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 새로운 감염 -- > * 260화 *
바츠는 그제야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레나타를 비롯해서 이곳까지 함께 온 헌터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들이 도시 밖 동굴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떠올랐다. 조금 전 내린 결단이 유보될 만큼, 무겁고 혼란스런 기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일이었다. 그들을 해쳐야 한다는 생각에 크게 망설여졌다. 그러자 이롤로가 한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고민할 것 없어. 넌 그저 빚을 갚는 것뿐이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바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롤로가 말을 마치고는 곧장 자리를 옮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매몰차게 돌아서서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뒤에 섰던 수하에게는 칼리에를 소집하라고 명했고, 자신은 방독면과 붉은색 카니지를 챙겨들었다. 바츠에게 자신의 카니지를 칼맨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라고, 자랑하듯 설명을 하는 여유로운 모습도 보였다. 바츠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느새 헌터들을 남겨두고 왔던, 그 동굴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롤로가 걸음을 멈춰 세우며 바츠에게 말했다. 방독면 안에 숨겨진 그의 두 눈이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기회는 한 번이야.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크게 당할 수도 있어. 네가 관심을 끄는 사이, 우리가 단 번에 처리하도록 할게.”
이롤로가 말을 마치며 뒤쪽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바츠는 그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헌터와 흡사한 복장을 하고 있는 서른 명쯤 되는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비록 훨씬 낡고 초라한데다 살짝 부족하기까지 한 차림새였지만, 눈빛만큼은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사력을 다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롤로가 가리킨 것은 정작 그들이 아니었다. 이롤로의 시선은 무리의 앞쪽에 선 사람 둘, 정확히는 괴상한 물건을 등에 지고 있는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
바츠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손에 들고 있는 기다란 막대가 등에 짊어진 사람 몸통 크기의 검은 금속 통과 얇은 줄로 연결되어 있었고, 기다란 막대의 끝에는 손톱 크기의 작은 불꽃이 이마에 맺힌 땀처럼 매달려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이롤로는 그 물건을 불벼락이라고 말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주변을 온통 화염으로 뒤덮을 수 있다고 했다.
바츠는 이롤로의 말을 믿지 않았다. 너무 허황되어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무기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욱더 황량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뒤늦게 밀려드는 한 가지 의문이었다.
‘내가 이롤로의 말에 동의를 했던가?’
바츠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당장 기억나는 것은 이롤로의 지시로 건물 앞에 운집한 수십 명의 칼리에들과 그들에게 굳은 결의를 담은 일장 연설을 했던 이롤로의 강렬한 목소리뿐이었다. 이롤로는 당시 자신의 목소리를 이렇게 마무리했었다.
‘자유를 위하여!’
바츠는 걸음을 다시 옮겼다. 이롤로가 점점 뒤로 밀려났고, 동굴의 입구는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안으로 몸을 들이밀자, 막 밖으로 나오는 헌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복장을 완전히 갖춘 채, 싸늘한 시선으로 카니지를 뽑아들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선 헌터가 말했다.
“집사, 기분 나쁜 냄새가 난다. 불청객이 쫓아온 모양이야.”
바츠는 그의 목소리에 가슴이 짓눌리는 심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숨을 쉬기 어려웠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하는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저 입만 벙긋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방독면으로 헌터들이 입술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헌터들의 직관력은 방독면의 거죽을 간단하게 관통했다. 다른 헌터가 앞으로 끼어들며 물었다. 경련이 일어난 사람처럼, 고작 한마디를 하는 동안에도 고개를 한쪽 방향으로 두 번이나 갸우뚱거렸다.
“우, 우리에게...무슨, 무슨 짓을 한 거야?”
바츠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덜컥 겁이 나,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헌터들이 이미 이롤로의 존재를 눈치 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하게 일치했다. 앞에 선 헌터가 느닷없이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헤러티커가 덤벼드는 것처럼 거침없는 모습이었다. 본능적으로 움직인 팔이 아니었다면, 벌써 목이 달아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멋대로 움직인 팔이 어느새 허리춤의 카니지를 뽑아들어 그의 칼날을 방해했다. 칼날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바츠를 대신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뒤에서 이롤로의 외침이 들려왔다.
“발사해!”
바츠는 그의 외침에 비좁은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옆으로 몸을 날린 뒤 바닥으로 납작하게 엎드렸다.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러자 짐작대로 매우 낯선 짐승의 울음소리와 같은 굉음이 동굴 안쪽을 향해 격렬하게 쏟아져 들어왔고, 이윽고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며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매우 뜨겁고 소름끼치는 괴성이었다. 하지만 그 굉음은 바츠를 놀라게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앞에 섰던 헌터들을 덮쳤는지 그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다. 뜨겁고 소름끼치는 괴성과 헌터들의 끔찍한 비명으로 동굴 안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마치 키예프 시티에서 있었던 그날의 절망을 다시 듣는 기분이었다. 레이븐의 부탁으로 캣을 구하고 돌아 나오는 건물에서 헤러티커의 악랄한 살육이 있었다. 벼랑 끝까지 몰린 수십 명의 목숨을 갈갈이 난도질해서 앗아갔고, 뒤에는 그 어떤 자비도 남기지 않았다. 그때의 무자비함이 지금 이곳에서 생생하게 재연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악에 바친 비명소리가 뜨거운 굉음과 함께 한 맺힌 절규로 나타나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 절규였다.
바츠는 고개만 들어 앞을 살폈다. 그러자 동굴의 천장에는 지상을 빼곡히 수놓고 있는 하늘의 회색빛 구름처럼, 거대하고 붉은 불꽃이 잔뜩 피어올라 있었고, 그 밑으로는 두 개의 불덩어리가 동굴의 입구 쪽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뒤늦게 들려온 절규는 그 불덩어리에 덮쳐지는 이롤로와 칼리에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두 개의 불덩어리에 돋아난, 불꽃만큼 붉은 칼날이 사람들을 향해 잔혹하게 휘둘러지고 있었다. 바츠는 그 불덩어리의 정체가 자신과 함께 온 그리고 방금 전까지 마주보고 섰던 그 헌터들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둘은 온몸이 화염에 휩싸였는데도 불구하고 카니지를 내려놓지 않은 채 전의를 상실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의지를 고조시키며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고작 두 사람에 의해서,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사방으로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자신들이 손에 하나씩 쥐고 있는 무기들을 완전히 잊은 듯 보였다. 헌터들은 그런 그들을 무려 7명을 살해하고 4명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나서야 멈춰 섰다. 누군가의 간섭으로 인해서 멈춘 것이 아니었다. 수명이 다한 기계처럼 천천히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힘없이 쓰러졌다. 온몸을 휘감고 있던 불길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둘은 그렇게 차례로 하나씩 숨을 거뒀다.
바츠는 나중에 겨우 진정된 분위기를 타고 다가온 이롤로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롤로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한참동안 자리에 누워 있었을지도 몰랐다. 헌터들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자꾸만 반복해서 떠올리느라, 자신이 바닥에 업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롤로가 말했다. 약간 흥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흥미진진했지? 그래도 이 정도에서 끝나게 되어서 다행이야.”
바츠는 그런 이롤로를 지나쳐, 검게 그을려 이제는 미동조차 없는 헌터들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얼굴은 녹아내린 방독면으로 흉물스럽게 변해 있었고, 칼자루를 쥔 손은 아직까지도 카니지를 꼭 붙들고 있었다. 둘 다 신체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몸은 벌써부터 단단하게 경직되어 있었고, 그 위로 곳곳에 크고 작은 불씨가 아직 남아있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바츠는 그 불씨를 직접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눌러 조심스럽게 사그라뜨려 버렸다. 매우 신중한 손길이었다.
“역시 대단해. 헌터가 한두 명만 더 있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전열을 가다듬지 못할 만큼 큰 타격을 입었을 거야.”
그 사이 뒤를 쫓아온 이롤로가 말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말투였다. 하지만 바츠는 달랐다. 이롤로의 말을 듣고나자 뭔가 이상한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분명 일리트시에서 출발할 때 자신을 포함해서 총 다섯이었다. 중간에 사고로 한명을 잃었고, 이곳까지는 모두 넷이 왔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시신은 둘 뿐이었고, 자신을 포함해도 셋이 전부였다. 한 사람이 없었다.
‘레나타!’
바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몸을 돌려 세웠다. 이롤로가 놀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옆을 또 한 번 그냥 지나쳤다. 동굴 안쪽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훨씬 급하게 여겼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도무지 견디기 어려웠다.
동굴 내부는 시커먼 그을음으로 가득했다. 조금 전에 울려 퍼진 비명의 흔적들이었다.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바츠는 그 흔적을 따라 한걸음씩 안으로 내딛었다. 이롤로가 그런 바츠를 황급히 따라와 물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그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흘렀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바츠는 이번에도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이롤로가 답답해하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기쁘면서도 찝찝하기도 한 묘한 기분에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심하게 떨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동굴 반대편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워낙 작고 미세해서 바람소리라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숨겨진 인기척이었지만, 바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롤로에게 조용하라는 눈치를 주고는 혼자서 그쪽을 향해 계속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남겨진 이롤로가 애가 타는지 머리를 긁적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앞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신을 집중했다. 언제든지 카니지를 뽑아들 준비도 했다. 그러자 머지않아 반대쪽으로 이어진 또 다른 출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 출입구를 통해 막 안으로 들어오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방독면과 검은 슈트로 감춰져 신원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차림새와 밖으로 드러난 몸의 윤곽으로 그가 헌터이고 여자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바츠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레나타?”
“응? 언제 왔어? 지금 온 거야?”
그녀가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반갑게 물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볼 일 좀 보고 왔지. 왜? 내 가슴이 필요해?”
바츠는 그녀가 본인의 커다란 가슴을 스스로 움켜쥐며 장난기를 발휘했지만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어떤 반응을 해야만 하는지 무척이나 고민스러웠다. 소리를 질러 내쫓아야 하는지, 은밀하게 말을 건네 달아나게 만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롤로를 불러야만 하는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저 분명한 것은 그녀의 장난에 자신이 크게 웃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바츠을 웃게 만들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녀 역시 금방 깨달았다. 그녀가 시선을 바츠 뒤쪽을 향해 옮기더니, 급격히 차분해진 모습으로 말했다.
“어라? 뭐야, 저건 누구지?”
바츠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슬그머니 따라온 이롤로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몸을 숨기기 위해 서둘러 뒤로 다시 물러났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뒤였다. 그는 이쪽에 발각된 지 오래였다. 그녀가 물었다.
“집사, 저 녀석 뭐야? 뭔가 이상한데?”
그녀의 시선이 의심스럽게 변했다. 제대로 볼 수 없는 위치였지만 뒤쪽으로 새카맣게 그을린, 조금 전 비명의 흔적도 발견한 것 같았다.
바츠는 고민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뒤엉키는 생각을 잠시 미뤄두고는, 멋대로 움직이는 자신의 팔에 몸을 맡겼다. 바츠의 팔은 자유를 부여받자, 머뭇거리거나 지체하지 않았다. 번개처럼 카니지를 뽑아들더니, 그녀의 복부를 깨끗이 관통시켰다.
바츠는 자신의 카니지가 그녀를 찔렀다는 사실을, 그녀가 주변 공기를 다 빨아들이려는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켜며, 자신의 옆 목의 옷깃을 움켜쥐는 것을 보고야 알았다. 그녀가 급격히 충혈 된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너! 너 뭐야!”
바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안에 차오른 작은 속삭임을 내뱉은 것이 고작이었다.
“...미안해...”
바츠는 카니지를 더욱 깊숙이 꽂아 넣었다. 그녀의 입에서 굵고 짧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고, 몸에서는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옷깃을 붙들고 있던 손마저도 힘을 잃고 떨어져 나갔다. 마치 그녀가 구겨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떨어져 나간 것은 착각이었다. 그녀는 기운이 빠져 옷깃을 놓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손을 거둔 것이었다. 그녀가 거둬들인 손을 남은 한 손과 함께 다시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바츠의 양 볼을 감싸 쥐었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차분하고 침착했다. 그녀가 물었다.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목소리는 꺼져가는 불씨처럼 매우 기력이 없었다.
“대답해 봐...지난번 스톡홀름 시티로 가서 살자고 했던 말. 그 말 나한테 진심으로 한 거야?”
바츠는 이곳으로 오면서 한 마을에 들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노인과 많은 여인들이 살던 작은 마을이었다. 근처 아르크의 군인들이 몰려와 일전을 벌인 곳이기도 했다. 그녀는 건물 옥상에서 밤에 나눴던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바츠가 아델리나를 그리워하며 했던 말이었다. 바츠는 레나타에게 진심으로 대답했다.
“응...네게 한 말이었어.”
그녀는 짧지만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마치 헛웃음처럼 흘러나오는 묘한 웃음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럴 것 같았어...고마워...”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그녀의 손이 빠르게 추락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밑으로 주저앉았고,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바츠는 그녀를 바닥으로 반듯하게 눕혔다. 이제 막 잠이 든 아기를 다루는 것처럼 신중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신중함이 묻어나는 손길로 그녀의 방독면을 천천히 벗겨냈다. 그녀의 마지막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녀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막 옆으로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만 없었다면, 그녀가 미소 짓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평안해 보였다.
바츠는 그녀의 얼굴을 막상 확인하고 나자, 가슴이 통째로 드러내진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그 안이 차가운 북쪽 밤공기로 가득 채워진 기분이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것처럼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통증을 달랠 여유가 없었다. 뒤에서 다가오는 낯선 인기척에 빠르게 반응해야 했다.
바츠는 그 인기척을 향해 손에 쥐고 있던 카니지를 휘둘렀다. 인기척은 놀란 듯 한 걸음 물러섰고, 바츠는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돌아보았다. 이롤로였다. 그의 붉은 머리칼과 손에 들린 빨간 카니지가 눈에 띄었다. 그가 한쪽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꽤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바츠, 진정해. 이제 다 끝났어.”
이롤로가 자신의 방독면을 벗으며 얼굴을 보여주었다. 긴장한 기색이 묻어나는 미소를 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이롤로에게 말했다. 죄책감에 물든 원망어린 목소리였다.
“젠장, 이롤로...사과 주스 한 잔의 값이 너무 비싸잖아.”
이롤로가 굳어진 얼굴로 답했다.
“...그 선택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해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