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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262화 (262/268)

< --   16. 새로운 감염   -- >         * 262화 *

바츠는 그런 이롤로를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그가 언급할 만 한 건 테라치뿐이었는데, 테라치가 현재 이곳에 왔을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황당하게 느껴질 만큼 생소했다. 하지만 이롤로의 수하가 초조한 얼굴로 나타났을 때에는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곳까지 안내해주었던 그였다. 그가 뭔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달려와 말했다.

“놈이 다시 왔어요.”

그의 단출한 보고를 들은 이롤로가 바츠를 강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뭐해? 오랜 만에 보는 것 아니야? 가서 만나보자고. 우리의 친구를 말이야.”

바츠는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이롤로의 뒤를 순순히 따랐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밀려드는 기대와 불안에도, 몸은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멀리 가지는 않았다. 이롤로가 건물을 나서자마자 바로 멈춰 섰다. 광장과 이어진 계단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대여섯의 칼리에가 먼저 자리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자신의 검을 뽑아들고는 계단 아래를 긴장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들과 함께 서자,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란을 더욱더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이곳으로 오며 지났던 통로 쪽이었다. 그곳으로 겁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과 긴박한 인기척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절박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십여 명의 혼비백산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반대쪽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전부 30여명이 넘는 숫자였다. 하지만 먼저 도망쳐온 사람들은 비록 낡고 무뎠지만, 저마다 상대를 충분히 해치고도 남을 만한 소총이나 둔기 등을 손에 쥐고도 저항할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서로 경쟁하듯 누가 더 멀리 그리고 누가 더 빠르게 달아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반대쪽에서 뒤늦게 달려온 사람들은 비록 투박한 칼을 들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도망쳐 온 통로 쪽을 향해 용감하게 달려 나갔다. 결국 두 무리는 광장 중앙을 기점으로 서로 엇갈리며 교차했고, 이내 어느 쪽이 더 현명한지 금세 판가름이 났다. 승자는 겁을 집어먹고 달아난 사람들이었다.

“헌터는 질병만큼 강하지. 그리고 저 녀석은 더욱더 강하고.”

이롤로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단순히 달아난 사람들을 향한 불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이롤로는 그들에 대한 어떤 원망도 없었다. 그들은 군인이라고 불리기에도 초라한 시민군일 뿐이었다. 겁을 먹고 달아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눈앞에 닥친 위험은 그들이 감당하기에 너무도 크고 끔찍했다. 이롤로는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은, 뒤늦게 달려와 그 위험에 맞서는 20여명의 사람들에게 그 어떠한 가호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칼리에였다.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뿐이었다. 비록 결과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체념으로 돌아왔지만 후회는 없었다. 후회를 할 틈도 없다고 해야 했다. 두 눈을 의심해야 할 만큼 빠르게 번쩍이는 검은 그림자는 그들에게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검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가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수십 명의 칼리에들 사이를 지나며 사방에 피를 뿌렸다. 이따금씩 눈에 보이는 정전기를 일으키며, 반복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는 광경이 너무도 익숙하다 못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너무 빨라 원래의 모습을 제대로 목격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저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칼리에를 지켜보며, 현재 상황이 어떤지 파악할 수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심지어 그 그림자는 총탄마저도 비켜가는 것 같았다. 어딘가에서 날아드는 총탄이 그림자 주위로 비처럼 쏟아졌지만, 꽁무니만 겨우 쫓을 수 있을 뿐, 어떤 방해나 장애가 되지는 못했다. 그 그림자는 앞에 선 칼리에를 순식간에 전부 살해하고는 광장을 가로질렀다. 멀리서 날아드는 총탄이 수시로 모습을 감추는 그림자를 맞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으로 보였다.

“테라치!”

바츠는 그 그림자를 향해 소리쳤다. 막 계단 앞을 지날 때였다. 아니, 그쯤인 것 같았다. 그 그림자는 어느새 또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방향을 돌려 계단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에야 겨우 다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방독면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테라치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를 알아보는 것은 체형과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계단을 오르지 않고 밑에서 위를 빤히 지켜보며 몸을 멈춰 세웠다. 그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테라치, 진정해! 네가 들어야 할 말이 있어!”

바츠는 음성을 통해 그가 테라치라는 확신이 들자, 가슴이 절로 벅차올랐다.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인한 흥분이 밀려든 탓이었다. 그를 향해 가장 큰 목소리로 외치며 반가움을 에둘러 표현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뜨거운 열기가 묻어나는 숨결로 대답했다.

“변명은 지겹도록 들어왔어. 내게 필요한 건 변명이 아니야. 너 역시 내게 변명을 하려는 것이거든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변명은 내게 항상 상심만 주고는 했으니까 말이야. 스톡홀름의 그 괴짜 주인조차도 위로가 되지 못했지.”

테라치가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내딛는 발걸음이 계단을 전부 부숴버릴 것만큼 무게감이 느껴졌다. 가끔 그의 발밑에 밟히는 자글거리는 모래 소리가 곧 무너져 내릴 계단의 신음처럼 들렸다. 그런 그를 향해 함께 위에서 지켜보던 칼리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바츠는 멈추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롤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테라치에게 무기력하게 살해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볼 뿐이었다.

다섯이나 되는 인원이었지만 테라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신체 일부와 생기를 동시에 잃으며 계단을 굴러 내려가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는 콘솔조차도 사용하지 않은 그였다. 그는 그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칼리에에게 차례로 대응하며 계단을 올랐을 뿐이었고, 칼리에는 그대로 그를 스쳐 지나며 숨을 거둬야 했다. 잘려나간 신체와 함께 굴러 떨어지며, 충격으로 정신을 먼저 잃을 수 있는 것이 다행으로 보일 만큼 초라하고 처참했다. 그의 검은색에 가까운 붉은 카니지가 차갑고 단호해 보였다.

이롤로는 이제 자신의 차례임을 직감한 것 같았다. 테라치가 계단을 다 오르자 혼신을 다해 카니지를 휘둘렀다. 정확히는 계단 중간쯤에 다다른 테라치가 갑자기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고, 이롤로는 거기에 대응한 것이었다. 둘은 삽시간에 엉겨 붙었고, 소름끼치는 금속음을 주위로 양껏 퍼뜨렸다. 테라치는 손톱을 바짝 세운 헤러티커처럼 칼날을 날카롭게 세워 이롤로를 사냥하듯 몰아붙였고, 이롤로는 뒷걸음질과 함께 막아내는데 급급하며, 위태로울 때마다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겨우 견뎌내고 있었다. 아마도 부상으로 인한 한쪽 어깨의 불편으로 제 기량을 뽐내지 못하기 때문으로 보였지만, 그의 상태가 온전하다고 하더라도 테라치를 상대로 호각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둘의 차이는 어릴 적 아르크에 있을 때보다도 훨씬 더 극명하게 보였다.

“그만 둬! 멈추라고!”

바츠는 그런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자신의 카니지로 이롤로를 대신해서 테라치의 공격을 한 차례 막아낸 뒤, 그대로 있는 힘껏 뒤로 밀어냈다. 비록 완전히 물러나게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테라치가 잠시 멈출 수 있게 만들 수는 있었다. 테라치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지, 조금 머뭇거리며 눈앞을 살폈다. 바츠는 그런 테라치의 눈빛이 다시 번뜩이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테라치, 오해가 있는 거야! 내 말을 들어! 기다리라고! 네가 이러는 건 프리샤 때문이잖아! 프리샤가 칼리에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잖아! 하지만 그게 아니야. 프리샤는 칼리에에게 살해당한 게 아니라고!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야?”

바츠의 외침에 테라치가 칼끝을 내리고는 차분한 호흡을 땅속 아주 깊은 곳까지 짓누르며 기다렸다. 그의 검은색 헌터 슈트 위로 아지랑이처럼 검은 색 불길이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할 만큼 섬뜩한 모습이었다. 방독면 렌즈를 통과해서 흘러나오는 그의 시선이 차갑다 못해 뜨거웠다. 당장에라도 바츠와 이롤로를 검은 불꽃으로 연소시켜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바츠는 그것이 테라치가 주는 기회라고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이어질 다음 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애써 마음을 붙들며 틈을 만들어준 것이 틀림없었다. 바츠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롤로 앞을 완전히 가로막아 서며 말했다.

“내가 들었어. 직접 들은 거라고. 프리샤를 살해한 건 칼리에가 아니라 아르크의 지령을 받은 군인이라고. 그가 직접 말했어. 그를 만나게 해줄 수도 있어. 정말이야.”

바츠는 테라치의 움직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게다가 프리샤는 네 친엄마를 살해한 장본인이라고. 네 진짜 엄마를 죽인 건 프리샤 그녀란 말이야! 네가 잃어버렸다는 그 금속 동전. 네 친엄마가 지상에서 살며 가지고 있던 물건이라고 했어. 그게 증거야, 그 유품 말이야. 그 동전은 이곳 아이기스의 본거지에서만 쓰이는 물건이라고. 오직 이곳에만 있는 물건!”

“...알고 있어.”

테라치가 입을 열었다.

“프리샤가 죽는 그날. 그녀가 내게 말했어. 곧 자신이 죽을 테지만 아무것도 믿지 말라고. 서울이든, 아르크든 그 어디로도 가지 말고 멀리 떠나라고 했어. 멀리 떠나서 살아가라고 그랬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했지.”

“그런데 왜...왜 여기에...”

바츠의 물음에 테라치가 방독면을 벗었다. 그의 땀에 젖은 금발과 물기 하나 없을 만큼 메마른 푸른 눈이 눈에 들어왔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금속 주전자처럼, 단단하면서도 몹시 지친 묘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생기 없는 표정에 섬찟한 미소를 걸며 대답했다.

“내가 그랬어. 나도 안다고.”

바츠는 양 볼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얼른 카니지를 바로 세웠다. 그러자 어느 틈에 달려든 테라치의 카니지가 부딪혀왔고, 그 충격은 처음 검을 쥐고 휘둘렀던 것보다도 수십 배는 더 컸다. 이제는 군살하나 없이 밋밋한 여린 손이 아니라, 부어오른 것처럼 딱딱한 굳은살이 잔뜩 솟아오른 손이었는데도 손바닥이 전부 찢길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 했다. 이롤로가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해보지도 못하고 내내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테라치는 정말 강해져 있었다. 전에는 그저 저 높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더라면, 이제는 도무지 오를 수 없는 절벽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죽음을 직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이롤로가 합세하며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둘이 함께 대응했는데에도 불구하고, 테라치는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었다. 바츠는 결국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카니지를 바닥에 떨어뜨려야 했고, 이롤로는 테라치의 날렵한 발차기에 가슴을 제대로 얻어맞으며 나뒹굴어야 했다. 바츠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허리도 제대로 피지 못할 만큼의 통증을 가까스로 붙들며 필사적으로 소리쳐야 하는 것이 전부였다. 테라치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한쪽 어깨를 뒤로 빼고 카니지를 막 휘두르기 직전이었다.

“테라치! 정신 차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바츠의 외침에 테라치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내가 혼자라는 건 변함이 없잖아.”

“그렇지 않아, 테라치! 그래, 이것! 이것 보라고!”

바츠는 불현 듯 스치는 기억에 손바닥의 통증도 잊고, 얼른 품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편지를 하나 꺼냈는데, 전에 아네트가 테라치에게 전해달라고 했던 그 작은 편지였다. 바츠는 그 작은 편지를 테라치에게 건네며 소리쳤다.

“보라고! 넌 혼자가 아니야! 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

테라치는 그 편지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바츠와 한쪽에 주저앉아있는 이롤로를 차례로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츠가 말했다.

“아네트의 편지야. 아네트를 기억하지? 널 기다리고 있다고.”

테라치는 편지를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엄청난 장문의 편지가 아니었음에도 꽤 오랫동안 내용을 살폈다. 아마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주위에는 극도의 긴장감과 함께 무거운 침묵이 차올랐고, 바츠와 이롤로는 숨통이 조이는 아찔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바츠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말을 걸기 위해 조금 움직일 때 비로소 테라치의 시선이 다시 정면으로 돌아왔다. 그가 말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그 유전공학 기술. 그걸 가지러 왔다. 프리샤와 내 친엄마를 살리겠어. 녀석이 거부하고 저항하는 한, 난 이곳에서 싸울 수밖에 없어.”

말을 마치는 테라치의 시선이 아직까지도 일어나지 못한 이롤로에게로 향했다. 대답은 바츠가 아니라 이롤로가 했다.

“멍청한 녀석...그 기술은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어. 네가 유일하고 아주 이례적인 일이지. 그건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넌 그저 운이 정말 좋았던 것뿐이야. 그 기술은 기껏해야 돌연변이나 만들어낼 뿐이었지. 넌 그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돌연변이라고. 게다가 그건 말 그대로 유전자를 조작하는 기술이야.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 따위는 할 수 없다고.”

“...스톡홀름 시티의 그 괴짜들도? 그들도 불가능할까?”

테라치가 이롤로에게 물었다.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이전과 다르게 조금 애원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롤로가 조롱 섞인 코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너도 만나 봤을 것 아니야? 그들도 의체를 만들어 신체를 보안하는 것이지,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게 아니라고. 그나마 네가 원하는 기술에 가장 근접한 기술이기는 하지. 아르크에서도 헌터들에게 그 기술을 가져오라고 지시하는 이유잖아? 너도 잘 알고 있는 것 아니었어? 무엇보다도 만약 네가 말한 기술이 정말로 실존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 기초가 될 수 있는 흔적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 프리샤나 네 어머니의 DNA 말이야. 사람을 너무도 쉽게 죽이고 다니다보니, 이제는 생각이라는 것을 아예 하지 않는 모양이지?”

“이거면 충분할까?”

테라치가 이롤로의 빈정거림에,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한 줌의 보라색 머리칼이었다. 바츠는 그것이 프리샤의 흔적이라는 것을 단 번에 알아보았다. 분명 그녀의 머리칼이었다. 이롤로가 당황스럽고 놀란 눈으로 테라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와는 전혀 다르게 연민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너...진심이었던 거야? 진심으로 그런 기술이 있을 것 같아서 이랬던 거야? 맙소사...테라치, 대체 너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알고 있던 그 테라치가 맞아? 이토록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니...테라치, 미안하지만 소용없어. 다시 말하지만 그런 기술은 세상에 없다고. 넌 그냥 괴물일 뿐이야. 그게 가능했다면 이미 너는 혼자가 아니었겠지.”

이롤로의 대답이 너무도 매몰찼던 것일까? 테라치의 손에 올려 진 보라색 머리칼이, 이롤로의 입김에 날려 한 올 한 올 주위로 흩날리며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테라치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졌고, 두 눈은 초점을 잃으며 넋을 놓았다. 그는 손 위에 머리카락이 전부 바람에 날려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움직임일 수 있었다. 방독면을 다시 뒤집어썼고 몸을 돌려 세웠는데, 자리를 떠나가는 그의 발걸음이 방향감을 상실한 사람처럼 기운이 없었다.

“우리는 장로 로리나, 그녀를 막아야 해! 그녀는 우리 아르크를 크루엘라로 전부 감염시킬 생각이야. 그게 여의치 않으면 고농축 암모니아 폭탄을 쓸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 그럼 정말 끔찍할 거야. 수십, 수백 명이 죽고 말 거라고! 난 그 사실을 알고 이곳을 점령한 거야! 나도 아르크가 원망스럽고, 아르크가 개방되길 원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테라치! 우리 아르크가 위험하다고!”

이롤로가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런 테라치의 등 뒤로 소리쳤다. 이미 테라치가 조금 전 자신을 살해하려고 했던 기억은 잊은 듯 보였다. 테라치를 향해 간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테라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가져온 검은 긴장감과 함께 그대로 도시를 떠났을 뿐이었다. 아무런 경계심도 없는 무방비 상태였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느새 몰려온 도시의 군인들과 칼리에들이 테라치를 뒤에서 습격하려고 했지만 이롤로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이롤로는 테라치를 해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이롤로가 떠나간 테라치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혼잣말로 읊조렸다.

“녀석이 함께 하면 참 좋았을 텐데...”

바츠는 그게 이롤로의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심으로 테라치의 존재를 아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한 시라도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롤로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롤로는 서둘렀다. 남은 칼리에와 군인들 모아 아르크로 향하기 위한 군대를 조직했고, 밤이 오기 전에 서울을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군대와 함께 전진기지에 도착해서 장로 로리나를 만났다. 그녀는 도시 일리트시가 아니라 전진기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셀레나와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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