하지 않겠지. 계속해서 사망자가 필요했던 이유는 오로지 스티그마타를 유지하기 위해서란 말이야. 오래된 사람의 빈자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채운다. 동시에 그럴 듯한 거짓명분으로 내부 결속을 다지고 정체성을 확립한다. 로리나 그 노망난 케찰과 지저분한 모략으로 말이야!”
바츠는 마지막에 힘을 줘 말하는 이롤로의 모습에서 심각한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이롤로 그의 말이 의심할 나위 없을 만큼, 군더더기 없는 주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사령관부터 장로 로리나 그리고 이롤로까지 각각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셋 중 틀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느 누구의 말을 먼저 듣던지, 나머지 두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철썩 같이 믿고 신뢰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꼭 그림자를 보는 듯 했다. 피사체는 하나지만 시간과 자리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을 하는 그림자.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인지 선뜻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바츠는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그녀가 아르크를 점령하려고 하는 거지? 그녀로서는 그럴 필요가 없잖아. 아이기스는 아르크에 관심이 없다고 했잖아. 아니,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아르크로의 이주에 꼭 필사적일 필요는 없다고 해야겠지.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롤로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혹은 어디인지 모르게, 테이블 위로 가파르게 쏟아져 내리는 무거운 한숨이었다.
“부사령관이 그 협정을 일방적으로 깨버렸거든. 아르크에서의 지원이 더 이상 이뤄지지 않기 시작했지. 이유는 몰라. 어쩌면 더 이상 아이기스와 은밀한 관계를 이어갈 필요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손해라고 생각했을 거야. 이미 세상은 아르크에 대한 반감보다는 환상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아무리 지상에서 평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더라도, 아르크만큼 안락할 수는 없지. 사람은 보다 더 편안하고 좋은 것을 끊임없이 갈구하잖아.”
바츠는 로리나가 협정을 깬 부사령관을 질타하듯 언급했던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분명 부사령관과의 협정이 깨지면서 사이가 불편해졌다고 했었다. 그리고 상황을 그렇게 만든 부사령관을 매우 괘씸하게 생각했다. 이롤로가 말했다. 조금 실망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내가 널 이리로 부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진실은 하나야. 그리고 그 진실을 모두가 알고 있지.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은 없어. 그게 그들과 나의 차이야. 난 네게 그 진짜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라고.”
“이제는 그만 너를 믿으라고 말하는 거야?”
바츠가 차갑게 묻자, 이롤로가 자신의 뒷머리를 짜증 섞인 손길로 긁적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먹은 음식이 잘 소화가 되지 않아 불편한 사람처럼 답답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입으로 넘기기 힘들게 밀려들어온 들숨을 가까스로 삼키며 말했다.
“생각해보라고. 네가 정말 날 죽이고 군대를 손에 넣었다면, 같이 온 헌터들은 어떻게 처리할 셈이지? 그들이 과연 그 상황을 받아드릴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뭐라고 말했지? 그녀가 그들에 대한 처리는 알아서 하겠다고 하지는 않았어? 설마 칼리에와 군대로 그들을 살해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럼 결과가 어떻게 되든 피해가 만만치 않을 거야. 어쩌면 네가 죽을 수도 있지. 그녀가 원하는 게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양쪽 모두 죽는 것 말이야.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손쉬운 법을 알려줄까?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따져서 찬동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그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데로 행동할 뿐이라고.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다 말이야. 캄캄한 혼란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앞에 세워진 상징은 그 의미가 어마어마하다고.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걸만큼 모든 것이 되기도 하지. 그녀의 이름은 그런 상징이 되고도 남을 수 있어. 내가 네 손에 죽고, 네가 칼리에와 함께 밖에 있는 헌터들과 싸우다가 죽으면, 길 잃은 영광은 전부 그녀 차지가 되겠지. 그것도 아주 손쉽게 말이야.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네가 살아남는다고 했을 때, 그녀는 과연 너를 어떻게 받아드릴까? 그들은 그녀와 너 사이에서 누구의 말을 따를 것 같아? 네가 그녀의 지시를 받고 달려드는 남은 그들을 전부 감당할 수 있겠어?”
바츠는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당부만 믿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의혹을 가져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너무 많은 일을 겪으며 정신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이제는 너무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 긴 시간 여행을 하며 얻은 피로에 완전히 지쳐버린 것이다. 고민은 잊어버렸고, 사고는 정지했다.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이롤로가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바츠, 로리나 그녀를 어디까지 믿지? 그녀는 쓰러뜨려야 해. 그리고 아르크는 개방되어야 하고 말이야. 그들은 악이야.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 사람들을 우롱하는 더러운 악! 뒤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며 어리석다고 조롱하고 있겠지. 로리나 그녀나 아르크 부사령관이나 결국 똑같은 사람들이란 말이야. 그들은 그냥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을 위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것뿐이야. 절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내가 왜 나를 거두고 돌봐준 그녀를 배신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말해줄게. 그들의 실체에 대해서 말이야. 케일리. 케일리가 어떻게 죽은 지 알아? 네 누이 케일리 말이야. 그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어?”
바츠는 그의 물음에 누군가 심장을 세게 쥐었다가 놓은 것처럼, 목덜미에는 소름이 돋았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토록 기분 나쁜 기운을 느낀 것은 지상으로 나와 헤러티커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밖에 없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역겨운 냄새와 끔찍한 외모. 무엇보다도 피에 굶주린 듯한 붉은 눈동자가 극도의 긴장감에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 정도였다. 지금 당장 테이블 위로 구토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츠는 그 매스꺼운 기분을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다. 눈썹 위의 허공에 투명 소용돌이가 생겨나고, 버려진 종이처럼 주변이 구겨지는 느낌도 어금니를 깨물어 이겨냈다. 그에게 물었다. 아까처럼 재촉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침착하다 못해 매우 차가웠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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