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65화 (265/268)

< --   16. 새로운 감염   -- >         * 265화 *

바츠는 그런 그가 반가웠다. 그라면 이롤로가 말한 인물로 충분히 적합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를 떠올리지 못했는지, 순간적으로 자신을 원망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자신과 이롤로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전진기지를 향해 걸음을 옮긴 탓이었다. 둘 사이를 서슴지 않고 파고들어, 먼저 자리를 떠나는 그의 모습이 마치 멀리서부터 불어온 검고 시린 바람 같았다. 덕분에 바츠는 선뜻 그의 뒤를 쫓지 못하고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아야만 했다. 얼떨떨한 기분에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옆에 선 이롤로를 빠르게 돌아보며 살피는 데 더 바빴다. 이롤로의 생각이 궁금했다.

이롤로는 그가 지난 자리에 남은, 그 검고 시린 바람을 민낯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그렇게 보였다. 방독면을 빠져나와 그의 뒷모습을 쫓는 시선이 날카롭고 복잡하게 빛나고 있었다. 틀림없이 바츠와 비슷한 느낌을 받으며 생겨난 걱정으로 인한 우려였다.

“혹시 밖에 있는 군대가 신경 쓰인다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를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니니까요. 당신도 이미 알고 있죠? 나도 이제는 알아요. 칼과 당신이 했던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안다고요. 아르크를 해방시키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이에요.”

바츠는 이롤로와 함께 뒤늦게 몸을 움직여, 다시 전진기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입을 열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조금은 들뜨고, 약간은 호들갑스런 행동이었다. 스타드는 이미 안쪽으로 멀찌감치 들어가 서 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바츠와 이롤로를 지그시 바라보며 지켜보았다. 그보다 한발 더 뒤에서 따라온 셀레나에게는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도 이렇게 우리를 습격하지 않은 것이죠? 아르크로 이제야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잖아요.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아이기스가 아니라고 말했었잖아요.”

바츠는 말을 멈추지 않고 바로 이었다. 잠시라도 입을 닫으면 적막이 찾아오며 불행을 만들 것 같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방독면을 벗는 자신의 손길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불길했다. 조금만 지나면 거센 비바람이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온몸을 흠뻑 적시게 될 비바람. 그 비바람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것이 착각이고 오해라는 것을 그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조급함이 먼저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츠의 기대를 가볍게 저버렸다. 비바람이 불어 닥칠 기회를 그가 스스로 만들어냈다.

“뭔가 잘못된 것 같군. 내가 늦은 이유는 아르크를 지키기 위함이다. 아이기스가 어떻게 되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집사 네 손에 끝장이 난다면 오히려 반가운 일이란 말이다.”

바츠는 스타드의 입에서 흘러나온, 광택이 흐르는 회색빛 대답에 결국 말을 잃었다. 비록 잠시였지만 몸을 돌려세우다가 뒤에 선 사람과 충돌한 그런 느낌이었다. 놀랍고 당황스럽고 충격적이어서 순간적으로 경직되어야만 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반응에 입술을 떼기 힘들었다. 정확히는 기대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해야 했다.

“어째서...당신도 분명 아르크가 달라지길 바랐잖아요. 칼! 그래, 칼과 그래서 그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거잖아요. 내가 이곳에 처음으로 온 그 날 말이에요! 난 그때를 똑똑히 기억해요! 일부로 내가 들을 수 있도록 했던 것이잖아요!”

“집사, 어리석구나. 네 누이가 죽은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인가?”

스타드의 계속된 싸늘한 목소리가 바츠의 심장에 날아와 꽂혔다. 평정심을 잃어가는 바츠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바츠는 섬뜩한 기분에 밑이 허전하고 다리가 떨리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무슨 말이죠? 케일리가 왜요? 장로 로리나가 나를 기만하기 위해 그랬던 것이잖아요. 내가 바보처럼 속아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길 바랐던 것이죠. 하지만 난 이렇게 돌아왔어요. 당신들이 원하던 그대로 말이에요.”

“그렇겠지. 만약 네 누이가 사망한 이유를 처음부터 장로 로리나의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서울로 가는 일도 없었을 거야. 너는 지금쯤 부사령관의 이웃이 되어 있겠지. 그리고 장로 로리나는 집사 너의 이름으로 살해되고, 아이기스에 대한 증오와 공포는 아르크를 더욱더 공고히 만들고 있겠지. 가진 것을 잃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칼과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 가족들...내 가족들이 지금 가진 것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다. 그것만큼 억울한 것도 없지. 나의 가족들이 저들과 같아진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지?”

스타드의 시선이 이롤로의 얼굴을 빠르게 흘기며 다녀왔다. 바츠는 물었다.

“하지만 당신들은 분명...분명 그때는 생각이 달랐잖아요? 아르크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잖아요. 그때는 그랬잖아요. 왜? 왜 이제 와서...대체 왜...”

스타드는 목소리에 힘을 잃고 말을 흐리는 바츠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무거운 정적과 약간의 고독을 초대하고 있었다. 둘을 비롯해서 남은 다른 두 사람마저도 쉽게 끼어들지 못할 만큼 압박감이 대단했다.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모두가 질식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낄 쯤에야 입을 열었다. 건조하면서도 딱딱한 말투였다.

“내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건가?”

“듣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틀리다는 말을 하는 거라고요! 예전의 당신으로 돌아오라는 말이고요! 그때 당신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했잖아요. 그래서 그때 내게 그런 고백을 한 것이었잖아요! 기억하지 못하는 거예요?”

바츠는 머릿속에 아주 오래전 스타드 그가 돌아왔을 때의 고백이 떠올랐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가 저지른 학살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고백은 후회로 점철되어 있었고, 연민과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당시 그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지금과는 달랐다. 현재의 그는 변해 있었다. 자신의 격앙된 반응에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뱉은 호흡으로 반응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심지어 그의 회색빛 두 눈이 예리한 칼날처럼 번뜩이기까지 했다. 진심으로 상대를 난도질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작 전해지는 기분은 두려움이 아닌 발악이었다. 달아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 그리고 마지막 오기. 그가 말했다.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지는 군. 우리들이 딱 싫어하는 거야. 그렇지? 난 지금까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 왔다. 너 역시 그들 중 하나가 되는 건 손쉬운 일이지. 지금 이 방에 있는 모두 말이야. 난 그들의 영혼까지도 살해했다. 그런데도 계속 그렇게 고집을 부릴 셈인가? 집사 네가 내게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 역시 너를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 자리로 돌아와라.”

바츠는 흥분을 억누르고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서, 그래서 우리를 쫓았던 건가요? 내가 스톡홀름 시티로 가던 그 날. 그날부터 나를 쫓았던 거죠? 나를 막기 위해서, 그렇죠?”

“아니, 그 전부터 너를 쫓았다. 네가 칼리굴라를 만나기 위해 오데사 시티로 갔던 그날부터 말이다. 부사령관이 아르크 눈을 통해 전언을 보내왔지. 그가 그토록 누군가를 호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말했지. 곧 닫히게 될 빅애스를 앞에 둔 것처럼 조급하게 굴었지. 그는 빅애스 밖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기껏해야 비스듬히 앉아서 넌지시 던지는 부탁이 전부였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낯선 모습이었다. 그때만큼은 분명 다르더군. 그에게 받은 첫 명령이었다. 아르크가 이토록 위험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지. 내 가족들까지 전부 다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모를 만큼 위태롭다고 했다.”

스타드의 기다렸다는 듯이 되돌아온 응답에 바츠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그의 대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언급한 당시에 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멘디를 데려오기 위해 칼리굴라의 빌딩에서 막 빠져나왔을 때였다. 그때 그와 마주했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엉뚱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살이 떨릴 만한 무서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지금에야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그의 방문은 전적으로 부사령관의 사주였던 것이다.

“...당신...지금도 부사령관의 부름에 응답한 거로군요. 그렇죠? 당신이 칼과 나눴던 그 진솔함을 기억하고 있나요? 그 정직을 기억하느냐고요. 당신이 생각했던 그것. 그것이 아직 남아있는지 알고 싶은 거라고요. 대답해 봐요. 난 억지나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에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바츠의 물음에 스타드가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그럼 너의 영혼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바츠는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스타드에게 대적하게 된다면 될까? 과연 그를 제압할 수 있을까? 이롤로. 이롤로와 함께 싸우면 승산이 있지는 않을까? 그래, 셀레나! 셀레나도 있었다. 그녀의 솜씨라면 비록 협소한 공간으로 장애가 있더라도, 만족할 만큼의 도움이 되는 사격이 가능했다. 셋이라면 그를 긴장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만났던 테라치를 떠올리면 마냥 그렇지만도 않았다. 아직 검은 카니지를 얻지 못한 테라치에게도 바츠와 이롤로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비록 이롤로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결과가 달랐을 거라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테라치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막강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눈앞에 스타드는 이미 블랙의 경지에 오른 헌터였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 그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죽음으로 달려가는 길에 불과했다.

바츠로서는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선택은 바츠가 아니라 스타드의 몫이었다. 그는 기회를 준 것이 아니었다. 확정을 선고한 것이었다. 그가 바로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바츠와 이롤로 그리고 셀레나가 선 입구 쪽을 향해 거리를 좁혀 와서는, 흑색의 카니지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들숨과 날숨이 채 한 번을 오가기도 전이었다. 그의 칼날이 바츠, 이롤로, 셀레나에게 차례로 날아들었다. 바츠는 머리를 숙이고 몸을 옆으로 빼내며 가까스로 피해냈다. 이롤로 역시 반대쪽을 향해 몸을 날려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에 섰던 셀레나는 달려드는 스타드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는 바람에 달아날 기회를 놓쳤다. 자신의 소총을 들어 올려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지저분한 음색의 충돌음이 울려 퍼졌고, 셀레나는 뒤로 나자빠지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소총이 반 토막이 나지 않은 게 다행으로 보일 만큼 그의 힘은 강했다. 그녀의 두 눈이 절로 동그랗게 변했다.

바츠는 그 사이 이롤로와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고는 스타드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둘의 카니지가 스타드의 몸통을 향해 휘어 들어갔고, 그는 몸을 돌려 세움과 동시에 칼날들을 쳐냈다. 너무도 손 쉬워 따분해 보일 만큼 간단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는 이롤로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는데, 고작 3번이었다. 그의 칼날이 3번 휘둘러지는 것만으로도 승부는 판가름이 났다. 이롤로는 앞선 2번은 뒷걸음질과 함께 막아냈지만, 3번째는 도저히 그의 힘과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겠는지, 돌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볼썽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이롤로로서는 최선을 다한 회피였다. 그의 마지막 칼날이 이롤로의 목이 있던 허공을 갈랐다.

바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에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쓰러진 이롤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적어도 이롤로의 머리통을 곧 반으로 자르게 될 그의 오른 손목에 부담감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하고 있었는지, 간결한 움직임으로 자세를 고쳐 잡고는 바츠의 카니지를 쳐냈다. 바츠가 손목이 부러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을 만큼 강력한 일격이었다. 바츠의 카니지는 손을 떠나 주방 쪽으로 날아갔고,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가 된 바츠는 가슴팍에 발길질을 얻어맞으며 뒤로 나뒹굴었다. 바츠가 겨우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로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그가 칼끝을 얼굴에 들이대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소리쳤다.

“정직은 수치스러움을 느낄 줄 아는 데에서 시작해요! 당신은 적어도 내게 정직하려고 노력했잖아요! 지금 당신의 모습이 수치스럽지 않아요? 당신도 무엇이 잘못된 지 잘 알잖아요! 당신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 말이에요! 왜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예요! 왜 기억하지 못하는 척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냐고요!”

바츠의 외침에 스타드가 흠칫 놀라며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스타드의 시선이 흔들리는 걸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던 바츠조차도 모를 정도였다. 그가 읊조리는 말투로 느릿하게 대답했다.

“신념은 진실을 벤다. 그리고 믿음은 그 신념을 부수지. 하지만 간절함은 이 모든 것을 상쇄 해버린다. 가족은 내게 간절함이다. 내 믿음과 신념 따위는 황량한 지상에 버렸다. 칼이 떠나던 그날 말이다. 내 앞의 수많은 헌터들과 집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지야라는 그 포기에 대한 책임감일 뿐이다. 맹세를 저버린 자들, 그 실패한 자들이 걷는 비열한 도피지. 난 간절함 앞에서 그 도피를 선택한 것이다.”

바츠는 문득 그가 고백을 하던 그때, 마지막으로 잠꼬대처럼 내뱉었던 용기가 없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해, 그저 슬픔에 잠긴 그가 무력함을 느끼고 상실감에 나온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깊숙한 곳에 비통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칼은 실패했다. 그는 가족 앞에 모든 걸 내려놓았다. 맹세를 저버렸고, 실패의 길을 선택했지. 나 역시도 나의 간절함 앞에서 매정하게 강요할 수 없다. 그걸 막는다면 네 영혼은 오늘 이곳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이다, 일리트시의 집사. 내게 간절함을 보여라. 그럼 어쩌면 네게는 약간의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른다. 부사령관이 이토록 다급하게 군다는 것은 적어도 너를 한순간이라도 총애를 했었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아직 그 기대가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 내게 그 말을 한 까닭이 뭐죠. 일부로 둘의 대화를 듣게 만들고, 나에게 그런 고백을 했던 이유가 뭐냐고요! 그때 당신은 분명 의도적으로 내게 했던 말이었잖아요!”

바츠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는 그때까지 기다려주었고, 대답은 없었다. 바츠는 다시 소리쳤다.

“대답해! 왜 내게 그런 말을 한 거야! 왜 그런 거냐고! 대체 나한테 왜!”

“...그게 이제 와서 의미가 있나? 새로운 것만이 진짜 새로움을 만들지. 하지만 그 새로움이 항상 옳지는 않다. 세상은 늘 변하지. 그리고 예측할 수 없다. 진실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진실이다.”

바츠는 그가 어렵게 대답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스톡홀름에서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닥터가 겹쳐 보였다. 그때 닥터는 죽음을 선택함으로서 현실을 외면한 채 용서를 빌고자 했다. 그게 모두가 나아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책임을 에르네스트에게 떠넘기는 무책임에 불과했다. 바츠는 또 다시 스타드를 향해 소리쳐야 했다.

“비겁해! 비겁하다고! 당신들은 전부 비겁해!”

“비겁해도 좋다. 나의 간절함에 미소를 새겨 넣을 수 있다면, 세상 모두가 검게 변하더라도 내 선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까 네 물음에 대한 답이다. 이게 내 대답이다.”

스타드가 이번 대답을 끝으로 카니지를 치켜 들었다. 셀레나가 몸을 일으키고 이롤로도 몸을 추슬렀지만, 스타드를 막을 수 없었다. 고작 몇 발자국 되지도 않는 거리였지만, 둘에게는 너무도 멀고 긴 거리였다. 바츠로서는 끝을 생각하게 되는 일이었다. 여기가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마치 헤러티커를 처음 만났던 그때 같았다.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처럼 레나타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낯익은 목소리가 대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을 만큼 시커먼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의 목소리가 구해주었다.

“너무 소란스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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