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61화 (261/268)

< --   16. 새로운 감염   -- >         * 261화 *

바츠는 이롤로의 말을 이번에는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오래 전 오데사 시티에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칼리굴라의 건물로 멘디를 데리러 갔을 때였다. 건물을 오르던 중 계단이 무너져 내렸고, 미처 손을 써볼 틈도 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부서지며 생겨난 천장의 구멍이 아니었더라면, 캄캄한 어둠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꽤 높은 곳에서부터 추락했는데도, 목숨을 건지고 큰 부상도 없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추락만큼이나 위험한 기다림이 있었는데, 바로 끔직한 돌연변이 헤러티커였다. 놈이 왜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놈은 그곳에서 붉은 눈동자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을 관통하고 있었고, 현재 바츠는 그때 그곳에서처럼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자칫 발을 잘못 내딛으면 그 헤러티커의 커다란 손톱에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이지는 못하고 앞에 선 이롤로만 한 없이 바라보았다.

이롤로는 그런 바츠를 데리고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거처에서 음악을 틀어주었다. 전진기지에서 보았던 것과 형태만 조금 다른 축음기였다. 느리고 무거우면서도 애절하고 슬프게 시작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노랫말은 없었다. 그저 선율만 흐르는 독특한 음악이었다. 이롤로가 테이블 앞에 힘없이 앉아있는 바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과거에 누군가가 달빛을 음악으로 만든 거래. 달빛이 뭔지 알고 있지? 이제는 보기 어려운 것이야.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달빛을 음악으로 남겨둘 생각을 한 걸까? 세상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참 대단하지 않아? 마음에 들어? 이건 축복이라고. 이렇게라도 소리로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맙냐고.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들이야.”

바츠는 달빛을 실제로 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북쪽에서 보았다. 열린 하늘 위로 노란 금색의 달이 반원 모양을 하고 있었다. 비록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꽉 막힌 가슴을 달래주기에는 충분한 감동을 머금고 있었다. 음악은 그 달을 제대로 담고 있었다.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춤을 추게 만들고, 나중에는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몸을 흔들게 만드는 그런 음악이었다.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가진 마성이었다.

바츠는 눈물을 흘렸다. 이롤로가 몸이 굳어질 정도로 당황했을 만큼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눈시울로 끊임없이 차오르는 은은한 선율이 차가운 눈물이 되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멜로디가 너무도 애절해 참을 수가 없었다. 슬픔에 감염되고 있었다. 가슴이 북받치고 서러움에 소리 내어 울었다. 앉은 자리에서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나중에는 그 슬픔에 미쳐 웃음이 났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웃음을 내뱉었다. 허탈함과 후회로 짙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함을 질러댔다. 서러운 울음소리와 멋대로 흘러나온 웃음이 한 데 뒤섞인 비명이었다. 케일리를 잃고 전진기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있는 힘껏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눈물은 마르지 않고, 서러움은 자꾸만 커져갔다. 한참동안 흐른 음악이 완전히 끝나고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자리가 불편하다고 느낄 만큼 기운이 없어진 뒤였다. 바츠는 자리에 눕고 싶다는 간절함을 이겨내며 말했다. 앞에 놓인 테이블 위로 꺼내놓듯 내려놓는 말투였다.

“...그녀는 모두가 공평한 세상을 만든다고 했어. 모두가 똑같은 세상 말이야...”

바츠의 말에 이롤로가 내내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고 있다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그걸 믿어? 내가 왜 그녀를 살해하려는 줄 알아? 그녀가 어떤 사람인 줄 아느냐고. 여기서 북쪽으로 며칠을 가면 아르크가 하나 있어. C9이라고 불리는 곳이지. 그곳에는 지금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 왜 인줄 알아? 그녀가 모두를 학살해 버렸기 때문이야. 그녀는 우리 아르크도 그렇게 만들 속셈이지. 난 그걸 용납할 수 없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서라고.”

바츠는 앞에 선 이롤로의 결의에 불타는 얼굴을 보자, 문득 몇 가지 사실들이 하나씩 떠오르며 다시 한 번 감정이 치솟았다. 슬픔이 아닌 놀라움으로 인한 흥분이었다.

“설마! 이 쪽지! 이 쪽지의 글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그곳을 말하는 거야?”

바츠는 어느덧 조금 전 우울하던 감정을 잊고는, 꽤 오래 전에 테라치가 건네주었던 쪽지 하나를 품안에서 꺼내 보였다. 테라치가 전진기지 근처에서 칼리에를 살해하고 습득해온 물건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쪽지의 내용, 테라치의 추측과 지훈의 도움 그리고 강일의 일부 해석과 아르크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보았던 부사령관의 언급까지 이 모든 것이 차례로 연결되며 이롤로의 목소리에 다다랐다. 잠에서 깨자마자 차가운 얼음물을 들이켠 기분이었다. 이롤로가 쪽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더니, 의심스런 눈으로 물었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전에 일리트시를 다녀가던 칼리에를 살해하고 얻은 거야. 내 말이 맞지? 쪽지 안에 담긴 내용이 네가 말하고 있는 그곳을 말하고 있는 거지?”

이롤로는 잠시 고민하며 망설인 뒤에 대답했다.

“그래, 맞아. 방금 내가 말한 아르크에 대한 언급을 한 거야. 그녀는 날 협박하기 위해서 늘 C9 아르크를 들고는 했지. 복잡하게 쓰여 있지만 사실은 매우 간단한 내용이야. 약간의 고대어와 수학을 알 수 있다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지. 물론 어떤 대화가 오가는 지 아는 사람들이라는 전제가 붙어야만 하지만 말이야. 처음에 언급된 것은 숫자 9를 말하는 것뿐이야. 그녀는 이런 식으로 어렵게 말하는 걸 좋아하지. 바로 이어진 문장은 그녀 자신이 숫자에 해당하는 아르크를 정복했던 것을 말하며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야. 언제든지 우리의 아르크도 그렇게 만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내게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아이기스의 실권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고는 했어. 우습지 않아? 이렇게 보니 그 여자 정말 웃기는 군.”

“내용은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야.”

바츠는 조급함에 초조함을 느꼈지만, 침착하기 위해 애를 쓰며 말했다. 그러자 이롤로가 콧방귀를 뀌더니 만족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겠지. 진짜 궁금한 건 그녀가 어떻게 C9 아르크를 정복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겠지, 안 그래? 설명해주도록 하지.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이롤로가 바츠와 맞은편 자리로 가서 앉은 뒤에 말을 이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루엘라야. 크루엘라를 아르크 내부에 퍼뜨렸지. 수백 명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망했어. 한순간에 사람이 다시는 살 수 없는 폐허가 되었다고. 아르크는 크루엘라에 붕괴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괴물이 되었지.”

“어떻게? 아르크는 밀폐된 도시라고. 네 말대로 크루엘라에 취약할지 모르지만, 침입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도시잖아.”

이롤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말했잖아. 내부에 첩자가 있다고. C9 아르크에도 첩자가 있었어. 이주민으로 가장해서 잠입한 첩자였지.”

“이주민으로 가장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내부 검열을 통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결코 간단하지 않아. 수많은 검사를 통과해야만 돼. 바이러스나 세균을 감지하는 센서도 있지.”

“그렇겠지. 하지만 약속된 검증을 대비하거나, 내부 배신자 혹은 내부와 연결된 자들의 매수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그들이 누구인지 예상해볼 수 있겠어?”

바츠는 이롤로가 잠시 대답한 시간을 주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롤로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인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상상하기 쉽지 않지? 조금만 터무니없을 정도의 상상력을 발휘해 보라고. 상상력은 때로는 진실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야. 의심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중 가장 확실한 사람들 있잖아. 그래도 모르겠어?”

바츠는 이롤로가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었지만 역시나 대답하지 못했다. 기껏 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외부 엔지니어와 일리트시 같은 전진기지 도시의 군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위험한 일을 벌이고 성공시킬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이롤로가 말했다. 잔뜩 무겁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전진기지의 집사와 헌터. 그들이 그녀와 내통을 했어. 덕분에 아르크로 첩자를 들여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 외부에서 이주민을 결정하는 건 전진기지의 집사니까 말이야. 집사의 특권이지. 그런 집사가 추천하고 헌터가 데리고 들어간다. 아르크에서 그보다 안심할 수 있는 경우가 또 있을까? 난 그렇게 들어가게 되었다고 알고 있어. 그리고 우리의 아르크에도 현재 똑같이 진행되고 있고 말이야.”

바츠는 이번에는 놀라움으로 말을 할 수 없었다. 말문이 턱 막히며 정신이 멍했다. 이롤로가 그런 바츠에게 다시 본래의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늘어놓았다.

“놈들은 그걸 혁명이라고 불러. 기존의 지배자들을 청산하는 합당한 투쟁이라고 생각하지. 난 모르겠어. 그들은 그냥 미친 것뿐이야. 크로스 시티의 엑소시스트들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놈들이 외치는 정화와 대체 뭐가 다른 거지? 난 그런 방법에 동의할 수 없었어. 그건 내가 생각하는 복수가 아니야. 그건 그저 학살일 뿐이잖아? 그녀는 그것을 빌미로 날 협박해 온 거야. 그 쪽지의 내용을 보면 알잖아. 우리의 아르크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 자신의 뜻을 따르라고 말이지. 그럼 최소한 C9 아르크와 같은 결과를 내지는 않겠다고 했어.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난 바보가 아니야. 우리 아르크에는 이미 C9 아르크를 멸망시킬 때와 똑같은 상태로 꽤나 진행이 되어있어. 아까 보았잖아. 네 누이를 살해한 자 말이야. 그들이 그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을 실행할 놈들 중 하나라고. 그런데 나더러 믿으라고? 웃기는 소리지. 그 여자는 미쳤어. 난 그녀를 막기 위해서 칼리에를 개조해야만 했지. 그런 미친 여자를 막기 위해서는 그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한 법이니까 말이야. 처음 칼리에는 보통의 군대였어. 헌터와 같은 외부 위협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특별한 군대. 하지만 내가 바꾼 거야. 선량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보호하고, 불합리라면 언제든지 맞서 싸울 수 있는 존재들로 말이야. 상대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지? 그자가 장로 로리나의 첩자라는 것을 어떻게 믿어. 그냥 사고일 수도 있잖아. 아르크는 나에 대한 배려일수도 있고, 어쩌면 실리를 위한 방편일지도 모르는 생각으로, 그 사고를 덥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뿐이고 말이야.”

바츠가 드디어 말을 열었지만, 이롤로는 깊은 한숨으로 맞이했다. 한심하게 생각하는 듯한 눈치였다.

“바츠, 이러지 마. 너도 직접 봤잖아.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르크는 너에게 아무런 미련이 없어. 너 하나 없다고 그들이 크게 느낄 것 같아? 그냥 조금 불편해지는 것뿐이야. 그냥 사고일 수도 있다고? 그래, 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어. 그들을 알아보는 건 쉽지 않지. 하지만 그 혁명을 실행할 목적으로 들어간 놈들에게는 우리들끼리 알아볼 수 있는 표시가 있어. 아주 은밀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는 표시이지. 뺨에 새겨진 흉터. 뜨거운 인두로 지져서 만든 흔적 말이야. 그 흔적이 놈들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지. 네 누이를 살해한 그의 아이 중 하나에게 그 흔적이 새겨져 있다고.”

바츠는 이롤로의 말을 듣고 나자 문득 그의 가족들 중 동그란 얼굴의 소녀를 떠올렸다. 테라치를 좋아했는지, 테라치를 찾기 위해서 집까지 찾아오고는 했던 아이였다. 나중에는 급격히 친해져 매우 가깝게 지냈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오른쪽 뺨에 흉터가 이롤로가 지금 말하는 흔적과 매우 흡사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분명 그때는 치료시기를 놓쳐 덧난 자창으로 보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화상으로 인한 보기 흉한 상처였다. 바츠는 그 아이의 이름이 ‘애니’라는 것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사이 이롤로가 자리를 바로 옆으로 옮겨 앉으며 말했다.

“바츠, 난 말이야 너보다도 훨씬 가까이에서 그녀와 함께 있었어. 비록 한 때였지만 그녀를 도와 아르크를 전복시키기 위해 애를 썼단 말이야. 난 그녀가 가장 아끼는 심복이었다고. 하지만 지금 그녀는 나를 뭐라고 하지? 미쳤다고 말을 하잖아. 직접 눈으로 보라고. 네가 보기에도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진짜 미친 건 누구지?”

바츠가 말없이 빤히 바라만 보자, 이롤로가 바츠의 한쪽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리며 말했다.

“바츠, 사람은 말이야. 아무리 다양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있어. 단 하나의 신념. 모든 것에는 기준이 있는 법이거든. 신념은 개인의 선택에 유일한 기준이야. 절대 변하지 않는 강력한 기준. 그 미친 녀석이 한 꼴을 보라고. 수십 명의 사상자를 만들어내고 있어. 우리 전력의 30퍼센트는 회생 불가로 만들기까지 했지.”

바츠는 이롤로가 마지막에 장난스럽게 지칭한 그 미친 녀석이 테라치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비록 이롤로가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조금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던진 말인 듯 했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테라치로 인해서 이롤로는 물론이고 이곳 서울이 곤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롤로가 테라치를 욕보이는 것 같아 왠지 불편했다. 그러자 이롤로가 바츠의 속마음을 느꼈는지, 민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긁적였다. 조금 머쓱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밖의 상황 때문에 어색한 분위기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롤로가 민망해하던 감정을 단숨에 떨쳐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때마침 온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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